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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도 넘은 북한 도발…비핵화 협상 외엔 길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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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북한의 대남 협박이 도를 넘어도 한참 넘었다. 지난 4일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이 ‘쓰레기’ ‘X개’ 같은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부으며 탈북단체의 대북 전단 살포를 막으라고 우리 정부에 요구하는 담화로부터였다. 하루 뒤엔 통일전선부가 “적은 역시 적이다. 갈 데까지 가 보자”며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결단코 철폐할 것”이라고 엄포를 놨다. 통일부는 김여정의 담화가 나온 지 4시간 반 만에 긴급 브리핑을 열고 “전단 살포 금지 법안을 검토 중”이라고 발표했다. 때맞춰 청와대도 “대북 전단은 백해무익한 것”이라는 발언을 내놨다. 국내 비판 여론을 각오하면서까지 신속하게 북한의 불만 달래기에 나선 것이다.

연락사무소 폐쇄까지 거론, 고강도 압박 #심상찮은 정세 암시…철저한 대비 필요

그런데 북한의 대남 공세는 더 격렬해졌다. 북한의 선전 매체 ‘우리 민족끼리’는 문재인 대통령의 ‘선순환 관계’ 주장을 콕 집어 ‘무지와 무능의 극치’ ‘달나라에서나 통할 달나라 타령’이라 깎아내렸다. 선전 매체 ‘메아리’도 문 정부를 ‘사상 최악의 무지·무능 정권’이라고 비난했다. 이런 적반하장식 어깃장 행태들을 종합해 보면 대북 전단은 핑계일 뿐이고 뭔가 더 복잡한 의도가 깔려 있을 것이란 풀이를 낳게 한다. 탈북단체의 전단 살포에 아무리 분노했다 해도 남북 정상이 공동 추인한 남북 군사합의와 남북연락사무소를 ‘없던 일’로 하겠다고 협박할 사유로 들기엔 사안의 비중이 한참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북한의 대내외 정세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북한은 올해 들어 대중 수출입 규모가 전년 대비 90%나 급감해 북한 경제의 핏줄인 장마당이 크게 위축된 가운데 외화보유액도 고갈 조짐이다.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행정부는 대선과 코로나에다 인종 갈등 사태까지 겹쳐 북한과의 대화에 관심을 둘 여유가 없다. 따라서 북한은 내부 결속을 통해 체제 위기를 해소하고, 미국의 관심을 끌어내 북·미 교착을 뚫겠다는 속셈에서 ‘대남·대미 공세’에 시동을 건 것이란 분석이 설득력을 지닌다.

이미 지난달 24일 김정은 위원장 주재로 열린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가 “핵전쟁 억제력을 한층 강화할 새 방침들이 제시됐다”며 한동안 자제해 온 ‘핵 카드’를 꺼낸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앞으로 북한은 대륙간탄도탄(ICBM) 발사와 핵실험 가능성을 흘리거나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발사 체계를 갖춘 3000t급 잠수함 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등으로 미국을 압박할 가능성이 있다. 휴전선 일대에서 저강도 군사도발을 강행해 우리 의지를 시험하려 할 우려도 나오는 만큼 정부와 군은 대비에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다.

북한으로선 전례 없는 위기감 속에 판을 흔들어야 돌파구가 열린다는 의도겠지만 득보다 실이 클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북한이 도발하면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망은 더욱 촘촘하고 두터워질 뿐이다. 유일하게 북한을 편들어 온 중국조차 미·중 갈등 격화로 지역 내 안정이 절실해진 처지다. 북한의 도발엔 강경한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다. 북한의 도발은 미국인들의 반북 감정도 더욱 악화시켜 11월 대선에서 대북 대화파인 트럼프 대신 매파인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가 유리해질 가능성이 커진다. 한국에서도 반북 감정이 높아져 남북 협력에 적극적인 문재인 정부의 어깨에 힘이 빠질 수밖에 없다. 북한은 비핵화 외에는 길이 없음을 깨닫고 협상 테이블에 즉각 복귀하는 게 현명한 수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