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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씨처럼 조붓하고 버선처럼 맵시 있게 ‘육지 속 섬’을 잇다

중앙일보

입력

우리말 찾기 여행① 외씨버선길

중앙일보가 국어문화원연합회와 함께 ‘우리말 찾기 여행’ 연재를 시작합니다. 우리말 찾기 여행은 여행지에서 예쁜 우리말을 발굴해 알리고 잘못 쓰이는 표현을 바로잡는 기획입니다. 독자 참여 홈페이지(purekorean.joins.com)도 열었습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 바랍니다.

외씨버선길은 조지훈의 시 '승무'의 한 구절에서 이름을 따왔다. 손민호 기자

외씨버선길은 조지훈의 시 '승무'의 한 구절에서 이름을 따왔다. 손민호 기자

‘외씨버선길’이라는 이름의 트레일(걷기여행길)이 있다. 600개나 된다는 국내 트레일 가운데 아마도 가장 이름이 예쁜 길일 터이다. 길도, 길을 에운 풍경도 이름처럼 곱다. 이름에 밴 사연은 차라리 곡진하다.

내륙 오지를 헤집다

외씨버선길은 2013년 완성됐다. 모두 15개 코스로 전체 길이는 240㎞에 이른다. 경북 청송에서 시작해 영양과 봉화를 거쳐 강원도 영월에서 끝난다. 이른바 ‘육지 속의 섬’이라 불리는 경상북도와 강원도의 내륙 오지 4개 지역을 연결한다. 외씨버선길은 우리 땅의 가장 깊숙하고 내밀한 구석을 비집고 들어선 트레일이다.

외씨버선길은 경상북도와 강원도 내륙산간지역을 헤집는다. 우리 땅의 가장 내밀한 구석을 다닌다.[중앙포토]

외씨버선길은 경상북도와 강원도 내륙산간지역을 헤집는다. 우리 땅의 가장 내밀한 구석을 다닌다.[중앙포토]

하여 외씨버선길이 빚어내는 풍광은 국내 트레일 중에서 손에 뽑을 정도로 압도적이다. 기암괴석 즐비한 주왕산 국립공원을 오르내리고, 쉼 없이 휘어지는 낙동강 상류 물길을 거슬러 오르며, 금강소나무 울창한 숲길을 지난다.

청송 송소고택[중앙포토]

청송 송소고택[중앙포토]

봉화의 금강소나무 숲[중앙포토]

봉화의 금강소나무 숲[중앙포토]

두메산골을 이은 길이라지만, 사람의 향기 또한 은은하다. 외씨버선길은 김주영 대하소설 『객주』를 낳은 진보장터(청송)를 지나고, 김삿갓으로 더 알려진 방랑시인 김병연의 생가(영월)를 들른다. 두들마을(영양)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음식 책인 『음식디미방』의 고장이며, ‘아흔아홉 칸’ 송소고택(청송)은 전국 고택 체험의 모범이고, 대장정을 마무리하는 관풍헌(영월)은 단종 애사(哀史)가 서린 공간이다. 청송과 영양이 ‘청양고추’의 원조라는 사실은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다. 질 좋은 금강소나무를 일컫는 ‘춘양목’도 봉화의 지명에서 비롯됐으며, 간이역 매니어가 성지로 받드는 분천역(봉화)도 길 위에 있다.

영양 대티골 입구. 외씨버선길 7코스 '치유의 길'이 지난다. 손민호 기자

영양 대티골 입구. 외씨버선길 7코스 '치유의 길'이 지난다. 손민호 기자

외씨버선길 7코스의 대티골(영양) 숲길은 옛 31번 국도다. 일제가 도로를 내고 ‘지무시 트럭’으로 금강소나무를 실어 날랐다. 그래, 길이 깊으면 길에 밴 이야기도 깊은 법이다.

나빌레라

외씨버선길 표식. 버선코 모양이 이정표 역할을 한다. 손민호 기자

외씨버선길 표식. 버선코 모양이 이정표 역할을 한다. 손민호 기자

외씨버선길은 여러모로 유별난 트레일이다. 외씨버선길은 여느 트레일과 달리 2개 광역단체와 4개 기초단체를 아우른다. 부산에서 강원도 고성까지 동해안을 잇는 해파랑길은 바다라는 공통점이라도 있는데, 외씨버선길은 딱히 연관이 없어 보이는 내륙 산간지역을 연결한다. 공통점이라면 반딧불이가 다른 지역보다 흔하다 정도일 테다.

BY2C. 맨 처음 외씨버선길을 조성할 때 프로젝트 이름이다. B는 봉화, Y2는 영양과 영월, C는 청송의 영어 첫음절이다. 어쩌면 이 BY2C가 길 이름으로 굳을 뻔했다.

외씨버선길 전체 지도. 원래 방향에서 오른쪽으로 눕혔더니 조붓한 버선 모양이 됐다. [그래픽 경북북부연구원]

외씨버선길 전체 지도. 원래 방향에서 오른쪽으로 눕혔더니 조붓한 버선 모양이 됐다. [그래픽 경북북부연구원]

외씨버선길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나왔을까. 지도를 봐야 한다. 전체 코스가 그려진 지도를, 그것도 오른쪽으로 눕혀서 봐야 한다. 길이 시작하는 청송 쪽이 버선코처럼 뾰족하고 영월까지 이어진 길이 볼이 조붓한 버선 같다.

외씨버선길이 지나는 영양의 주실마을이 청록파 시인 조지훈(1920∼68)의 고향이다. 지훈이 1939년 11월 ‘문장’에 발표한 ‘승무’에 다음의 구절이 있다. 교과서에 나오는 작품이니 익숙하실 게다.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외씨’는 ‘오이씨’의 준말이고 ‘보선’은 ‘버선’의 경북 방언이다. 오이씨처럼 갸름하고 맵시가 있는 버선이란 뜻이다. 지도를 보고 버선을 연상한 상상력이 놀랍고, 시에서 길 이름을 받은 감수성이 부럽다. 길도 이름처럼 맵시가 있다.

외씨버선길 손수건. 조지훈의 '승무'를 적었다. [사진 경북북부연구원]

외씨버선길 손수건. 조지훈의 '승무'를 적었다. [사진 경북북부연구원]

여행정보=외씨버선길(beosun.com)은 경북북부연구원이 조성했고 운영한다. 길이 지나는 4개 고장이 예산을 지원하고, 고장마다 ‘객주’라 불리는 안내센터를 두고 있다. 1년에 30만 명 정도가 외씨버선길을 걷는다.
  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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