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도로 다이어트'아시나요…길 바꾼 광운대 학생들의 아이디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폭이 1m에 불과한 서울 노원구 광운로1길을 '도로 다이어트'를 통해 차도는 줄이고 보행로는 넓히자는 학생들의 아이디어가 현실이 될 예정이다. 아이디어를 낸 광운대 경영대 학생회 학생들과 정석재 경영학과 교수(왼쪽),조선영(가운데) 광운대 이사장, 이종현 전 경영대 학생회장과 학생들이 지난 1일 통행로를 살펴보고 있다. 최정동 기자

폭이 1m에 불과한 서울 노원구 광운로1길을 '도로 다이어트'를 통해 차도는 줄이고 보행로는 넓히자는 학생들의 아이디어가 현실이 될 예정이다. 아이디어를 낸 광운대 경영대 학생회 학생들과 정석재 경영학과 교수(왼쪽),조선영(가운데) 광운대 이사장, 이종현 전 경영대 학생회장과 학생들이 지난 1일 통행로를 살펴보고 있다. 최정동 기자

비만 왔다하면 사람들의 우산이 맞물려 아수라장이됐다. 길이 317m, 폭은 1m인 외길에선 아슬아슬한 풍경이 연신 벌어졌다. 서울 노원구 광운로1길 이야기다.

인근 고교 운동장을 길처럼 이용하던 대학생들 #학생회 2년 프로젝트 제안에 노원구 23억원 투자 #317m에 이르는 도로 변신 예정

어른 두명이 겨우 나란히 지나갈 수 있는 이 길이 올해 달라진다. 광운대 학생 6명이 제안한 '도로 다이어트' 아이디어를 도로를 관리하는 노원구가 받아들이면서다. 2년에 걸친 집요한 작업 끝에 대학생들이 거머쥔 성과는 컸다. 노원구는 23억원을 들여 도로를 줄이고, 대신 통행로 폭을 최대 2m로 넓히는 공사를 올해 시작하기로 했다.

1일 오후 2시 광운로1길을 바꾼 학생들을 만났다. 광운대는 2009년 경영학부 건물 누리관을 본교 캠퍼스와 도보로 12~15분 남짓 떨어진 주택가 인근에 세웠다. 경영학부 학생 800여 명과 이곳에서 학부 수업을 들으려는 대학생들은 광운로 1길 대신 약 5분 남짓한 시간을 아낄 수 있는 '지름길'을 이용했다.

문제는 이 지름길이 누리관 바로 옆에 있는 광운전자공업고등학교 운동장이었다는 점이었다. 학생들이 운동장을 가로질러 다니니 체육 수업은 원활하지 못했다. 주민들도 운동장을 길처럼 이용하고, 배달 오토바이마저 마구 다니는 상황이 되자 고등학교 측은 2017년 운동장을 폐쇄했다. 학생들의 학습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지름길이 막히자 이번엔 대학생들이 괴로운 상황을 맞게 됐다. 통학로 폭은 불과 1m였다. 성인 두 명이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고, 바로 옆은 버스와 차들이 수없이 오가는 차도였다. 수업 간 쉬는 시간은 15분. 하지만 본관이 있는 곳에서 경영학부 건물까지 이 시간 안에 도착하기엔 빠듯했다. 잰걸음으로 걸어야 겨우 시간에 맞출 수 있는 정도였다. 학교 게시판엔 '통학로가 비좁다'는 민원 글이 빗발쳤다.

"왜 형, 누나를 위해 동생들이 고생해야 해요?"

경영대 학생회가 나섰다. 당시 이종현(23) 경영대 학생회장은 '운동장 재개방'을 요청하기로 했다. 도로의 폭을 쟀고, 누리관에서 본관까지의 거리와 걸리는 평균 이동시간 등을 측정했다. 2017년 12월엔 운동장 재개방을 위해 고교 학생회와 자리도 마련했다. 하지만 일은 원하는 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형, 누나들의 통학 거리를 위해 왜 동생들이 고생해야 하냐"는 이야기가 나왔다. '동생'들의 학습권 이야기에 학생회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물꼬는 다른 곳에서 트였다. 조선영 광운학원 이사장은 학생회에 "전문가 자문단을 지원해줄 테니 프로젝트로 길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학생회가 들고 온 200여명의 설문조사 결과와 현장 실측 자료 등 백과사전 두께의 자료를 본 조선영 광운대 이사장은 "학생회가 가져온 엄청난 분량의 조사자료를 보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학생회 회장인 이씨는 고민 끝에 운동장 개방이 아닌 '다른 방법'을 찾는 프로젝트에 도전하기로 했다. '어벤저스팀'도 꾸렸다. 경영대 학생회 부회장인 유지나(22)씨와 4학년생 허재원(23)씨, 22살 동갑내기 3학년생 최원준·이석희·박채선 씨가 뛰어들었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일인 데다 취업준비, 입대까지 뒤로 미뤄야 했지만, 학생회는 통학로를 포기할 순 없었다. 비슷한 사례를 찾고 주민들도 수긍할 제안서를 만드는 데 꼬박 2년 남짓한 시간을 매달렸다. 정석재 경영학과 교수가 조언을 해주면서 제안서는 조금씩 구체화했다.

왼쪽부터 조선영 광운학원 이사장, 정석재 광운대 경영학과 교수, 이종현 경영대 학생회장과 경영학부 허재원,박채선, 유지나 학생이 지난 1일 도로다이어트로 넓어질 광운로1길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노원구는 학생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23억원을 투자해 전신주 등을 없애고 통학로 개선에 나설 예정이다. 최정동 기자

왼쪽부터 조선영 광운학원 이사장, 정석재 광운대 경영학과 교수, 이종현 경영대 학생회장과 경영학부 허재원,박채선, 유지나 학생이 지난 1일 도로다이어트로 넓어질 광운로1길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노원구는 학생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23억원을 투자해 전신주 등을 없애고 통학로 개선에 나설 예정이다. 최정동 기자

23억원 끌어낸 대학생들 

학생들은 노원구에 광운로1길을 '다이어트' 하자고 제안했다. 폭이 1m에 불과한 보도를 1.5~2m로 늘리는 대신 왕복 2차선 도로 폭을 6m로 줄이고, 시각장애인도 안전하게 다닐 수 있도록 점자블록을 세우자는 것이었다. 대신 줄어든 차도는 60km 미만으로 속도를 줄이도록 조정하자고 했다. 8개나 있는 전신주와 4개의 통신주, 각종 전선은 땅속으로 묻고. 가로등 하나 없는 주택가 골목길엔 태양광 가로등을 설치하자는 내용도 담았다. 뿐만이 아니었다. '동생'들이 다니는 고등학교 앞길도 챙겼다. 아예 보행로가 없으니 미끄럼방지 포장재로 만든 보행자 우선도로 만들어달라고 했다. 조 이사장은 "구청에서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라 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고 했다.

노원구는 광운대 경영대 학생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도로를 줄이고 보행자를 위한 길을 넓히는 공사에 들어갈 예정이다. 노원구가 마련한 광운로1길 조감도 [사진 노원구]

노원구는 광운대 경영대 학생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도로를 줄이고 보행자를 위한 길을 넓히는 공사에 들어갈 예정이다. 노원구가 마련한 광운로1길 조감도 [사진 노원구]

학생회는 지난해 주민과 인근 학교 학생회 등을 초청해 공청회도 열었다. 이웃들의 '동의 없이' 길을 바꾸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에서였다. 제안서를 받은 노원구는 지난 4월 23억원을 들여 이 길을 바꾸기로 결정했다. 노원구 관계자는 "광운로1길에 대해 주민의 민원이 누적되다보니 구청에서도 도로 개선사업을 2018년부터 계획하고 있었다"며 "지난해 9월 학생들로부터 건의가 들어와 맞아떨어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학생들은 환호했다. 이종현 씨는 "오랜 시간을 준비하는데 쏟다 보니 안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길이 바뀌게 된다니 뿌듯하다"고 말했다. 학생들과 함께 한 정석재 교수는 "처음에 학생들이 얼마나 준비할 수 있겠나 싶었지만, 취업 준비나 입대까지 미뤄가며 두꺼운 제안서를 완성했고, 바라던 대로 길을 바꿀 수 있게 돼 학생들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오승록 노원구청장은 "차도를 줄이고 보도를 넓혀 주민들이 편안하고 안전한 통행로가 되도록 보행거리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김현예 기자 hykim@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