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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동호의 세계 경제 전망

‘반도체 아마겟돈’에서 한국이 생존할 길은 초격차 기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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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김동호 기자 중앙일보

예고된 미·중 경제전쟁 2라운드 

그라픽=최종윤

그라픽=최종윤

“냉전이 끝났을 때 20년 후 이런 신세계가 생길 것이라고 누가 예측할 수 있었을까. 천안문 사건 당시 중국이 이렇게 엄청나게 승천하는 용이 될 것이라 상상한 사람이 과연 있었을까. 걸프전쟁 당시 미국이 이렇게 국력을 낭비할 줄 누가 알았을까.” 일본 아사히신문의 후나바시 요이치 전 주필이 ‘세계를 움직이는 11인의 대예측’이라면서 써냈던 『축의 이동』(2010년) 서문에 나오는 구절이다.

미국, 기술우위 지키려 중국 견제 #반도체·원전서 미·중 대립 격화 #미들파워 굳히는 기회로 활용하고 #‘첨단산업의 대한민국’ 도약 기회

지금 세계는 10년 전 예고된 대로 가고 있다. 무역전쟁에 이어 대결별(Great Decoupling)을 향해 치닫는 미·중 경제전쟁 2라운드는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코로나 사태는 더 빠른 속도로 세계의 축이 이동하는 계기가 됐을 뿐이다. 뉴욕타임스(NYT)는 “미·중 양국이 신냉전으로 향하고 있다”면서 무역·기술·외교에 걸쳐 전면전이 시작됐다고 했다. 미국의 공세는 ▶중국의 반도체 기술 확보 차단 ▶미국의 원자력 기술 부흥 ▶동맹국과 중국의 교류 차단으로 집중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14일 “중국과 모든 관계를 끊을 수도 있다”며 포문을 열었다. 그러면서 “코로나19가 실험실에서 나왔든 박쥐에서 나왔든 중국이 막았어야 했다”고 공세를 퍼부었다.

미국 전체가 미니애폴리스 흑인 사망 사태로 혼돈을 겪고 있지만, 적어도 중국에 관해서는 국론이 똘똘 뭉쳐 있는 양상이다. 중국에 대한 비호감이 66%(퓨리서치센터)로 치솟고, 중국 봉쇄 법안이 꼬리를 물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측근인 공화당 린지 그레이엄 상원의원은 ‘코로나19 책임법’을 발의했고, 트럼프의 앙숙이었던 공화당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은 희토류의 중국 의존 종식 법안을 발의했다. 미국은 또 자국 최대 펀드인 연방 공무원연금의 중국 주식투자를 금지하는 등 중국 기업의 돈줄 차단에도 나섰다. 중국·러시아가 치고 나가는 원자력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원자력 전략 보고서’도 발표하면서 올해 차세대 원자로 개발 사업에 2억3000만 달러를 투입하기로 했다.

루비콘강 건너는 중

미국은 동맹국 결속을 강화하고 있다. 당장 한국 등 주로 자유 시장경제 진영의 국가들에 ‘경제 번영 네트워크(EPN)’ 참여를 제안했다. 주요 제품 공급망의 중국 의존도를 줄이고,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육해상 실크로드) 전략에 대응해 미국 중심의 경제연합체를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호주·일본·뉴질랜드·한국 외에 인도·베트남에도 참여의 손길을 내밀고 있다. 트럼프는 또 선진 7개국(G7) 회의에 한국·러시아·인도·호주를 초청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한국에는 ‘미들 파워’로 자리를 굳힐 좋은 기회다.

미국·중국 국력 비교

미국·중국 국력 비교

동맹의 윤곽도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일본이 가장 먼저 미국 편에 설 것을 분명히 했다. 영국은 화웨이의 5세대(5G) 통신장비를 사용하지 않기로 했고, 호주는 중국에 대한 수출의존도가 34%에 달하지만 코로나19의 중국 책임론을 주장하고 있다. 나아가 영국·호주·캐나다는 중국의 홍콩보안법 제정을 비난하는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미·중 관계가 루비콘강을 건너고 있는 양상이다.

결국 지난 1월 체결된 미·중 간 1단계 무역협정은 사실상 휴짓조각이 될 위기에 직면했다. 당시 중국은 2년에 걸쳐 최소 2000억 달러어치의 미국 상품을 구매하고, 미국은 중국에 단계적으로 관세 폐지를 약속했다.

이로써 지금 막이 오른 경제전쟁 2라운드의 핵심은 반도체 패권이다. 미 상무부는 화웨이가 미국의 기술을 사용한 반도체를 쓰는 것을 막는 내용의 수출 규정 개정에 나섰다. 미국에서 생산된 반도체 수출에서 그치지 않고, 9월부터 미국의 기술을 활용하는 해외 기업도 화웨이에 반도체를 공급하려면 미국의 허가를 받도록 했다.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인 대만 TSMC의 첨단 공장을 애리조나에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부 장관은 “중국이 최첨단 기술을 지배하고 중요 산업을 장악하려 하는 중대한 시점에 이뤄졌다”고 말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기술 패권을 둘러싼 미국의 중국 견제가 강화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미국은 아예 반도체 자급 체제 구축에 나설 조짐을 보인다. 월스트리트저널은 “트럼프 대통령은 반도체 핵심 기술의 아시아 의존을 걱정하고 있다”며 “TSMC 공장의 애리조나 유치는 미국 내 반도체 자급 체계를 확보하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렇게 되면 텍사스 오스틴에 있는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공장도 첨단 반도체를 생산하는 논의가 시작될 가능성이 있다”고 폭스비즈니스가 전망했다.

최대 격전지는 반도체

미국은 반도체를 패권전쟁의 핵심 요소로 보고 있다. 로봇과 인공지능(AI)을 앞세운 첨단 전력의 관건이 결국 고성능 반도체라서다. 미 국방부도 미국의 디지털 산업이 중국·한국·대만의 아시아 3각 축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을 우려해왔다. NYT는 “미 국방부가 지난해부터 ‘미국이 군사적 우위를 유지하려면 반도체 자급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해왔다”면서 그동안 퀄컴·인텔 등 미 반도체 회사들과의 접촉을 늘리며 대책을 촉구해왔다고 보도했다. 미국은 D램 업체 마이크론과 낸드플래시 업체 웨스턴디지털이 모두 글로벌 3위를 차지하고 있어 메모리 반도체의 기본 역량을 갖고 있다.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점유율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점유율

중국은 반도체 굴기에 사활을 걸고 있다. 신중국 건국 100년(2049년)까지 군사력에서도 미국을 능가한다는 중국몽(中國夢) 달성의 관건이 반도체 기술이다. 이를 위해 중국 정부는 2025년까지 170조원을 투자해 반도체 자급률을 70%로 끌어올리는 ‘반도체 굴기’ 계획을 밀어붙이고 있다. 중국은 여기에 3조원의 국영펀드를 추가로 쏟아붓는다. 중국은 화웨이가 5G 통신장비를 휩쓸면서 기술 굴기의 마지막 관문으로 반도체만 남겨두고 있었다. 중국 최대 파운드리 업체인 SMIC는 화웨이의 스마트폰용 반도체 칩 ‘기린 710A’ 양산에 들어갔다. 이 칩은 화웨이의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업체) 자회사인 하이실리콘에서 설계했다. 중국 기업이 100% 지식재산권을 가진 첫 반도체다.

중국은 지난 28일 폐막한 올해 전국인민대표회의에서도 산업구조 고도화의 결의를 다졌다. 최소 1000조원의 돈 폭탄을 터뜨려 반도체 기술 굴기를 완성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미국을 넘어서겠다는 의지는 3년 전 인민해방군 건군 90주년 행사에서 시진핑 주석의 연설 그대로다. “인민해방군이 미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에 항거하는 정의로운 항미원조(抗美援朝, 한국전쟁을 의미) 전쟁에서 승리해 국위를 떨쳤다.”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은 그야말로 고래 싸움에 낀 처지다. 미·중의 ‘반도체 아마겟돈(최후의 전쟁)’에서 우리가 믿을 건 초격차 기술밖에 없다. 그래야 어느 쪽에도 휘둘리지 않고 중심을 잡을 수 있다.

한국·일본·대만 반도체산업도 요동친다

미·중 반도체 분쟁이 격화하면서 한국·대만·일본 반도체 업체도 요동치고 있다. 한국에서도 비상이 걸렸다. 지난해 4월 문재인 대통령은 삼성전자의 화성공장에서 열린 ‘반도체 비전 선포식’에 참석해 “메모리반도체 분야에서는 세계 1위를 유지하는 한편, 2030년까지 시스템반도체 파운드리 분야 세계 1위, 팹리스 분야 시장점유율 10%를 달성해 종합반도체 강국으로 도약하자”고 말했다. 더불어민주당이 반도체산업육성특별대책위원회까지 만들어 반도체 산업의 초격차 유지를 지원하기로 한 것도 고무적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반도체는 한국 전체 수출 비중의 20%를 차지한다. 다행히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당분간은 초격차 유지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SK하이닉스의 새로운 공장을 수도권인 용인에 건설하도록 허용한 것부터 고무적이다. SK하이닉스는 이로써 이천·청주·용인을 3각 축으로 하는 반도체 클러스터를 확보하면서 100조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비전’의 후속 조치로 19조원을 들여 경기도 평택에 최첨단 극자외선(EUV) 장비를 도입한 파운드리 공장과 낸드플래시 생산라인을 추가로 구축한다.

과거 메모리 반도체 치킨게임에서 한국에 무릎을 꿇었던 일본도 인텔·TSMC의 생산 거점을 유치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나섰다. 대만은 미국과의 관계 강화에 따라서는 화웨이와의 거래를 완전히 단절하는 선택을 할 가능성도 있을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미국은 대만에 세계보건기구(WTO) 옵저버(참관국 자격) 지위 부여를 지원하는 등 충분한 반대급부를 제공하겠다는 방침이다.

김동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