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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권혁주의 시선

고구려를 ‘하구려’라 부르더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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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권혁주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권혁주 논설위원

권혁주 논설위원

속도와 강도의 차이는 있으나 어차피 이렇게 될 일이었다. 미·중 갈등은 이미 버락 오바마 정부 때 수면 위로 떠올랐다. 당시 미국 하원 정보위원회가 화웨이 통신 장비를 쓰지 말라고 권고했다. 이유는 해킹과 스파이 행위 가능성이었다.

한국을 속국으로 여기는 중국 #경제·통화 예속 노릴 가능성 #‘실사구시’ 외교의 결론은 뭘까

한 꺼풀 더 들어간 속내는 견제였다. 중국은 경제와 군사에서 미국을 추월하겠다고 노골적으로 선언했다. 실제 미국은 중국에 위협을 느꼈다. 2년 전 워싱턴을 방문한 한국 국회의원에게 미국 국무부 고위 관료는 화웨이 제재를 이렇게 설명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아니었어도 마찬가지다. 미래를 좌우할 인공지능(AI) 기술에서 중국을 억누르는 게 필요하다. 중국은 14억 명의 데이터를 아무 제한 없이 쓸 수 있는 나라다. 중국의 인공지능 소프트웨어 기술은 무제한 데이터를 먹고 급속도로 자랄 것이다. 견제할 방법은 하드웨어, 특히 반도체다. 아무리 소프트웨어 기술이 좋아도 하드웨어 뒷받침 없이는 한계가 있다.”

미·중 갈등은 트럼프 대통령과 코로나19라는 변수를 만나 엄청나게 증폭됐다. 욕설이 난무하더니 중국은 결국 서방에 맞서 홍콩보안법을 통과시켰다. 화가 끝까지 치밀어 오른 트럼프 대통령은 홍콩에 주던 무비자 미국 입국 등 각종 특별 대우를 없애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본디 싸움엔 세 불리기를 위한 ‘아군 확보’가 수반되는 법. 미국과 중국은 각국에 “누구 편이냐”고 묻고 있다. 특히나 한국은 중국의 집요한 공략 대상이다. 미국과 동맹인 한국을 빼 오면 상대엔 타격을, 중국엔 이익을 동시에 안길 수 있어서다. 효과가 갑절이다. 성사 가능성도 엿보인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방한 성사’에 목을 맨 한국은 미국과의 동맹에서 약한 고리가 돼 버린 참이 아니던가.

한국은 곤혹스럽다. 은근슬쩍 넘어가는 ‘전략적 모호성’도 있지만, 지금은 통할 상황이 아닌 것 같다. 선택이 필요하다. 그러나 쉽지 않다. 한쪽으로 살짝 기울기만 해도 쓰나미를 맞을 수 있다. 중국이 틀어지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 체계를 통해 이미 경험했다. 일본의 소재·부품 수출 제한에는 분연히 떨쳐 일어서면서도 중국의 보복에는 괴로워하기만 했다. 그러니 이번에도 중국은 비슷한 무기를 들고 나올 공산이 크다. 하는 말도 똑같을 것이다. “우리는 대국이야. 보복 안 해. 한국 관광 안 가고 한국 물건 안 사는 거? 국민이 그러겠다는 데야…. 중국 내 사업 허가가 잘 안 난다고? 그거야 지방 정부 소관인데.”

반대로 미국의 심기를 자극한다면? 우선 입 걸기로 소문난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얼간이·또라이’ 소리 들을 각오를 해야 한다. 안보 문제를 들고나올 수도 있다. 제일 무서운 건 금융을 무기 삼는 것이다. 상당수 서구권 국가들이 미국 앞에 줄을 서게 한 것도 달러를 중심으로 한 미국의 금융 파워다. 물론 실행 가능성은 크지 않다. 홍콩보안법 반대가 단 한 표뿐이었던 중국과 달리, 미국은 합리적인 목소리가 독주를 견제하는 나라다. 그래도 방심할 수 없다. 금융은 ‘혹시’하는 불안감만으로도 흔들리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미국을 불편하게 하는 선택과 관련해 한 가지 더 생각할 점이 있다. 중국에의 경제 예속이다. 중국은 애초 한국을 저 아래 속국으로 여겼던 나라다. 고구려를 제후국으로 봉하는 것도 모자라 “어디 함부로 ‘높을 고(高)’자를 쓰느냐”며 ‘하구려(下句麗)’라 부르기도 했다. 그 오랜 정서는 어디 가지 않고 동북공정으로 되살아났다. 미·중 정상회담에서 시진핑 주석은 “한국은 사실상 중국의 일부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중국은 미국에 맞서 글로벌 경제의 맹주가 되기를 꿈꾼다. 위안화를 달러 같은 기축 통화로 만들려다 여의치 않자, 이번엔 디지털 화폐와 암호 화폐를 들고 나왔다. 일대일로 국가들과의 무역 결제 등을 통해 디지털 화폐를 국제 통화로 만들어서는 경제·금융 패권을 쥐겠다는 구상이다. 여기 예속되면 통제받지 않는 중국의 권력은 금융을 무기로 한국을 뒤흔들 수 있다. 바탕엔 ‘속국이니 내 마음대로’란 정서를 깔고서다.

생각할 게 참 많다. 그래서 어렵다. 걱정되는 건 문재인 정부의 직진성이다. 이 정부는 심사숙고해 정책을 결정하기보다, 하고 싶은 일을 먼저 정해 놓고 그걸 왜 해야 하는지 이유를 찾는 경향이 강했다. 탈원전이 그렇고, 소득주도성장이 그렇다. 그러다 보니 논리가 꼬이고 통계는 왜곡 해석됐다. 국운을 가를 미·중 사이 줄타기 외교에선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외교는 마음 가는 대로가 아니다. 오로지 실사구시(實事求是)다.

권혁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