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숙·KAL기·김재규···권력 쥔 자의 유혹, 과거사 파헤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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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한명숙 전 국무총리가새벽 경기도 의정부시 고산동 의정부교도소에서 만기 출소하는 모습. [중앙포토]

2017년 한명숙 전 국무총리가새벽 경기도 의정부시 고산동 의정부교도소에서 만기 출소하는 모습. [중앙포토]

여권발 과거사 논쟁이 정치권을 달구고 있다. 진상조사 요구는 물론 친일을 둘러싼 역사 논쟁까지 부활하면서 여의도에서는 “국회가 역사 논쟁의 장(場)이 되고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진상규명 요구=“재조사가 필요하다”는 요구가 나오는 과거사는 2건이다. 한명숙 전 총리 불법 정치자금 사건, 대한항공(KAL) 858기 폭파사건 등이다. 한 전 총리는 2015년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대법원에서 징역 2년에 추징금 8억8300만원을 선고받았다. “검찰 수사 과정에서 일어난 ‘모해위증’에 대해서는 별도 조사가 필요하다”(김종민 민주당 의원) “동병상련을 느낀다”(이재명 경기지사) 등의 재심 요구가 나오고 있다.

1987년 KAL 858기 폭파 사건에 대한 재검증 필요성도 제기됐다. 최근 미얀마 인근 안다만해에서 KAL 858기 동체 추정 물체가 발견되면서다. 설훈 민주당 최고위원은 “858기가 맞는지가 확인되면 진상조사를 다시 안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노무현 정부때인 2007년 1기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테러’로 결론이 났음에도 설 의원은 “당시만 하더라도 전두환ㆍ노태우 정권이 갖고 있는 여력이 있던 상태”라고 주장했다.

 2018년 주한미군이 주관하는 백선엽 예비역 대장 생일파티에서 백 장군과 해리 해리스 주한미국대사가 인사를 나누고 있다. [뉴시스]

2018년 주한미군이 주관하는 백선엽 예비역 대장 생일파티에서 백 장군과 해리 해리스 주한미국대사가 인사를 나누고 있다. [뉴시스]

◇친일파 파묘론도=해묵은 역사논쟁에 불이 붙은 건 백선엽 장군 국립현충원 안장 문제다. “친일파 군인의 죄상은 전공(戰功)만으로는 용서받을 수 없다”며 김홍걸 민주당 의원이 논란을 점화시키자 원희룡 제주지사는 “백 장군은 6·25의 이순신”이라며 반박했다.

박삼득 국가보훈처장이 “백 장군은 현행법상 현충원 안장 대상”이라며 진화하고 있지만, 여당에서는 “친일파를 현충원에서 파묘(破墓·무덤을 파냄)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수진 민주당 의원) 등 파묘론까지도 나온다.

지난달 28일에는 민주당 의원 3명(우원식ㆍ설훈ㆍ이학영)이 ‘유신 청산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고 나섰다. 유신헌법을 바탕으로 벌어진 국가폭력의 진상을 규명하도록 하는 내용으로 “유신헌법에 위헌 결정은 내려졌지만, 불법성 검토가 이뤄진 적은 없다. 유신헌법의 불법성이 면밀히 검토돼야 한다”는 취지다.

형제복지원 생존 피해자 최승우씨가 5월 20일 오후 국회 본회의에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일부개정법률안(대안)이 통과된 뒤 미래통합당 김무성 의원에게 큰절하고 있다. [연합뉴스]

형제복지원 생존 피해자 최승우씨가 5월 20일 오후 국회 본회의에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일부개정법률안(대안)이 통과된 뒤 미래통합당 김무성 의원에게 큰절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재규 재심 청구=형제복지원 사건(1975∼1987년) 등도 주목받는 과거사다. 지난달 20일 과거사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면서 이를 조사하기 위한 ‘2기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과거사위)’의 활동이 예고돼 있어서다. 2기 과거사위가 발족하면 일제 강점기 이후부터 권위주의 통치 시기까지 인권침해 사건에 대한 재조사도 이뤄질 전망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법안 통과 이튿날(지난달 21일) 재조사가 필요한 대표적 사건으로 “형제복지원, 선감학원,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등과 관련한 사건”을 꼽았다.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에 대한 40년 만의 재심 청구에도 관심이 쏠린다. 김 전 부장은 1979년 10월 26일 ‘내란 목적’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을 암살한 혐의로 이듬해 사형에 처해졌다. 재심 청구가 받아들여질 경우 ‘박 전 대통령 시해가 내란 목적의 반역이냐,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혁명이냐’는 게 쟁점이 될 가능성이 높다. 여권에서는 이밖에 여수ㆍ순천 사건(1948년), 동학농민운동(1894년) 등에 대한 재조명 목소리도 있다.

역사를 쥔 자가 권력 쥔다…과거사의 정치학

문재인 대통령이 18일 오전 광주광역시 동구 옛 전남도청 앞에서 열린 제40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해 기념사를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이 18일 오전 광주광역시 동구 옛 전남도청 앞에서 열린 제40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해 기념사를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다”
이탈리아 역사학자 베네디토 크로체(1866~1952)의 경구는 “본래 그대로의 사실이란 존재하기 어렵다”는 회의론에서 출발한다. 역사적 기록은 과거 사람들에 의해 남겨졌지만,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노력에 의해 역사적 사실이 새롭게 태어난다는 의미다.

이를 반영하듯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는 여권발 재조사 촉구에 대해 "정파와 진영의 헤게모니 강화와 다음 선거를 위한 정쟁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과거사를 집권 세력의 ‘정치’에 동원하고 있다는 의미다.

실제 과거사 들추기가 집권여당에 유리하게 작동했다는 진단이 적지 않다. 지난 두 차례 선거(6ㆍ13 지방선거, 4ㆍ15 총선)에서 여권 압승의 저변엔 ‘적폐청산’이란 구호와 함께 이명박ㆍ박근혜 정부에 대한 전면 부정이 자리했다는 분석이다.

장기적 관점에서 ‘새로운 역사 쓰기’라는 시각도 있다. 과거사 재조명을 통해 대한민국 건국과 성장 등의 이면을 부각하면서 과거 '빨갱이'로 낙인찍혔던 현 집권 세력의 정통성이 회복될 수 있다는 전략이다. 이종훈 정치평론가는 “단순히 제도권의 주류 교체가 아닌, 역사적 정당성을 획득해야 권력 유지가 공고히 될 수 있다"고 전했다.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앞줄 가운데)가 2015년 국회에서 열린 새정치민주연합 역사교과서 국정화 저지를 위한 시도당 및 지역 위원장 연석회의에서 국정화 중단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중앙포토]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앞줄 가운데)가 2015년 국회에서 열린 새정치민주연합 역사교과서 국정화 저지를 위한 시도당 및 지역 위원장 연석회의에서 국정화 중단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중앙포토]

비슷한 움직임은 보수 정부에서도 있었다. 2015년 박근혜 정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이 대표적이다. “교육 현장에서 진실이나 역사를 왜곡하는 것은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는 박 전 대통령 지시에 따라 집권 새누리당과 정부가 함께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나섰다. “역사 교과서가 친북좌파 성향의 사슬에 묶여있다”(김무성 당시 새누리당 대표)는 선언이 뒤따랐다.

과거사 재조명을 강조하면서 대통령들이 '미래'를 언급하는 것도 공통점이다. “‘올바른’ ‘진정한’ 미래를 위해 역사 재조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명분이 됐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4년 8·15 경축사에서 “우리는 이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아야 한다. 진상이라도 명확히 밝혀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올바른 미래를 창조하기 위해서다”라고 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도 2015년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올바른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긍심과 자부심을 갖고 자라나도록 가르치는 것은 국가와 국민의 미래를 위해서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 과거사법 통과 직후인 지난달 21일 “아픈 역사를 직시할 수 있어야 정의가 바로 서고 진정한 화합과 통합의 미래를 열 수 있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반복되는 역사 뒤집기 시도가 진영 간 갈등을 심화시킬 수 있다고 우려한다. 강혜경 숙명여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진보·보수를 떠나 상식적인 선의 결론을 따르지 않으면 오늘의 역사는 또 미래의 과거사가 될 수 있다”고 했다.

한영익·정진우·김홍범 기자 hanyi@joongag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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