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글로벌 아이

상급국민, 하급국민

중앙일보

입력 2020.05.29 00:27

지면보기

종합 30면

윤설영 기자 중앙일보 도쿄 특파원
윤설영 도쿄 특파원

윤설영 도쿄 특파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한 긴급사태선언 기간 일본 정부는 대대적인 재택근무 장려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파견직원(파견회사를 통해 계약을 맺은 직원)에 대해선 재택근무를 허용하지 않는 기업들이 많았다. “집에서 일 안 하고 놀고 있는지 어떻게 알겠냐”는 게 이유였다.

정규직이라고 해서 집집마다 CCTV를 달아 근무상황을 확인하는 것도 아닌데, 순전히 파견직원이라는 딱지 때문이었다. 도쿄신문에 보도된 한 파견 사원은 “목숨 걸고 출근하다가 결국 사직서를 냈다”고 했다. 재택근무도 정규직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던 셈이다.

2019년 ‘상급국민’이라는 유행어가 일본 사회를 흔들었다. 이케부쿠로(池袋) 교차로에서 대낮에 87세 운전자가 일으킨 교통사고로 10여 명이 죽거나 다친 사건이 발단이 됐다. 경찰은 운전자를 곧바로 체포하지 않았고, 언론은 용의자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 등 특혜를 줬다. 알고 보니 운전자가 통상자원성(현 경제산업성) 관료 출신의 ‘상급국민’이었던 것이다.

글로벌아이 5/29

글로벌아이 5/29

다치바나 아키라(橘玲)가 쓴 ‘상급국민, 하급국민’에 따르면, 원래 ‘상급국민’은 전문가·비전문가를 구분하는 뉘앙스로 쓰이다가 이케부쿠로 사건 이후 일본사회를 지배하는 특정층을 나타내는 뜻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일본사회는 상급국민이 지배하고, 우리 같은 하급국민은 일방적으로 착취당하고 있다”는 인식이 이 단어에 담겨있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코로나19로 위기가 발동하자 상급·하급국민의 구분은 더 확연히 드러났다. 하급국민은 병원을 돌아다니면서 ‘검사 난민’으로 전락한 동안, 상급국민은 가벼운 의심 증상만으로도 금세 코로나19 검사를 받았다. 고열과 기침에 시달리다 병원으로 가던 중 길에서 쓰러져 사망한 시민이 있는가 하면, 코로나19 담당 장관은 밀접 접촉자도 아닌데 곧바로 검사를 받았다.

심지어 “나는 ‘위기관리’ 차원에서 검사를 받았다”면서 ‘상급국민’임을 자처하기도 했다. “집에서 지내자”면서 강아지를 쓰다듬는 동영상을 올린 아베 신조 총리는 부족한 공감 능력, 빈곤한 상상력을 제대로 보여준 ‘최상급 국민’이었다.

일본에선 코로나19로 인한 사망자가 883명(5월 27일 현재) 발생했다. 이 가운데 최소 23명은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사망 후 코로나19에 감염된 사실이 확인됐다. 그런데도 아베 총리는 “일본식 모델은 성공했다”고 자평하고 있다. 일본 국민도 이런 주장에는 별로 동의하지 않는 것 같다. 최근 20%대로 떨어진 아베 내각 지지율 수치가 이를 뒷받침한다.

윤설영 도쿄특파원

Innovation Lab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