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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말 대신 침방울, 슬로푸드 대신 정성 음식 어때요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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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9호 18면

쉬우니까 한국어다 〈1〉

중앙SUNDAY가 국어문화원연합회와 함께 ‘쉬우니까 한국어다’ 연재를 시작합니다. 우리 일상에서 자주 쓰이고 있는 복잡한 한자어, 뜻 모를 일본어, 어려운 영어 용어를 보다 알기 쉽게 바꾸려는 각계의 노력을 소개합니다.  

국립국어원 ‘새말모임’ 전문가들 #새 용어 등장하면 5일 안에 대체어 #‘전문용어 다듬기’도 올해 본격화 #국회 법제실 ‘법률용어 정비’ 제안 #최근 17개 상임위 중 5곳 통과해

“이제 팬데믹이 아닌 엔데믹이 우려되는 상황, 비말 감염을 최소화하는 드라이브스루 진료가 활성화돼야 합니다.”

전 세계에서 창궐하고 있는 중국발 역병의 현황을 전하는 요즘 흔한 뉴스 문구다. 하지만 이 문장 속 단어의 뜻을 다들 정확하게 알고 있을까. 이렇게 바꿔보면 어떨까.

“이제 감염병의 세계적 유행이 주기적 유행으로 바뀌는 것을 우려해야 하는 상황, 침방울 감염을 최소화하는 승차 진료가 활성화돼야 합니다.”

국립국어원이 운영하는 ‘새말모임’이 지난 1일 발표한 ‘다듬은 말’로 고친 문장이다. 글자수는 약간 늘어나지만 이해도는 확 높아진다.

새말모임

새말모임

새말모임은 어려운 외국어 신어가 널리 퍼지기 전에 일반 국민들이 이해하기 쉬운 우리말 대체어를 신속하게 제공하기 위해 국어 전문가는 물론 외국어·교육·홍보·출판·정보통신·언론 등 각계 전문가로 구성된 위원회다. 총 30여 명이 3개 조로 나뉘어 새로운 용어가 등장하면 매주 누리소통망(SNS)을 통해 토론을 하고, 이들이 매만진 용어는 국립국어원과 문화체육관광부 국어정책과의 검토를 거쳐 최종 확정된다. 외래어 신어를 발견한 지 5일 안에 대체어를 내놓는 것이 목표다.

문화체육관광부 국어정책과 김철 사무관은 “기존에는 ‘말다듬기위원회’에서 분기마다 5~6개의 외국어 신어를 다듬어 연간 20~24개의 대체어를 발표했다”며 “지금은 속도가 중요한 시대인 만큼 언론에서 새 용어를 사용하면 다음날 그 용어를 새말모임에 전달하고, 2~3일 안에 SNS 토론을 통해 대체어를 확정한 뒤 이틀간의 국민수용도 조사를 거쳐 확정한다”고 설명했다. 김 사무관은 “어려운 용어 때문에 국민들이 정보에서 소외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 가장 큰 목적”이라고 강조했다.

새말 모임이 지난해 10월부터 현재까지 만들어낸 ‘다듬은 말’은 74개. 요즘 자주 쓰이는 ‘언택트(untact) 서비스’는 ‘비대면 서비스’로 쓰자고 제안했다. 인공지능기술로 사진이나 영상에 다른 이미지를 중첩결합해 새로운 이미지나 영상을 만들어내는 ‘딥페이크(deepfake)’. 인공지능 심층학습을 뜻하는 ‘딥 러닝(deep learning)’과 가짜를 뜻하는 ‘페이크(fake)’의 합성어인 이 말은 ‘첨단조작기술’로 바꿨다. 식단 조절을 하는 동안 자신이 먹고 싶은 음식을 먹는 날을 뜻하는 ‘치팅 데이(cheating day)’를 대신하기 위해 ‘먹요일’이라는 신조어를 내놨다. 빠르고 간단하게 먹는 ‘패스트푸드’의 대척점에 있는 ‘슬로우푸드(slow food)’는 천천히 시간을 들여 만들고 먹는다는 뜻을 담아 ‘정성 음식’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 밖에 사용자를 속이기 위해 설계된 접속 환경을 뜻하는 ‘다크패턴(dark pattern)’은 ‘눈속임 설계’로, 상자를 열어 상품을 개봉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언박싱(unboxing)’은 ‘개봉기’로, 자신의 일상을 직접 찍어 온라인에 올리는 ‘브이로그(vlog)’는 ‘영상일기’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한자를 병행하지 않는 데서 나오는 혼란을 줄이기 위해 ‘의사 환자’는 ‘의심 환자’로 교체해 사용할 것을 권고했다.

국립국어원이 지난해 6월 출범시킨 ‘전문용어 표준화 민관 합동 총괄지원단’은 정부 정책 추진 과정에서 사용되는 어려운 전문용어를 국민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다듬어내는 곳이다. 일반 국민과 언어 및 사전 전문가, 각 부처 관계자 및 전문가 총 37명으로 구성돼있다. 국립국어원 강미영 학예연구관은 “세계적인 경제난과 재난 상황,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한 정보통신 및 과학기술 용어들이 계속 유입되면서 재난 안전·금융·교육·과학기술 및 정보통신 분야부터 다듬어낸 전문용어를 국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원단에서는 지난해 시범적으로 기상청·해양경찰청·해양수산부에서 사용하는 전문 용어의 일부를 다듬었다. 새 용어는 해당 부처의 전문용어 표준화 협의회를 통과하고 현재 문화체육관광부 국어심의회 심의를 앞두고 있다. ‘박무(薄霧)’는 ‘엷은 안개’로, ‘시정(視程)’은 ‘가시거리’로, ‘테트라 포드(tetra pod)’는 ‘네발 방파석’으로, ‘투묘(投錨)’는 ‘닻 내림’으로, ‘부이(buoy)’는 ‘부표’로 바꾸자는 식이다.

하지만 용어 교체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관련 부처 및 법률, 재판 등과도 촘촘하게 연관돼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해양경찰청의 전문 용어는 해군, 해양수산부는 물론 민간 선박회사, 보험사 등과도 밀접하게 연결돼 있기에 용어 교체 시 관련 분야와의 업무 협조가 필수적이다.

이를 위해 법을 만드는 국회의 역할이 중요하다. 국회 법제실은 지난해 8월 17건의 ‘법률용어 정비대상 개정법률안’ 의견서를 해당 17개 상임위원회 위원장에게 전달한 바 있다. 지난해 3월부터 법제처 및 국립국어원과 협의를 거친 213개 용어다. “국민으로부터 입법의 권한과 책임을 부여받은 국회는 법률을 알기 쉽고 명확한 용어로 표현해 일반 국민이라면 누구나 그 내용을 쉽게 이해하고 법을 잘 지킬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용어를 정비하게 된 이유다. 국회 법제실 법제연구과 김민지 서기관은 “지난 5월 말까지 환경노동위원회·기획재정위원회·국토교통위원회·정보위원회·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등 5개 위원회에서 법률안이 통과됐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지득(知得)하다’나 ‘부의(附議)하다’ 같은 부자연스러운 일본식 용어는 각각 ‘알게 되다’나 ‘회의에 부치다’로, ‘사위(詐僞)’나 ‘개장(改裝)’ 같은 어려운 한자어는 각각 ‘거짓’이나 ‘재포장’으로, ‘인부’ 같은 축약된 한자어는 ‘인가 여부’로 바뀌게 된다. ‘과태료에 처한다’ 같은 권위적인 표현은 ‘과태료를 부과한다’로 교체한다. 또 ‘불복이 있는 경우’처럼 문장 구조가 매끄럽지 않은 부분은 ‘불복하는 경우’로 간명하게 쓰는 식이다.

지난해 7월에는 어려운 법령용어를 정비하기 위해 210개의 대통령령을 개정했다. 어려운 용어는 쉽고 자연스러운 우리말로 바꾸고, 적절한 대체 용어가 없을 경우 쉬운 용어를 같이 쓰거나 설명을 추가하도록 했다. ‘천공(穿孔)’은 ‘구멍 뚫기’로, ‘유지(溜池)’는 ‘유지(溜池: 웅덩이)’로, ‘도체(屠體)’는 ‘도체(屠體: 도축하여 머리 및 장기 등을 제거한 몸체)’로, ‘통할(統轄)한다’는 ‘총괄한다’로 바꿔 쓰도록 했다.

정형모 전문기자/중앙 컬처앤라이프스타일랩 hyung@joongang.co.kr

공동제작: 국어문화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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