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더오래]말 등에 올라 탄 정몽주가 돌아앉은 까닭은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송의호의 온고지신 우리문화(75)

경북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에는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1337∼1392) 충신을 기리는 임고서원이 있다. 최근 이곳 포은유물관을 찾았다가 디오라마 앞에서 발걸음이 멈추어졌다. 개성 선죽교에서 일어난 포은의 최후를 보여주는 형상이다. 선생이 탄 말이 지나가는 앞으로 철퇴를 든 조영규가 달려든다. 이방원(태종)의 사주를 받은 행위다.

여기서 말을 탄 포은의 자세가 특이하다. 말 머리가 아니라 말 꼬리 쪽 반대 방향으로 앉아 있다. 후손은 “포은 선조가 죽음을 예감하고 흉한이 앞으로 달려들 것이기에 차마 그걸 보고 싶지 않아 말에 돌아앉은 것으로 들어왔다”고 설명했다.

경북 영천 임고서원 포은유물관의 정몽주 최후를 보여 주는 디오라마. [사진 송의호]

경북 영천 임고서원 포은유물관의 정몽주 최후를 보여 주는 디오라마. [사진 송의호]

포은의 이 죽음은 충절을 대표하는 민족의 이야기가 됐다. 포은이 피살되고 넉 달 뒤 500년 고려는 망하고 조선 왕조가 세워진다. 고려 충신의 이 최후 정황은 『용비어천가』의 잔주에 실려 전해진다. 거기에는 이렇게 묘사돼 있다. “정몽주가 이르자 조영규가 달려가서 쳤으나 맞지 않았다. 정몽주가 돌아보고 꾸짖으며 말을 채찍질하여 달아났다. 조영규가 내달려 말 머리를 치니 정몽주가 땅에 떨어져 달아나거늘, 고려(高呂) 등이 그를 베었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이 사건을 어떻게 보았을까. 포은이 죽임을 당한 직후 이성계의 반응은 뜻밖이다. 이방원이 들어가 사실을 고하자 이성계는 진노한다. “우리 집안은 본래 충효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너희들이 마음대로 대신을 죽였으니 나라 사람들이 내가 몰랐다고 하겠느냐. 나는 약을 마시고 죽고 싶다.” 코너에 몰린 이방원이 궁색하게 입을 뗀다. “정몽주 등이 장차 우리 집안을 무너뜨리려 하거늘, 어찌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드론으로 촬영한 경북 영천의 임고서원 전경. [사진 백종하]

드론으로 촬영한 경북 영천의 임고서원 전경. [사진 백종하]

포은과 이성계는 애증이 교차하는 관계다. 포은이 두 살 아래다. 두 사람은 본래 고려 말 함께 개혁을 주도한 동지였다. 또 원(元)‧명(明) 교체기에는 같은 친명파였다. 그러다가 후일 반목하는 사이가 된다. 포은은 개혁을 통해 기울어가는 고려 왕조를 지키려 했지만, 이성계는 혁명을 통해 새로운 왕조를 열려고 했기 때문이다. 포은은 이성계 일파의 개국 의지를 고려 왕조의 찬탈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이성계가 황주에서 사냥하다 말에서 떨어져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자 포은은 그 세력을 제거하려 했다. 그걸 알아채고 이방원이 선수를 친 것이다. 정치 쿠데타에 빠지지 않는 배신과 비정함이다. 그 과정에 비밀이 새나가는 아슬아슬한 상황도 있었다.

임고서원 앞에 재현한 똑같은 크기의 개성 선죽교. [사진 백종하]

임고서원 앞에 재현한 똑같은 크기의 개성 선죽교. [사진 백종하]

이방원이 측근들과 포은 제거를 모의하자 이성계의 조카사위 변중량이 그 사실을 포은에 알려줬다. 그러자 포은은 정세를 알아보려 문병을 겸해 이성계의 사저를 방문한다. 문병이 끝나자 이방원은 포은을 접견하고 거기서 서로의 속내를 떠보는 이방원의 ‘하여가’와 포은의 ‘단심가’가 등장한다. 시점은 추정이다. 이방원은 포은의 뜻을 확인한 뒤 조영규 등을 시켜 선죽교에서 포은을 살해한다. 그래서 포은은 죽음이 닥칠 줄을 뻔히 알면서도 명분과 절의를 위해 사지(死地)로 나아갔다고 연구자들은 해석한다. 우리 조상들이 최고의 가치로 여긴 충(忠)이란 무엇일까?

야욕에 맞설 때 충은 흔히 목숨을 요구한다. 5공 신군부의 12‧12사태 등 크게 보면 현대에도 다르지 않다. 임고서원의 포은 디오라마를 보면서 떠오른 생각이다.

대구한의대 교수‧중앙일보 객원기자 theore_creator@joongang.co.kr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