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방의 인문학

서구 제국주의가 탐냈던 저우산도, 고려 무역상 자취가…

중앙선데이

입력 2020.06.06 00:02

업데이트 2020.06.06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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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9호 27면

[중국 기행 - 변방의 인문학] 저우산 군도

저우산도 인근 보타산의 불긍거관음원. 고려 시대 송나라 사신단은 이곳에서 항해의 안전을 기원했다고 한다. [사진 신위진]

저우산도 인근 보타산의 불긍거관음원. 고려 시대 송나라 사신단은 이곳에서 항해의 안전을 기원했다고 한다. [사진 신위진]

서구 제국주의가 동아시아 바다로 진출해 오면서 가장 탐냈던 중국의 항구는 어디였을까. 홍콩이나 상하이 또는 광저우가 아니다. 우리에게는 다소 낯선 저우산도(舟山島)였다. 항저우만의 남쪽이 닝보(옛 지명 명주)고 항저우만의 동남쪽 큰 바다로 나가는 위치에 저우산도가 있다.

항저우만의 동남쪽 큰바다 길목
수심 깊고 굴곡 많아 배 대기 적합
저우산도 ‘꿩’ 대신 마카오·홍콩…

송나라 사신 서긍 『고려도경』엔
저우산도 ~ 고려 벽란도 항로 기록
해상가문 왕건 고려사에도 관심을

닝보의 동쪽 끝 바닷가에서 저우산도의 해안까지 가장 가까운 직선거리가 8~9㎞ 정도다. 지금은 연륙교가 놓여 있어 육상교통으로 이어져 있지만 닝보에서 저우산도 중심부까지는 75㎞ 정도를 가야 한다. 면적은 502㎢로 거제도보다 1.25배 큰 섬이다. 저우산도는 주변의 다른 섬들과 묶어 저우산군도라고 부르기도 한다. 저우산군도의 해역은 동서 182㎞, 남북 169㎞로 면적이 2만2000㎢에 달한다. 저우산도 이외에 면적 1㎢ 이상인 섬만 해도 58개나 된다. 행정구역으로는 저우산시이고 자체 공항도 갖고 있다.

일대일로는 환유라시아 교역로 현대판

저우산도는 수심이 깊고 해안에 굴곡이 많아 큰 배를 대기에 적합하다. 창강이나 첸탕강이 바다와 만나는 지역은 수심이 얕고 퇴적이 많은 데 비하면 항구로서는 상당히 유리한 입지였다. 특히 저우산도의 동쪽 바다는 구로시오해류가 한반도와 일본을 향해 북으로 흐르는 길목이었다. 전통시대의 항해는 바람과 해류에 크게 의존했기 때문에 구로시오해류를 탈 수 있는 길목이라는 것은 아주 유리한 입지였다. 대양의 항해에서는 해류를 바다의 고속도로라고 하는 바 저우산도는 고속도로 출입구에 자리를 잡은 셈이다.

북으로는 고려, 일본과 연결되고 남으로는 동중국해를 거쳐 동남아시아, 인도, 아랍과 연결된다. 그뿐만 아니라 저우산도에서 첸탕강을 거슬러 항저우로 가면 운하를 통해 내륙 곳곳으로 이어졌으니 해상교통으로는 그야말로 요지 중의 요지였던 것이다.

고려시대 송나라의 배인 신안 유물선.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고려시대 송나라의 배인 신안 유물선.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유럽인으로서 동아시아 바다로 가장 먼저 진출한 포르투갈은 1540년께 저우산도에 상륙해 밀무역하기 시작했다. 명나라는 20여 년 뒤에 이들을 쫓아냈고, 쫓겨난 포르투갈 상인들은 마카오로 옮겨가 자리를 잡으니 이것이 우리가 아는 마카오 역사의 시작이었다.

영국 역시 아편전쟁 이전부터 저우산도를 차지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강희 건륭 연간에는 이곳에 홍모관(紅毛館)을 세워 상주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장한 영국 함대가 드나드는 것을 경계한 청조는 국제무역을 광둥으로만 제한하면서 저우산도를 비워 버렸다.

고려의 배가 그려진 항해도 ‘황비창천’ 청동거울. [국립중앙박물관]

고려의 배가 그려진 항해도 ‘황비창천’ 청동거울. [국립중앙박물관]

그렇다고 그것으로 끝난 건 아니었다. 영국은 1840년 아편전쟁을 일으키면서 개전 초기에 저우산도를 점령했다. 아편전쟁은 광저우에서 촉발되었지만 실제 첫 번째 전투가 발생한 곳은 바로 저우산도였다.

청나라 군대가 저우산도에서 영국 함대를 향해 포사격을 하며 방어했으나 사거리가 미치지 못했다. 청군의 포격이 끝나자 영국 함대가 함포로 공격해 점령해 버렸다. 아편전쟁 전후 처리에서 영국은 저우산도를 확보하려 했으나 청나라가 끝까지 반대해 저우산도 대신 홍콩을 할양하는 것으로 매듭지어졌다.

지금의 신중국 역시 마찬가지다. 상하이의 푸둥신구에서 십여 개의 작은 섬이 모여 있는 양산진(洋山鎭)까지 장장 32.5㎞에 달하는 동해대교를 2005년 개통했다. 지금은 양상진에서 저우산도까지 60㎞가 넘는 어마어마한 길이의 해상 교량을 세우고 있다. 저우산도를 복합적인 국제산업 기지로 키우기 위한 개발계획에 따른 것이다.

저우산도에서 한반도에 이르는 항로는 송나라 사신단의 일원이었던 서긍이 남긴 『고려도경』에 상세한 기록이 담겨 있다. 서긍은 1123년 수도 변경을 출발해 운하를 통해 명주를 거쳐 저우산도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항해에 적당한 바람이 일기를 기다리면서 저우산도 바로 옆의 보타산(섬)을 찾아 항해의 안전을 기원했다. 큰 바다로 나가는 대기소가 바로 저우산도였던 것이다.

보타산 관음상. [사진 김인희]

보타산 관음상. [사진 김인희]

보타산에는 당나라 시대부터 불긍거관음(不肯去觀音)이라는 유명한 관음상이 있었다. 서긍은 불긍거관음의 전승에 대해서도 기록을 남겼다. 신라상인이 오대산의 관음상을 본국으로 가져가려 했으나 배가 암초에 막혀 나아가지 못하자 관음상을 내려놓았다.

이에 보타원의 승려가 가져가 봉안했고, 이후로는 바다를 왕래하는 선박들이 이 관음상에게 항해의 안전을 기원했다는 것이다. 9세기 중반 일본의 승려 혜악(慧鍔, 일본 임제종의 창시자)이 저우산도 부근의 신라초라는 암초에 걸려 배가 움직이지 못하자 기도해 배가 구조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죽음의 공포가 넘실대는 먼 바닷길로 나서면서 관음보살에게 생환과 재부를 기원했던 것이다.

송대 이후 13, 14세기 원대에 이르러 유라시아 대륙의 교역로가 안정되자 해상 교역로와 함께 환유라시아 교역로가 성립됐다는 것도 세계사에서 의미심장하다. 신중국이 추진하는 일대일로가 바로 이 환유라시아 교역로의 현대판인 셈이다.

다시 서긍의 항로를 따라가면, 저우산도에서 ‘바람이 익어’ 적합한 방향으로 바람이 불자 배를 띄어 큰 바다로의 항해를 시작했다. 서긍은 보타산을 지나 저우산군도를 빠져나간 뒤 북쪽으로 백수양, 황수양, 흑수양 등을 지났다. 협계산(夾界山·가거도)을 지나 흑도(흑산도)에 이르렀다. 이 항로가 바로 사단항로(斜斷航路)다. 흑도에서 연안을 따라 북상해 군산도(선유도)를 거쳐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壁瀾渡)로 향했다. 배는 벽란도가 종착이고 사신은 육로로 개경의 고려 왕성으로 들어갔다. 서긍의 기록에 의하면 저우산도를 출발해서 5일째 흑산도를 보았고, 8일째 군산도에 도달했다. 명주에서 벽란도까지 38일, 귀국할 때에는 42일 걸렸다고 한다.

고려 화문석·부채·청자, 송나라서 인기

벽란도는 안타깝게도 지금 당장은 가볼 수가 없다. 그저 강화도 평화전망대나 교동도 해안에서 멀리 바라보는 게 고작이다. 벽란도의 배후인 개경이 13세기에 10만 호였다고 하니 인구로는 50만 정도였을 것이다. 같은 시기 유럽에서 가장 컸던 피렌체가 인구 10만 정도였던 것에 비하면 개경이 세계적인 대도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와 송나라 상인들의 사무역은, 사신단의 공무역에 비해 횟수나 거래규모에서 훨씬 컸다. 고려사의 기록만으로도 송상은 260여 년간 120차례 벽란도를 찾아왔고 인원수로는 연 5000여 명에 달했다. 김영제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고려에 귀화한 송상도 적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이들은 고려에서는 출신지에 따라 송상이나 송도강(선박주)이라 불렀지만, 송나라에서는 고려선박의 주인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심지어 고려의 정보원으로 의심받기도 했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무역 아이템도 상류층의 고가 사치품에서 대량 소비물품들로 확대됐다. 선박 기술도 크게 발전해 송나라의 대형 첨저선은 수송능력이 상당히 커졌다. 선박임대 계약도 등장해 송나라 배를 전부 또는 일부를 임대하는 고려 무역상도 있었다. 통일신라시대에 이어 우리의 역사에 해양국가적 특성도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국제성이란 면에서 고려 가요 쌍화점을 종종 거론하게 된다. 회회(回回·이슬람인)가 손을 잡을 일이 발생할 정도로 외국인들과 섞여 살며 번성하던 개경이나 벽란도의 거리를 연상하게 된다. 지금으로 말하면 이태원거리랄까.

발길을 다시 남으로 이어가면서 우리의 고려사 인식을 잠시 돌아보게 된다. 침탈과 분단에 가위눌린 근현대사, 천지창조급으로 채색된 고대사 사이에서 고려사는 어디에 있는가. 근현대사는 상식으로 정상을 되살리느라 바쁘고, 고대사는 학술이 아닌 유사역사까지 상대하느라 번잡한 가운데 고려사는 관심 부족은 아닌지.

윤태옥 중국 여행객
중국에 머물거나 여행한 지 13년째다. 그동안 일년의 반은 중국 어딘가를 여행했다. 한국과 중국의 문화적 ‘경계를 걷는 삶’을 이어오고 있다. 엠넷 편성국장, 크림엔터테인먼트 사업총괄 등을 지냈다. 『중국 민가기행』 『중국식객』 『길 위에서 읽는 중국현대사 대장정』 『중국에서 만나는 한국독립운동사』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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