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cus 인사이드] 김여정 발언에 북한이 숨기고 싶은 약점 드러나

중앙일보

입력 2020.06.04 15:36

북한 군인과 주민이 김일성·김정일 동상에 헌화 및 참배하는 모습 [노동신문 홈페이지 캡처]

북한 군인과 주민이 김일성·김정일 동상에 헌화 및 참배하는 모습 [노동신문 홈페이지 캡처]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이 담화를 발표했다. 지난달 31일 한 탈북민 단체가 경기도 김포에서 대북전단 50만장을 날려 보낸 데 대한 답이다. 대북전단에는 ‘새 전략 핵무기로 충격적 행동하겠다는 위선자 김정은’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고, 대북전단을 실은 대형풍선에는 소책자 50권, 1달러 지폐 2천장, 메모리 카드 1000개가 실려 있었다.

김여정, 대북전단지 비난
군사합의 파기 거론 압박
북한 초조함에 약점 노출

'울고 싶은데 뺨 때려준 격'인지 몰라도 김여정 제1부부장은 우리 정부 당국과 탈북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거칠게 쏟아냈다. 북한은 지난해 하노이 노딜에 이어 올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대북제재 해제와 경제 개발은커녕 국제 주요 신용평가사들이 2020년 경제성장률을 –6%로 전망하는 등 최악의 상황을 맞고 있다. 울고 싶던 차에 내부결속을 다지고 남 탓을 하기 좋은 호재를 만난 것이다.

담화에서 김 제1부부장은 탈북민을 ‘바보’‘똥개’로 비난하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 정부에 대해서도 “이대로 그냥 간다면 그 대가를 남측(남조선당국)이 혹독하게 치르는 수밖에 없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지난 3월 청와대를 ‘겁먹은 개’로 비유했던 담화에서처럼 특유의 비난과 조롱을 뒤섞어 놓았다. 하지만 그 비난과 조롱 사이에 북한의 초조함과 급소가 고스란히 노출됐고, 상대방인 우리 남한 사회에 대해 몰이해가 드러나 북한 최고지도부의 앞날이 걱정될 뿐이다.

지난 2016년 4월 경기도 파주시 접경지역에서 자유북한운동연합 등 탈북자 단체들이 대북 전단을 날리는 모습. [연합뉴스]

지난 2016년 4월 경기도 파주시 접경지역에서 자유북한운동연합 등 탈북자 단체들이 대북 전단을 날리는 모습. [연합뉴스]

첫째, ‘최고존엄’과 ‘핵문제’는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급소 중의 급소임을 다시 한번 고백했다. “(탈북민들이) 함부로 우리의 최고존엄까지 건드리며 《핵문제》를 걸고 무엄하게 놀아댄 것이다”며 김정은 일인 독재와 핵 개발을 신성불가침의 영역처럼 표현했다. 북한을 발끈하게 하려면 이 문제를 자극하면 된다는 걸 전 세계에 다시 한번 확인해줬을 뿐만 아니라 국제사회가 북한의 비핵화 의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가뜩이나 난항인 비핵화 협상에 먹구름 한 점을 스스로 더한 격이다.

또한 이번 전단살포의 파급력을 스스로 인정한 듯이 북한 주민이 다 보는 대내 관영 매체인 노동신문에 서둘러 담화를 발표했다. 탈북민과 한국 정부를 비난하는 담화라면 대외매체에 발표해도 되는데, 일반 북한 주민이 다 보는 대내 매체를 택한 것이다. 북한 주민의 여론을 시급히 단속하고 탈북민과 한국 정부 비난을 통해 결속을 도모해야 할 긴급한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대북전단살포를 북한이 정말 뼈아프고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북한의 급소가 다시 한번 확인된 셈이다.

둘째, 이번 담화에서 우리 한국 사회 작동원리에 대한 몰이해가 여실히 드러났다. “(민간단체 대북전단살포가) 《개인의 자유》요, 《표현의 자유》요 하는 미명하에 방치된다면 남측(남조선당국)은 머지않아 최악의 국면까지 내다보아야 할 것”이라며, “군사분계선일대에서 삐라살포를 비롯한 모든 적대행위를 금지하기로 한 판문점선언과 군사합의서의 조항을 결코 모른다 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비난했다.

지난 2018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판문점 선언' 서명식에서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의 도움을 받아 선언문에 서명을 하고 있다. [뉴스1]

지난 2018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판문점 선언' 서명식에서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의 도움을 받아 선언문에 서명을 하고 있다. [뉴스1]

당과 인민, 국가를 하나로 생각하는 전체주의 사회 북한에서는 한국에서 올라오는 대북전단지가 모두 적대행위이고 군사합의 위반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이건 명백히 한국 내 민간단체의 행위일 뿐이다. 우리 군 당국이 군사지역에서 대북전단지를 날리도록 도운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대북전단지의 발송 주체가 우리 군도 아니기에 군사합의 위반 운운은 어불성설이다.

또 “(대북전단살포를 금지할) 법이라도 만들고 애초부터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지지 못하게 잡도리를 단단히 해야 할 것”이라고 했는데, 국회에 입법권이 있는 우리나라에서 아무리 힘 있는 정부라 하더라도 공공의 안녕과 질서유지에 반하지 않는 한 법으로 민간단체의 특정행위를 강제할 수는 없다. 대북전단살포는 지금의 야당이 과거 여당이던 2008년, 2014년에는 당시 당대표들이 연이어 나서 자제를 촉구하던 일이기도 하다.

한국사회의 여론은 늘 진화하고 변한다. 오히려 북한이 특정 단체를 지목하며 우리 내부사정에 과도하게 개입하려 한다면 우리 사회 안에서의 대북여론만 나빠질 뿐이다.

우리는 수백 명이 넘는 북한학 연구자와 전문가들이 있고, 갑론을박 속에서도 북한을 연구하고 이해하면서 분단을 극복하고 평화로운 통일을 이루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하지만 북한은 우리에 대한 몰이해와 전략적 사고의 부재로 인해 갈 길을 잃어가고 있는 것 같다. 상대에 대한 이해가 없으니 대화의 문을 열어두고 있는 우리 정부에 대해서도 연일 압박만 가하고 엇박자만 나고 있다.

북한에도 만약 ‘남조선학’이 있고 세계질서와 남북관계의 접합점 위에서 민족의 미래와 역사를 고민하는 열린 자세가 있었다면, 혹은 자기 목숨을 내놓고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굵직한 전략가와 참모들이 있었다면 이번과 같은 담화까지 등장했을까. 답답한 심정에 답 없는 우문(愚問)을 던져본다.

정대진 아주대 통일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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