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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예영준 논설위원이 간다

5월 광주의 잊혀진 의인 문용동의 삶과 죽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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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예영준 기자 중앙일보

28세 신학도는 왜 도청에서 죽음 맞았나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도청에 진입한 시위대들이 군·경으로부터 탈취한 소총과 실탄 등으로 무장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도청에 진입한 시위대들이 군·경으로부터 탈취한 소총과 실탄 등으로 무장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40년 전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현장에서 숨진 젊은 넋들 가운데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의인(義人)이 있다. 수많은 시민이 목숨을 잃고 광주 도심이 순식간에 잿더미가 될 수 있는 대재앙을 막겠다는 일념으로 동분서주했지만, 정작 자신의 목숨은 돌보지 않아 5·18 최후의 희생자가 된 고 문용동 전도사(이하 경칭 생략)가 그 주인공이다. 오랜 세월 동안 문용동은 잊혀진 존재에 가까웠다. 숭고한 희생과 용기가 평가를 받기는커녕 ‘프락치’란 오해와 ‘배신자’란 누명을 쓰기도 했다. 40년의 세월이 지난 뒤에야 그의 삶과 죽음이 광주 지역사회와 기독교 교단을 중심으로 조금씩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그의 최후를 지켜본 또 다른 의인 김영복씨와 유족, 지인들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그의 삶을 재구성해본다.

시민 생명 지키려 계엄군과 협상 #프락치·배신자 누명 무릅쓰고 #무기고 폭발물 뇌관 제거 주도 #40주기 맞아 순교자 지정 운동

전남도청 지하실에서 일어난 일

도청 주변에 쌓여 있던 수류탄. 지하 무기고로 옮겨지기 전이다.[중앙포토]

도청 주변에 쌓여 있던 수류탄. 지하 무기고로 옮겨지기 전이다.[중앙포토]

1980년 5월 21일 계엄군의 강경 진압에 시위 군중들이 격렬히 반발하면서 유혈 사태가 광주 시내 곳곳에서 일어났다. 계엄군이 도시 외곽으로 일시 퇴각하자 수많은 시위 군중이 이튿날 아침부터 금남로의 전남도청으로 집결했다. 학생·종교지도자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수습위원들은 시위대가 소지한 총기와 무기를 회수해 도청 옆 회의실 건물의 지하에 쌓아두었다. 그 속엔 시위대가 화순탄광에서 옮겨 온 다이너마이트와 무기고에서 탈취해 온 수류탄 등이 대량 포함돼 있었다.

이런 상황을 눈여겨본 이가 있었다. 호남신학대 4학년이던 문용동과 공병 출신의 김영복씨 등이었다. 김씨는 “군대에서 폭약물을 다뤄본 경험으로 볼 때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 자칫 담뱃불이라도 옮겨붙거나 하면 대폭발 사고가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불과 3년 전 일어났던 ‘이리역 폭발사고’의 악몽을 떠올리기도 했다.

시민군 임시무기고가 있던 전남도청 부속 건물의 지금 모습. 프리랜서 장정필

시민군 임시무기고가 있던 전남도청 부속 건물의 지금 모습. 프리랜서 장정필

두 사람을 중심으로 몇 사람이 자발적으로 무기 관리를 맡아 시위대의 접근을 통제했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수류탄과 다이너마이트의 뇌관을 제거해 별도로 보관하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고심을 거듭한 두 사람은 계엄군이 주둔해 있던 전투교육사령부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동료 시위대에게 발각될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시위대 중에는 뇌관 분리를 할 수 있는 전문가가 없었기 때문에 다른 선택이 없었다”고 말했다.

계엄군은 24일 폭약 해체 기술자인 군무원 배승일씨를 몰래 보내주었다. 배씨는 밤샘으로 모자라 25일 낮에서야 뇌관 분리 작업을 끝내고 돌아갈 수 있었다. 배씨는 “3년 전 있었던 이리역 폭발사고를 다시 일으키고도 남을 만큼의 폭약물이 쌓여 있었다”고 했다. 문용동 등은 그 후에도 계속 지하실의 임시무기고를 지켰다. 뇌관을 뽑고 도화선은 분리했지만 폭약 자체는 그대로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27일 새벽 진압군이 도청으로 진입해 왔다. 두 사람은 나이 어린 세 사람을 먼저 피신시킨 다음 도청 뒤편의 전남도경 건물로 이동했다. 날이 환하게 밝아 왔고 총성이 멎었다. 상황이 끝난 것으로 판단한 문용동이 두 손을 들고 건물 문밖으로 나오는 순간 총탄 소리가 되살아났다. 문용동이 28년의 짧은 생을 마감하던 순간이었다. 뒤따르던 김씨는 머리에 파편을 맞고 실신했으나 목숨을 건졌다.

문용동은 과연 프락치였나

5·18 당시 신학대 4학년생이던 문용동 전도사의 생전 사진. [사진 문용동 기념사업회]

5·18 당시 신학대 4학년생이던 문용동 전도사의 생전 사진. [사진 문용동 기념사업회]

도청 지하실에서 있었던 일들은 오랫동안 묻혀 있었다. 김영복씨는 “아내에게조차 숨기고 살다가 2006년 수소문 끝에 찾아온 문용동의 신학교 후배에게 처음 증언을 했다”고 말했다. 1980년대에는 여전히 5·18에 대해 공개적으로 말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폭약반원들이 계엄군과 내통해 진압군을 불러들인 ‘프락치’였다는 오해도 퍼져 아직까지 완전히 풀리지 않은 상태다. 김씨는 “내가 산 증인”이라며 단호히 부정했다. “계엄군을 찾아간 건 고심 끝에 다른 방법이 없어 내린 결정이다. 지금 똑같은 상황에 처해도 마찬가지 선택을 할 것이다. 그리고 문용동이 정말 프락치였다면 뇌관을 제거하고 난 뒤에도 왜 도청에 남아 죽는 길을 택했겠나.”

김영복씨가 26일 호남신학대 교정의 문용동 추모비에 헌화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김영복씨가 26일 호남신학대 교정의 문용동 추모비에 헌화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실제로 문용동은 사는 길을 택할 수도 있었다. 26일 오후가 되자 “오늘 밤 계엄군이 들어올 것”이란 소문이 파다했고, 많은 사람들이 도청을 빠져나갔다. 문용동의 누나인 문승자씨와 신학교 동기였던 윤상현·이명섭 목사, 장래를 약속한 여자친구 등이 도청 앞으로 찾아가 집으로 돌아갈 것을 권유했다. 누나 문씨는 “내가 아니면 무기고를 지킬 사람이 없다. 고맙고 미안하다고 말한 뒤 되돌아갔다. 그게 마지막 만남이 되고 말았다”며 말끝을 잇지 못했다. 신학교 친구였던 윤상현 목사는 “아직도 선명히 기억한다. 신학도의 양심으로 이 위험한 폭발물을 방치해 두고 떠날 수 없다, ‘나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말을 되뇌며 기도하겠다. 결국 말없이 악수만 하고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유족에 의해 발견된 문용동의 일기도 그가 프락치가 아니었음을 입증하는 증거다. 도청 지하실 무기고를 지키던 24일 그는 수첩에 “양심이란? 내 마음속에 숙소를 정하고 계신 하나님의 목소리”라고 썼다. 5월 22일 일기에는 계엄군의 과잉 진압에 대한 분노와 함께 “진정한 민주주의의 승리를 보여줘야 한다. 나의 불참이, 나의 방관과 외면이 수습을 더 지연시키는 것”이라고 적었다.

문용동이 프락치란 주장은 왜 나왔을까. 5·18을 연구해 『광주, 그 날의 진실』을 출간한 역사학자 김형석 박사는 “계엄군이 진압작전 성공을 업적으로 과시하려는 목적에서 자신들이 주도해서 프락치 공작을 펼쳐 폭약을 제거했다고 둔갑시켰다”고 말했다. 심지어 5·18 종료 직후 계엄사령부와 국보위가 펴낸 자료에는 “뇌관제거 작업을 하다 들키는 바람에 시민군에 의해 폭약관리반원 1명이 사살당했다”는 기술까지 나온다. 이는 명백한 사실 왜곡이다. 김영복씨는 “뇌관을 제거한 사실은 시민군 지도부에도 끝까지 비밀로 했다”고 말했다. 군 당국의 ‘프락치 공작’ 왜곡은 2007년 정부 주도의 과거사 재조사에서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바로 잡히게 된다.

이제는 그를 기억해야 한다

시민군 임시무기고가 있던 전남도청 부속 건물의 지금 모습.

시민군 임시무기고가 있던 전남도청 부속 건물의 지금 모습.

문용동 40주기를 맞아 그의 행적을 기리는 추모행사와 예배, 학술대회가 지난 26일 모교인 호남신학대학에서 열렸다. 동문을 중심으로 문용동의 삶을 기록하고 추모사업을 펼쳐온 결과다. 2001년 무렵부터 소규모로 시작했던 추모사업은 문용동이 다녔던 광주제일교회가 소속된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교단 차원으로 확대됐다. 예장통합 교단은 4년 전 그를 순직자로 지정한 데 이어 올해 9월 순교자로 추서하기 위한 심사를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문용동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고 있는 윤상현 목사는 “종교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숨진 것을 의미하는 순교를 보다 폭넓게 해석하면 문용동의 죽음도 순교로 볼 수 있다”며 “그의 의로운 죽음이 기독교 교단을 넘어 일반인에게도 더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고은 시인은 2010년 완간한 『만인보』의 마지막 부분에 문용동에 관한 시 4편을 실었다. ‘호남신학대 졸업하면/낙도에 가/교회 개척할 생각도 가려운 듯 무러운 듯 이어졌다/밤이었다/ 이런 생각 다 버렸다(중략)/ 도청 지하실 무기관리를 맡았다…죽음이 다가왔다/ 신 새벽이었다/계엄군 충정작전 병력이 칠흑 속 다가왔다/(중략)/M16 총탄 세발 맞은/주검 문용동’

5·18 희생자들은 죽음으로써 민주열사가 됐다. ‘님을 위한 행진곡’의 주인공인 시민군 지도자 윤상원, ‘광주의 꽃’으로 불린 전옥주 등 이름이 널리 알려진 사람들뿐 아니라 망월동 묘역에 잠든 광주 영령 그 누구의 희생도 헛되이 할 수 없다. ‘5월 광주’ 그 날로부터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제는 문용동의 숭고한 희생정신도 함께 돌아보며 기억해야 할 때가 되었다.

예영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