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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국가연구개발혁신법 제정, 이제 혁신을 혁신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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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염한웅 포스텍 물리학과 교수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부의장

염한웅 포스텍 물리학과 교수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부의장

대한민국 과학기술 육성의 시작을 과학기술처 설립(1967년) 시점으로 본다면 벌써 반세기 전의 일이다. 그런데 국가 과학기술정책의 방향과 원칙을 정한 과학기술기본법은 훨씬 뒤인 2001년에서야 제정됐다. 국가 주도의 초고속 산업화 시대에 법보다 행동이 앞섰으리라.

국가 R&D 관료주의 비효율 커져 #혁신 장려하고 규제는 혁파해야

과학기술기본법 제정 이후 4조원에서 시작한 정부 연구개발(R&D) 예산은 매년 두 자릿수로 증가했고 올해 24조원으로 늘었다. 이를 보면 기본법이 국내 과학기술 도약의 시작을 알린 것만은 분명하다. 이 과정에서 국가 주도의 R&D 사업들은 반도체·통신·조선·화학 등 주력 산업과 원자력 및 국방 영역에서 국가 경제 성장에 큰 역할을 했다. 기초연구를 비롯한 과학기술 저변도 넓어졌다.

다만 급격한 성장은 큰 그림자도 드리웠다. 추격형 산업과 R&D의 한계가 점점 명확해졌다. 민간 R&D 역량이 압도적으로 성장해 국가 R&D의 역할이 불분명해졌다. 거대한 국가 R&D 예산을 20개 부처가 나눠 수행하면서 부처 간 칸막이와 관료주의가 횡행하고, 보여주기식 성과 위주 사업들이 양산돼 국가 R&D의 비효율이 점차 커졌다.

도중에 참여정부가 과학기술혁신본부를 설치하는 등 과학기술 행정 체계에 일대 정비가 있었다. 그 일환으로 부처별로 제각각 만들어지고 있었던 R&D 법령 체계를 통합 정비하고자 노력했으나 결실을 보지 못했다. 그 결과 하나의 정부 안에 300여개의 관리 규정과 60여개의 연구지원 시스템이 난립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추격형 경제에서 혁신경제로 가야 하고 이를 위해 국가가 결정적인 역할을 해야만 하는 시기에, 혁신 동력의 한 축인 국가 과학기술 R&D 시스템이 효율적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이번 정부 출범과 함께 이와 같은 비효율을 제거하기 위한 틀을 만들려는 고민이 있었다. 그 고민이 ‘국가연구개발혁신법’으로 국회에 제출됐으나 2년가량 긴 시간을 기다리다 20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에서 가까스로 통과됐다.

새 법은  R&D 추진 체제를 혁신하고 자율적이고 책임 있는 연구 환경을 조성함으로써 국가 혁신 역량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해 R&D 혁신을 위한 제반 환경과 지원 체계를 명문화했다. 각 부처가 R&D 예산만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R&D 통합정보시스템을 운영한다.

정부와 연구 현장의 가교 역할을 하는 연구관리 전문기관의 역량을 점검하도록 규정했다. 대학 등 R&D 기관은 연구자의 연구지원을 전담하는 인력과 조직을 갖추도록 규정했다. 연구의 책임은 연구자가 지고, 행정의 책임은 연구기관이 맡는다는 원칙을 분명히 했다. 누구든지 제도 개선을 제안할 수 있도록 관련 절차를 규정했다.

물론 법이 혁신을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다만 혁신을 막는 틀을 혁파하고 혁신을 촉진하는 틀을 세울 수 있다. 각 R&D 담당 부처에서는 입법 취지에 맞게 후속 조치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기획재정부 관료에게 혁신성장이 뭐냐고 물으면 이런저런 새로운 산업 분야와 기술들을 집중투자해 육성하는 것이라고 답한다. 혁신 경제의 패러다임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유망산업과 기술에 대한 투자는 혁신정책이 아니고 산업정책일 뿐이다.

혁신정책이란 혁신을 만들어내는 과학기술과 혁신 인재들에 투자하는 것이다. 혁신을 장려하고 보호하는 제도를 만들고 혁신을 가로막는 규제를 혁파하는 것이 기본이다. 이를 통해 지금 유망하다고 알고 있는 산업과 기술의 다음에 올 것들, 우리가 모르는 새로운 기술과 산업을 만들어내는 밭을 일구는 것이다. 국가연구개발혁신법이 혁신의 밭을 깊게 일구는 튼실한 쟁기가 되길 간절히 바란다. 국가 경제의 미래가 과학기술 혁신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염한웅 포스텍 물리학과 교수·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부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