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더오래] '느단'이 푸를 낳고 '푸'가 버를 낳고…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김성우의 그럴 法한 이야기(12)

가정법원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탤런트 신구의 “4주 후에 뵙겠습니다”로 인기를 끈 TV 프로그램 ‘사랑과 전쟁’이나 최근 불륜을 소재로 화제가 된 ‘부부의 세계’와 같은 드라마일 것이다. 가정법원은 이혼하는 곳이 맞지만, 이혼만 하는 곳은 아니다. 반면에 이혼은 가정법원에서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서울가정법원의 관할은 서울시 전역이지만, 협의이혼이나 가족관계등록(옛 ‘호적’)은 각자의 주소지에 따라 서울 동남북서부 지방법원에서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건 수 또는 판사와 직원의 업무량을 바탕으로 계량해 보면, 이혼은 가정법원이 하는 일 중 3분의 1 정도라고 보면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가정법원에서는 이혼, 위자료, 재산분할과 같은 가사사건만을 처리할 것 같지만, 의외로 넓게 보면 형사사건에 해당하는 소년보호사건, 아동보호사건, 가정보호사건, 성(性)보호사건도 처리한다. 그 밖에도 상속사건(상속재산분할, 상속포기, 상속한정승인, 유언검인), 입양사건, 성년후견사건, 실종선고사건, 성(姓)·본(本) 창설·변경사건, 부양료사건, 면접교섭사건, 양육비사건, 친권자·양육자 지정·변경사건, 부재자재산관리사건, 가족관계등록비송사건 등 개인과 가족을 둘러싼 셀 수 없이 많은 법률관계가 가정법원에서 다루어지고 정리되고 있다.

요즈음 가정법원은 ‘후견적, 복지적 기능’이라는 말이 화두이다. 듣기에도 생소한 이 말은, 법원이 전통적으로 해오던 사법 기능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청구(민사사건에서는 원고, 형사사건에서는 검사가 한다)에 대하여 사실관계를 확정하고 거기에 법률을 적용한 결론을 판결로 답해주는 사법기능이 법원 본연의 역할이다.

그런데 당사자의 잘잘못과 청구의 당부를 가리는 데 치중하는 법원의 전통적인 사법기능만으로는 가족 사이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가정법원에서 다루어지는 사건들은 일반 민사법원이나 형사법원에서 처리되는 사건들과 다른 점이 있기 때문이다.

건강하지 않은 가정은 자녀에게 상처가 되고 이것이 제대로 치유받지 못하면 자녀는 점점 심한 비행에 빠져들어 성인범으로 진행할 가능성이 높으며, 성인범의 증가는 결국 건강한 가정의 감소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사진 Flickr]

건강하지 않은 가정은 자녀에게 상처가 되고 이것이 제대로 치유받지 못하면 자녀는 점점 심한 비행에 빠져들어 성인범으로 진행할 가능성이 높으며, 성인범의 증가는 결국 건강한 가정의 감소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사진 Flickr]

법원에서 다루어지는 수많은 사건들은 그 번호만 보아도 대략 어떤 사건인지 알 수 있는데, 예컨대 ‘2020가합1234 사건’이라고 할 때 ‘가합’은 민사 사건(‘가’)이고 3명의 판사가 재판하는 합의부(‘합’) 사건을 의미한다. 여기서 ‘가합’과 같은 표시를 사건부호라고 하는데, 대체로 사건부호의 모음(母音)은 사건의 종류를, 첫 자음(子音)은 1, 2, 3심을 각각 의미한다. 1심 재판의 민사는 ‘가’, 형사는 ‘고’, 행정은 ‘구’가 되고, 2심은 ‘나’, ‘노’, ‘누’, 3심은 ‘다’, ‘도’, ‘두’와 같이 되는 것이다.

갑자기 사건부호 이야기를 꺼낸 것은, 가정법원 사건들의 사건부호를 성경에 나오는 족보 이야기에 빗대어 만든 웃지 못할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이다. ‘버’가 ‘드단’을 낳고, ‘드단’이 ‘느단’을 낳고, ‘느단’이 ‘푸’를 낳고, ‘푸’가 ‘버’를 낳고….

여기서 ‘버’는 가정폭력을 다루는 가정보호사건, ‘드단’은 이혼과 같은 가사소송사건, ‘느단’은 양육비, 면접교섭 등의 가사비송사건, ‘푸’는 소년보호사건의 사건부호이다.

근래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학교폭력, 청소년 강력범죄, 가정폭력의 근본적인 원인은 가족공동체의 급격한 해체에 있다. 건강하지 않은 가정은 자녀에게 상처가 되고 이것이 제대로 치유받지 못하면 자녀는 점점 심한 비행에 빠져들어 성인범으로 진행할 가능성이 높으며, 성인범의 증가는 결국 건강한 가정의 감소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실제로 가족관계 소송에서 환경과 관계가 개선되지 못하면, 현재의 갈등은 장래의 갈등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흔하다. 가정폭력을 경험한 가정에서 보호소년이 나올 확률이 높고, 후견사건에서 다투던 가족들이 피후견인의 사망과 함께 상속재산분할사건으로 전장(戰場)을 옮기는 등, 가족 사이의 분쟁은 심리적, 정서적 치유나 관계의 근본적인 해결이 없으면 끊임없이 반복되는 특징이 있다는 것이 그 이야기가 품고 있는 뜻이다.

가정법원이 일률적이고 형식적인 판단에 그치지 않고, 개인과 가정에 맞춤형으로 개입함으로써 갈등을 줄이려고 노력하는 것은, 위기에 처한 가정을 치유하고 우리 사회의 건강한 미래를 위한 투자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사진 Pixabay]

가정법원이 일률적이고 형식적인 판단에 그치지 않고, 개인과 가정에 맞춤형으로 개입함으로써 갈등을 줄이려고 노력하는 것은, 위기에 처한 가정을 치유하고 우리 사회의 건강한 미래를 위한 투자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사진 Pixabay]

지금 가정법원에 가면 재판절차 외에 조정, 심리상담, 부모교육, 부부상담, 가사조사, 의무면담, 치유 캠프와 같이 일반 법원이나 예전의 가정법원에서 볼 수 없었던 것들이 부쩍 많아졌다. 취지나 지향점이 바른 것은 틀림이 없지만, 지나치게 비효율적일 뿐 아니라 그 조치의 효용성이 단기간에 가시화되거나 검증된 적이 없다는 비판이 있다. 또한 “저 원수와 단 하루도 더 같은 호적에 있을 수 없다!”면서 어떤 내용이든 신속한 법원의 판단을 바라는 당사자들의 바람도 가볍게만 볼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길게 놓고 보면, 가정법원이 일률적이고 형식적인 판단에 그치지 않고, 개인과 가정에 맞춤형으로 개입함으로써 갈등을 줄이려고 노력하는 것은, 위기에 처한 가정을 치유하고 우리 사회의 건강한 미래를 위한 투자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아무튼 가정법원의 역할은 앞으로 점점 더 커질 것이 틀림없다. 사법적극주의가 바람직한지에 관한 논의는 차치하더라도, 적어도 가족법 영역에서는 법원의 보다 적극적이고 후견적인 역할이 적절하고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뿐만 아니라, 가정법원이 치료사법의 이념을 강조하고 문제해결법원의 역할을 강화하는 것이 세계 각국의 추세이기도 하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서울 외에는 독립된 가정법원이 없었지만, 이제는 부산, 광주, 대전, 대구, 인천, 수원 등 전국 각지에 가정법원이 생겼고 앞으로도 계속 증설될 예정이다.

아무쪼록 가정법원이 숫자와 기능만을 늘리는데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역할과 기능을 감당하기에 충분한 전문성을 갖추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힘들어하는 국민과 함께 아파하고, 상처받은 청소년과 가정들이 치유 받고 회복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항상 고민하길 기대해본다.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 theore_creator@joongang.co.kr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