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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의 본질은 예술성인가? 예술+실용성인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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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8호 18면

바우하우스 이야기 〈36〉

남자는 두 종류로 나뉜다. ‘들킨 남자’와 ‘아직 들키지 않은 남자’. 홍상수의 영화는 대부분 ‘아직 들키지 않은 남자’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마냥 킥킥대며 볼 수만은 없다. 이 맥락에서 느닷없이 정색하고 “‘들킨 남자’가 아닌 경우, 어떻게 죄다 ‘아직 들키지 않은 남자’에 속하느냐”며 벌컥 화를 내면 참 촌스러운 거다. 이런 이분법은 남자의 심리적 특징에 대한 시니컬한 문제 제기일 뿐이다.

일 메이지정부 ‘빈 박람회’ 모방 #1877년 첫 대회 후 잇따라 열어 #서구 모더니티 핵심 ‘분류’ 시작 #‘서예는 미술인가 아닌가’ 논쟁 후 #서화일치 탈피, 서예·회화로 분리

1877년 ‘내국권업박람회’지도. 그래픽=이은영 lee.eunyoung4@joins.com

1877년 ‘내국권업박람회’지도. 그래픽=이은영 lee.eunyoung4@joins.com

‘분류’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인식론적 도구다. 분류가 없다면 우리는 세상을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끊임없이 세상을 분류하며 자신의 태도와 행동을 결정한다.

그러나 분류가 ‘하늘에서 떨어진 것’으로 여긴다면, 그건 아주 심각한 문제로 이어진다. 인간 사회의 가장 중요한 옳고 그름의 분류기준인 ‘도덕’과 ‘윤리’ 조차 사회적인 구성물이다. 스위스의 발달심리학자 피아제가 탁월한 것은 윤리와 도덕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아는 것이 도덕성 발달의 핵심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피아제는 도덕성 발달을 ‘도덕이란 구성원들 간의 약속인 것을 깨닫는 것’이라고 아주 명쾌하게 정의했다. 도덕이란 ‘놀이의 규칙’과 같은 것이라는 이야기다. ‘놀이의 규칙’을 깨닫게 될 때, 아동의 도덕성 발달의 시작된다.

상호작용의 규칙을 전혀 모르는 어린 아동은 그저 재미있어서 놀이에 참여한다. 공을 받았으면 상대방에게 다시 던져줘야 놀이가 된다는 기본적인 규칙조차 모른다. 놀이는 곧 개판이 되고 만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동은 상호작용의 규칙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가위바위보 놀이를 하려면, 가위는 바위에 지고, 바위는 보자기에 지며, 보자기는 가위에 진다는 약속을 지켜야하기 때문이다. 규칙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하는 아동의 도덕성 발달은 두 단계를 거친다고 피아제는 주장한다. 첫 번째는 ‘타율적 도덕성 단계’다. 정해진 규칙에 대해 맹목적으로 추종한다. 규칙은 절대적 타자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절대 바뀔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른들이 규칙을 정해주면 무조건 따른다. 옳고 그름의 판단 기준도 아주 명확하고 단순하다. 의도와는 상관없다. 나타난 현상만으로 판단한다. 실수로 컵 5개를 깬 사람은 의도적으로 1개를 깬 사람보다 나쁜 짓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5세부터 10세까지의 아동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 시기가 지나면 두 번째 단계인 ‘자율적 도덕성 단계’로 들어선다. 약 11세부터다. 규칙이란 상호작용에 참여한 사람들 간의 약속이라는 것을 알기 시작한다. 약속이기 때문에 합의에 의해 언제든 변경 가능하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행위자의 의도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는 것도 생각할 수 있다.

피아제가 아동이 발달과정에서 당연히 도달한다고 여겼던 ‘자율적 도덕성 단계’는 구체적 현실에서는 그리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윤리와 도덕, 법과 규칙은 공동체 구성원의 합의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인식은 나이가 든다고, 경험이 많다고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구성 과정에 관해 끝없이 질문해야 가능하다. 이를 가능케 하는 성찰적 기제를 심리학에서는 ‘메타인지’라고 한다.

박람회는 박물관·놀이공원의 원형

‘서예가 미술인가, 아닌가?’에 관한 논쟁을 통해 ‘미술’의 개념이 확립되었다. [사진 윤광준]

‘서예가 미술인가, 아닌가?’에 관한 논쟁을 통해 ‘미술’의 개념이 확립되었다. [사진 윤광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도덕성 발달이 ‘놀이의 규칙’에 대한 구성원들 간의 동의와 같은 것이라는 피아제의 메타인지적 통찰을 ‘미술’ 개념에 적용해보면 아주 흥미로워진다. 도대체 ‘미술’과 ‘미술 아닌 것’은 누가, 언제, 어떻게 합의해서 구분했는가라는 질문이다. ‘미술’ 개념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일본 메이지 시대에 급조된 단어라는 것과 서양의 ‘뮤지엄’이 한국과 일본 등에서는 ‘박물관’과 ‘미술관’으로 분화되었다는 것은 지난 호에서 설명했다.

박물관, 미술관 이야기는 아주 자연스럽게 ‘박람회’를 끌어낸다. 박물관, 미술관, 백화점, 놀이공원, 테마파크의 원형은 ‘박람회’다(서구 모더니티는 박람회로 구체화되었다. 일본은 그대로 흉내 냈다. 다음 호에 자세히 설명하겠다).

빈 만국박람회를 계기로 일본에서는 유사한 형태의 국내용 박람회가 마구잡이로 열렸다. ‘내국권업박람회(內國勸業博覽會)’다. 첫 번째 내국박람회는 1877년에 열렸다. 빈 만국박람회가 열린 지 4년 후의 일이다. 메이지정부는 그만큼 빨리 움직였다. 박람회가 갖는 경제적, 정치적 의미를 바로 알아차린 것이다.

시작은 어설펐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내국권업박람회는 체계를 잡아갔다. 전시품의 선발과 분류가 치밀해졌다는 이야기다. 이 과정이 핵심이다. 모더니티의 핵심인 ‘분류’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1882년, 제2회 내국권업박람회의 다음 해에 박람회의 미술 전시 구역에 포함된 물품에 관한 논쟁이 일어났다. 서양화가 코야마 쇼타로(小山正太郎·1857~1916)가 ‘서예는 미술이 아니다’라는 글을 ‘동양학예술지’에 발표하여 일본의 전통회화 화가들의 심기를 확 뒤집어버린 것이다.

근대 일본의 전통화가 오카쿠라 텐신.

근대 일본의 전통화가 오카쿠라 텐신.

코야마 쇼타로는 서양미술교육을 목적으로 세워진 일본 최초의 미술학교인 공부미술학교(工部美術学校) 출신이다. 박람회의 미술전시 구역에 서예가 포함된 것에 대해 그는 "언어기호로서 의미전달의 기술에 불과한 ‘서(書)’가 형태를 구조화하는 미술의 영역에 들어온 것은 잘못되었다”고 비판했다. 서양화가인 코야마에게 ‘서예’는 ‘미술’이 아니었다. 서예는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예술성’도 없고, 공예를 발전시켜 수출을 증진시키는 ‘실용성’도 없다는 것이다.

이 같은 코야마의 주장은 급히 만들어진 단어 ‘미술’의 개념 정의를 선점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코야마에게 ‘미술’의 전제조건은 ‘예술성’과 ‘실용성’이었다. ‘서예’를 ‘미술’로 포함시킬 경우, 서예를 경험한 적이 없는 서양인들의 눈에 조소거리가 될 뿐이라는 주장도 덧붙였다.

메이지유신 이후 진행되던 급진적인 서구화 과정에 그렇지 않아도 쫓기는 심정이었던 일본의 전통화가들은 울고 싶은데 뺨 맞은 기분이었다. 당시만 해도 일본전통화단에는 ‘일본화(日本畵)’라는 개념이 없었다. 카노파(狩野派), 토사파(土佐派), 스미요시파(住吉派)와 같은 기법과 관련된 유파의 명칭만 있을 뿐이었다. 코야마의 도발은 전통화가들이 ‘일본화’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고, 그 아래 총집결하는 계기가 되었다.

독일공작연맹 ‘표준화 논쟁’ 닮아

전통화가인 오카쿠라 텐신(岡倉天心, 1863~1913)은 바로 반발했다. ‘『서예는 미술이 아니다』라는 주장을 읽고’라는 반론을 썼다. 사람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예술성’을 가지고 논한다면 ‘서예’는 회화나 조각, 건축 등과 동일한 가치를 갖는다고 주장하며, 공예품의 수출과 같은 경제적 가치를 미술의 중요한 요소로 포함시키려는 코야마의 주장을 예술가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겉으로 드러난 논쟁의 초점은 ‘서예’가 ‘미술’인가 아닌가에 대한 것이었지만, 내용은 ‘예술성’과 ‘실용성’을 둘러싼 미술의 본질에 관한 논쟁이었다.

‘예술성’에 초점을 맞춘 오카쿠라와 ‘예술성’과 ‘실용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겠다는 코야마 사이의 논쟁은 1914년 독일공작연맹의 ‘표준화논쟁’과 사뭇 닮아있다. 예술가 개인의 창조성을 강조하는 반 데 벨데의 주장이 오카쿠라의 입장에 가깝다면, 표준화를 통한 국가경쟁력을 강조한 무테지우스의 국수주의적 입장은 코야마에 근접해있다. 그러나 논쟁 이후 일어난 일본과 독일에서의 흐름은 정반대였다.

논쟁은 오카쿠라의 승리로 끝났다. 코야마가 나온 서양미술학교인 공부미술학교는 문을 닫았다. 오카쿠라는 국수주의적 입장을 강화하며 ‘서양화’에 대립하는 ‘일본화’라는 개념을 확립해간다. 한편으로는 일본화의 고전들을 정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동경미술학교, 일본미술원과 같은 제도적 장치들을 통해 일본미술의 근대화를 추진해갔던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 과정에서 불과 몇 년 전 만들어진 단어 ‘미술’은 원래부터 있었던 것처럼 간주된다. 심지어 오카쿠라 텐신은 동경미술학교에서 ‘일본미술사’를 강의하고, 이에 관한 책까지 썼다. ‘미술’이 마치 일본 역사에 처음부터 존재했던 것처럼 쓴 것이다. 구성사적 통찰을 가능케 해야 할 역사 서술이 오히려 구성사적 통찰을 방해하는 매우 교묘한 사례다(그래서 메타인지적 시각이 중요한 거다).

코야마와 오카쿠라가 각각 3회에 걸쳐 주고받은 논쟁의 파급효과는 엄청났다. ‘일본화’라는 새로운 개념이 성립되었고, ‘미술’은 ‘서양화’와 ‘일본화’를 포괄하는 개념이 되었다. ‘미술’이 일본에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된 것은 덤이다. 아울러 ‘서화일치(書畵一致)’라는 ‘글과 그림의 통일체’로서의 전통은 ‘서예’와 ‘회화’로 분리되었다. ‘서화(書畵)’ 대신 ‘회화(繪畵)’가 그림을 대표하는 개념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한국에서는 ‘한국화’라는 개념 대신, ‘동양화’라는 개념을 썼다. 일본제국주의가 만들어낸 ‘하나의 동양’이라는 발상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일본제국주의가 만들어낸 가상의 공동체 ‘동양’이 바로 오카쿠라 텐신의 『동양의 이상(東洋の理想)』(1903)이라는 책을 통해 구체화되었다는 사실이다.

김정운 문화심리학자
베를린 자유대에서 문화심리학으로 디플롬,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베를린 자유대 전임강사, 명지대 교수를 역임했다. 2012년 교수를 사임하고 일본 교토 사가예술대에서 일본화를 전공했다. 2016년 귀국 후 여수에 살며 그림 그리고, 글 쓰고, 작은 배를 타고나가 눈먼 고기도 잡는다. 저서로 『에디톨로지』『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남자의 물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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