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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재현 논설위원이 간다

‘한명숙 구하기’ 법률적 걸림돌 많아 쉽지 않을 듯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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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박재현
박재현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한명숙 사건 재조사 가능할까

한명숙 전 국무총리의 정치자금법 위반 사건에 대한 재조사를 촉구하는 여권의 주장이 계속되고 있다. 사진은 2017년 8월 2년의 형기를 마치고 출소하는 한 전 총리의 모습. 이해찬 민주당 대표(오른쪽 둘째)와 문희상 전 국회의장 등이 교도소로 나가 한 전 총리를 맞았다. 우상조 기자

한명숙 전 국무총리의 정치자금법 위반 사건에 대한 재조사를 촉구하는 여권의 주장이 계속되고 있다. 사진은 2017년 8월 2년의 형기를 마치고 출소하는 한 전 총리의 모습. 이해찬 민주당 대표(오른쪽 둘째)와 문희상 전 국회의장 등이 교도소로 나가 한 전 총리를 맞았다. 우상조 기자

한명숙 전 국무총리의 정치자금법 위반죄를 벗기기 위한 여권의 움직임에 대해 검찰은 무덤덤했다. ‘법률적으로는 결코 쉽지 않을 것’이란 분석이 깔려 있었다. 윤석열 검찰총장이 이 사건 수사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점도 참모진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듯 했다.

법원·검찰 “새 증거 가져와라” #공수처서 수사검사 조사 가능 #공소시효 문제로 어려움 예상 #장기화될수록 여권에 부담 줘

다만 여권이 한 전 총리 사건을 계기로 검찰 개혁을 또 요구하는 것에 대해선 불만과 불안감이 상존했다. 윤 총장의 임기가 후반기로 접어들면서도 정치권과 검찰의 반목과 갈등이 계속될 수 밖에 없음을 경계했다.

법원 분위기도 비슷했다. “의혹 제기만으로 과거의 재판이 잘못됐다는 식으로 비춰질까 염려된다”는 조재연 법원행정처장의 답변을 정답으로 꼽았다.

21대 국회 개원과 함께 한 전 총리 사건은 윤미향 의원의 횡령 혐의와 함께 또 다른 정치적 뇌관이 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한 전 총리에 대한 재조사는 가능할까. 만약 가능하다면 어떤 방법으로 이뤄질까. 조재연 처장의 국회 발언처럼 억울한 사건이라고 생각하면 증거를 갖춰 재심을 신청하면 된다. 가장 중요한 요소는 ‘새로운 증거’의 존재여부 이다. 새로운 증거가 없으면 대법원의 확정 판결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고, 이는 사법불신을 자초하는 결과가 될 수 있다. 정국의 운영주체가 오히려 국가 사법체계를 뒤흔드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논리다.

먼저 검찰이 이 사건을 재조사할 가능성은 제로다. 대법원에서 유죄 확정판결까지 난 사건에 대해 수사팀이 다시 나선다는 것은 논리적·법률적 모순이다. 여권에서 주장하는 한만호 전 한신건영 대표의 소위 ‘비망록’도 이미 법정에서 진실 다툼을 벌였던 증거물에 불과하다. 참회록이라기 보다는 재판에서 빠져나가기 위한 작전계획의 일종으로 새로운 것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추미애. [뉴시스]

추미애. [뉴시스]

이는 법원에 재심을 신청할 재료의 소진을 의미한다. 검찰에서 거부당한 사건이 법원에서 받아들여지겠는가. 친정부 성향 언론 매체의 취재원 중 한명으로 나온 한 전 대표의 동료 수감자 A씨의 주장도 공감을 위한 설득력이 부족하다. 법률적 증거력을 갖기 위한 요소를 갖추지 못했다는 얘기다.

그래서 나오는 것이 수사팀에 대한 감찰 조사와 신설될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를 통한 수사 방안이다. 강제 수사를 통한 부당한 기소라는 논리다. 어찌보면 화풀이성 조치로 비춰질 수 있는 정치적 위험성을 안고 있다.

첫번째 안은 대검 감찰본부에서 감찰을 진행하는 것인데 윤 총장은 전혀 움직일 생각이 없다. 감찰본부도 마찬가지다. 두번째 안은 추미애 법무부장관이 요구하는 것처럼 법무부 감찰이다. 하지만 법무부엔 감찰 조사를 위한 강제적 권한이 없다. 당시 수사팀 관계자가 조사를 거부하면 이를 제어할 수 있는 법적 효력을 갖추지 못했다. 검찰 관계자는 “검찰 개혁을 명분으로 검사와 수사관들에 대한 강제 조사를 벌이려면 특별법 형태의 법안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거대 여당이 출현했다고 ‘한명숙 사건 재조사를 위한 특별법’을 만드는 것에 대해 국민들이 쉽게 납득할까.

여권이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방안이 공수처 수사다. 추 장관이 최근 언론에 나와 검사들에 대한 수사가 이뤄질 수 있음을 시사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봐야 한다. 수사 대상을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요직에 있었던 검찰 고위간부들로 확대할 수 있다. 관련 법조항이 비록 전직이더라도 재직 때의 비위와 관련해선 수사를 벌일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한명숙 사건 일지

한명숙 사건 일지

문제는 공소시효다. 직권남용혐의는 이미 7년의 공소시효가 지나갔다. 2010년 수사가 시작된 이후 항소심 변론종결 시점까지 직권남용이 이뤄진 것으로 보더라도 이미 시효가 끝났다는 얘기다. 남은 것은 공소시효 10년의 모해(謀害·꾀를 써서 남을 해침)·위증 교사 혐의다. 수사의 유일한 근거다. 하지만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한만호 전 대표의 감방 동료는 법정에서 증언을 한 적이 없다. 증언을 한 두 명 중에서 검찰 수사팀을 고소하는 등의 법적 조치를 취하면 수사의 길이 열릴 수는 있다. 그러나 당시 법정에서 한 전 대표와 증인들은 “검찰에서 강압적인 진술 강요를 받은 적이 없다”고 진술한 바 있다. 입증 책임이 어렵다는 얘기다.

여기다 ‘검찰 수사권 남용-사법 농단’이란 프레임을 짠 상황에서 법관들에 대한 대응도 골칫거리가 될 수 있다. 1심 무죄, 2심 유죄가 났다고 2심 재판부를 적폐로 모는 것은 사법부의 독립을 침해하는 것이다. 특히 대법원 확정 판결 때 주심을 맡았던 이상훈 대법관은 당시 재판 지연 문제로 여론의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 재판에 법률적 잣대를 대는 건 정치적 공멸로 향할수도 있다.

법률적 난항을 무릅쓰고 여권이 한명숙 구하기에 매달리는 이유는 뭘까.

법조계는 한 전 총리측이 직접 신원(伸冤)을 요청했을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자 “정치자금법 위반 사건은 억울하게 이뤄졌다”며 특별사면과 복권을 주문했을 개연성을 염두에 둔 것이다. 당시 검찰은 한 전 총리가 대한통운 사장에게서 뇌물을 받은 혐의로 기소했다가 무죄 가능성이 커지자 또 다른 인물을 통해 별건의 의혹을 찾아냈다. 한 전총리의 입장에선 검찰이 자신을 겨냥해 표적 및 짜맞추기 수사를 했다고 억울함을 표출할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여권 인사들은 이번 기회를 통해 한 전 총리에게 정치적 부채의식을 털어버리고 싶은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추 장관의 경우 문 대통령 지지자들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기회를 맞게 된 셈이다.

그러나 법리적 논란이 거듭될수록 한 전 총리에게 불리한 국면이 전개될 수 있다. 한 전 총리의 가족이 한만호씨 돈을 전세자금으로 사용한 사실 등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는 점이다. 또 한씨 측이 한 전 총리측에게 빌려준 돈의 반환을 요구한 것에 대해서도 수긍할 수 있는 논리를 만들어야 한다.

따라서 한명숙 구하기는 사법적 심사를 위한 후속 조치보다는 정치적 공방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커 보인다. 당초 7월 설립될 예정이었던 공수처가 올 하반기에도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상황에서 이런 저런 재료를 통한 검찰 길들이기가 쉽게 이뤄지지 않는게 이 정부의 고민이다.

정치적 사건마다 등장한 사기 혐의자들

한명숙 전 총리에 대한 유리한 정황을 조성하기 위해 이번에도 교도소 재소자의 증언 내용이 흘러나왔다. 한 전 총리에게 금품을 준 혐의를 받았던 기업인 한만호씨의 동료 재소자인 A씨는 “검찰이 시나리오를 작성하고 진술을 연습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현 야권인사인 법조인이 한씨가 진술을 번복하면 돈을 돌려주기로 약속했다”는 등의 말도 했다. 검찰은 “A씨가 황당한 얘기를 하도 많이 해 법정 증인으로 아예 채택하지 않았는데 무슨 시나리오를 작성하고 진술을 연습시키겠느냐”고 반박했다. 검찰에 따르면 A씨는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사기와 횡령 등으로 수감된 이후 교도소 내에서도 재소자와 법조인 등을 상대로 범죄를 저질러 징역 20년 이상의 형을 확정받은 상태다.

앞서 MBC의 ‘검찰과 언론의 유착 의혹’ 보도와 관련해서도 사기 및 횡령 전과자가 개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30억원대 횡령 혐의로 징역 4년을 선고받았던 이 인물은 두 건의 사기를 더 저질러 실형이 추가되기도 했다. 그는 “국회의원을 상대로 한 로비장부가 존재한다” "신라젠 수사 무마 대가로 100억원을 요구한 사람들을 밝히겠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회창 전 대선 후보 아들의 병역 비리 의혹을 폭로하겠다며 정치적 논란의 중심에 섰던 김대업씨도 사기 등의 혐의로 처벌된 전력이 있다. 국가 사법체계의 정점에 있는 수사기관의 조사 대신 사기 혐의자의 막말이 먹히는 유별난 ‘정의의 시대’다.

박재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