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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아이캔 스피크…" 할머니의 연설은 아직 진행 중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현예슬의 만만한 리뷰(84) 영화 ‘아이 캔 스피크’

혹시 여러분은 2003년 개봉한 ‘영어완전정복'이라는 영화를 아시나요? 이나영, 장혁 주연으로 극 중 공무원이었던 이나영이 민원 처리를 위해 영어를 배우러 학원에 갔다가 장혁을 만나게 되는데요. 첫눈에 반한 장혁의 이상형이 ‘영어 잘하는 여자’임을 알게 됩니다. 이후 영어공부에 더 매진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상황을 그린 로맨틱 코미디 영화죠.

10년도 더 된 영화를 왜 이제 와서 이야기하냐 하면 제가 오늘 소개해드릴 이 영화의 첫인상이 ‘영어완전정복’이었기 때문이죠. 단순히 좀 유난스러운 할머니가 공무원에게 영어를 배우기 위해 꼬장 아닌 꼬장을 부리는데서 코미디 영화지 않을까 싶었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반전이 숨어있는 영화였습니다. 그리고 그 반전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더 부각해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서두가 길었지만 이번 주 만만한 리뷰는 2017년에 개봉한 영화 ‘아이 캔 스피크’ 입니다.

명진구청 민원봉사과에는 모든 공무원이 기피하는 ‘도깨비 할매’ 옥분(나문희분). 매일 출근하듯 구청에 방문해 민원을 낸다. [사진 명필름]

명진구청 민원봉사과에는 모든 공무원이 기피하는 ‘도깨비 할매’ 옥분(나문희분). 매일 출근하듯 구청에 방문해 민원을 낸다. [사진 명필름]

명진구청 민원봉사과에는 모든 공무원이 기피하는 대상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도깨비 할매’라 불리는 옥분(나문희 분) 할머니인데요.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니며 불법행위에 대해 일일이 민원을 내기 때문이었죠. 물론 불법행위를 저지르지 않아야 하는 게 마땅하겠지만 공무원으로서는 매일 출근하듯 구청을 방문하는 옥분을 그리 달갑지 않게 여겼습니다.

이런 구청에 9급 공무원 민재(이제훈 분)가 전근 오게 됩니다. 이곳의 분위기(?)를 전혀 몰랐던 그는 모든 동료가 피하는 옥분을 원리 원칙에 따라 대하겠다며 기 싸움을 벌입니다.

한편 옥분에게는 한가지 고민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공부하고 있는 영어 실력이 늘지 않았기 때문인데요.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민재가 원어민과 대화하는 모습을 보게 되죠. 이후 그는 민재에게 영어를 가르쳐 달라며 따라다니기 시작합니다. 민재는 갖은 핑계를 대며 거부하다가 어떠한 계기를 통해 그의 영어 공부를 돕게 되는데요. 티격태격하던 그들은 서로에게 몰랐던 부분을 알게 되며 점점 가까워집니다.

옥분(나문희 분)이 영어에 집착하게 된 이유는 친구의 못다한 꿈 때문이다.사연을 안 민재(이제훈 분)는 옥분의 영어 공부를 적극적으로 돕는다.

옥분(나문희 분)이 영어에 집착하게 된 이유는 친구의 못다한 꿈 때문이다.사연을 안 민재(이제훈 분)는 옥분의 영어 공부를 적극적으로 돕는다.

옥분이 영어에 집착하게 된 이유는 친구의 못다한 꿈 때문이었습니다. 그 꿈은 미국 하원 의회에서 열리는 공개청문회에서 위안부의 실상을 증언하는 것이었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어떠한 왜곡 없이 전달하기 위해선 자신이 영어를 잘해야 했습니다. 그런 내막까지 알게 되자 민재는 옥분의 영어 공부를 더욱 적극적으로 돕기 시작합니다.

이 영화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를 모델로 하고 있습니다. 물론 영화의 설정은 모두 허구지만 영화의 후반부에 펼쳐지는 청문회 장면은 2007년 실제로 이용수, 김군자 할머니의 증언을 기반으로 촬영했습니다. 당시로써는 한국 영화로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청문회 장면을 처음 구현해냈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이 ‘위안부’의 실상을 알게 되었죠.

사실 이 영화가 더 호평을 받은 점은 ‘위안부’라는 다소 무거운 소재를 유쾌하게 그렸다는 거죠. 영화 초반에는 단순히 영어를 배우기 위한 옥분의 고군분투를 그렸다면 후반부에 들어 옥분의 숨겨진 사연이 드러나게 되면서 관객들이 영화에 더 깊이 몰입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죠.

이 영화의 가장 핵심이라 볼 수 있는 ‘청문회’ 장면. 옥분 역의 나문희는 이 작품을 통해 데뷔 이후 처음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 영화의 가장 핵심이라 볼 수 있는 ‘청문회’ 장면. 옥분 역의 나문희는 이 작품을 통해 데뷔 이후 처음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무엇보다도 가장 명장면이라 한다면 역시 청문회 장면일 겁니다. 파란 눈들이 가득한 미국 의회에서 할머니 홀로 증언을 하기란 쉽지 않았을 겁니다. 그것도 우리말이 아닌 영어로 말이죠. 단상에 올라 입을 못 떼는 옥분에게 들려온 ‘How are you?’라는 민재의 목소리는 긴장을 풀게 해주었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죠. 옥분 역을 맡은 나문희 배우는 다소 긴 영어 대사를 그때 당시의 감정을 살려 완벽하게 소화했고 이는 관객들에게 더 감동을 안겼습니다.

나문희 배우는 이 작품으로 청룡영화상, 백상예술대상, 대종상 등 대한민국 3대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휩쓸었습니다. 1961년 데뷔 이후 첫 여우주연상이기도 했죠. 당시 “여배우들의 자존심이라기보다는 할머니들의 희망이 될 수 있어서 기쁘다”라는 수상 소감은 동료 선후배들과 시청자 모두를 뭉클하게 했습니다.

두 배우의 찰떡같은 호흡과 연륜은 무시하지 못하는 나문희 배우의 열연을 확인해보고 싶다면 이 영화를 다시 꺼내 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아이 캔 스피크

영화 '아이 캔 스피크' 포스터.

영화 '아이 캔 스피크' 포스터.

감독: 김현석
각본: 유승희
출연: 나문희, 이제훈
음악: 이동준
장르: 드라마
상영시간: 119분
등급: 12세 이상 관람가
개봉일: 2017년 9월 21일

중앙일보 뉴스제작1팀 hyeon.yeseu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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