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김영민의 생각의 공화국

선진국 환상 넘어 헬조선 깰 생각의 공화국 추구해야

중앙일보

입력 2020.05.28 00:23

업데이트 2020.05.28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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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연재를 시작하며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전 세계로 확산됐다. 소위 선진국들마저 쩔쩔매고 있는 데 비해, 한국은 비교적 성공적으로 방역을 해나가는 중이다. 때마침 KBS는 코로나 이후 달라진 한국사회의 인식을 조사한 결과를 발표했다. 그에 따르면, 응답자의 83.5%가 한국은 선진국이라고 대답했다. (한국이 기존 선진국보다 더 우수하다고 본 응답자는 58%, 한국과 기존 선진국과 비슷하다고 본 응답자는 25.5%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응답자 57.4%가 한국은 희망 없는 ‘헬조선’이라고 간주한 것을 생각한다면, 실로 놀라운 수치다.

코로나 방역 성공적 대처하자
‘헬조선→선진국’ 생각 이동중
산업재해, 소수자 인권 해결없이
선진국론 앞세우는 건 환상일뿐
도덕적 담론 넘어 강철생각 필요

한국이 선진국이라는 주장은 이번에 처음 제기된 것은 아니다. 1996년 한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했을 때, 정부의 공식언론인 국정신문은 “우리나라의 OECD 가입은 절대빈곤에서 출발, 30여년 간의 피나는 노력을 통해 우리가 비로소 선진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음을 세계로부터 인정받는 마지막 절차라고 할 수 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선진국에 대한 강박관념이 느껴지는 이같은 선언이 나온 지 25년. 마침내 일반 사람 대다수가 한국이 선진국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선진국으로 탈바꿈하는 와중에도 한국은 꾸준히 자기 나름의 헬조선 역사를 썼다. 유엔 인권 부(副) 고등판무관 (Deputy High Commissioner) 출신인 한국의 외교부장관은 5월 13일 독일 공영방송 도이체벨레의 한 대담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한국의 코로나19 대응을 열정적으로 홍보했다. 그런데 코로나19 대처 과정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이 작동하는 것을 우려하는 대목에서 이르러, 장관은 한국에는 “성 소수자의 권리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없다”고 말했다. 실로 한국 사회에는 성 소수자의 권리에 둔감하거나 적대적인 사람들이 아직 상당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촛불혁명이 일어나기 전인 2016년 한국 정부는 제32차 유엔 인권이사회가 발의한 ‘성적지향 성별 정체성에 근거한 폭력과 차별로부터의 보호 결의안’에 찬성한 바 있다. 그러니 외교부 장관이 2020년에 해외 언론에 대고 “사회가 받아들일 만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데 변화를 촉구하면 기존의 편견들을 오히려 악화시킬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한국이 인권에 관한 한 결코 선진국이 아님을 세계만방에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외교부 장관이 인권을 위한 사회적 변화에 유보적 태도를 보인 바로 그 5월 13일, 한국은 노동자의 권리와 노동 조건에 대해서도 유보적인 나라임이 다시 한번 판명되었다. 삼척의 시멘트 공장에서 근무하던 하청업체 60대 노동자가 컨베이어 벨트에 머리가 끼어 죽은 것이다. 이것은 새삼스러운 사고가 아니다. 3월12일에는 과로에 시달려 온 40대 계약직 배송 노동자 김모씨가 새벽 배송을 하던 중 숨졌고, 4월 29일에는 이천시 모가면의 건설 현장에서 물류창고 화재로 인해 노동자 38명이 죽는 참사가 일어났다. 5월 21일에는 조선소에서 하청 노동자가 용접작업을 하다가 질식해서 죽었고, 바로 그다음 날에는 목제품 제조업체에서 일하던 20대 노동자가 고무 분쇄기에 빨려 들어가 목숨을 잃었다. 2018년 12월 11일 김용균 씨가 발전소 석탄이송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 즉사한 이래로 상황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물론 근로조건의 기준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해야 한다고 대한민국 헌법 제32조는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해마다 노동자 2400여명이 노동 현장에서 산업재해로 이처럼 죽어 나간다면, 이는 한국은 결코 선진국이 아니라고 고함치고 있는 거나 다름없다.

그래도 이 나라가 기어이 선진국이라고 자처하는 건, 잘생기지 않은 얼굴을 기념하기 위해 청동 흉상을 만드는 일 같은 게 아닐까. 기존의 선진국이 명실상부한 선진국이 아니라고 판명되었기에 자신이 느닷없이 선진국이 되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 살을 빼지 못했는데도 남들이 살이 찌는 바람에 다이어트의 달인이 되는 기분일까. 다른 사람이 모두 팬티를 내렸기에 자기만 갑자기 세계 최정상의 패션모델이 되는 기분일까.

생각의 공화국 5/28

생각의 공화국 5/28

중년이 되고서야 깨닫는다. 중년의 위기가 찾아온 것이 아니라, 인생은 늘 위기였는데 그저 중년이 찾아왔을 뿐이라는 걸. 허울 좋은 선진국이 되고서야 깨닫는다. 사회는 아직 문제로 신음하고 있는데, 선진국이 갑자기 찾아왔을 뿐이라는 걸. ‘절대빈곤에서 출발, 30여년 간의 피나는 노력을 통해 선진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나라’가 어떻게 헬조선이 아닐 수 있겠는가. 불과 100여년의 시간 동안에 왕조 국가에서 공화국으로 탈바꿈하고, 자신들이 무시해온 이웃 나라에 강점당하는 식민지 체험을 겪고, 동족에게 죽창을 꽂는 상잔의 전쟁을 거쳐, 끼니를 걱정하는 빈국에서 국내총생산(GDP) 규모 세계 12위권의 부국으로 도약하는 파란만장한 현대사를 쓴 나라가, 자기 자신에 대한 애증으로 가득한 이 나라가 어떻게 ‘헬’이 아닐 수 있겠는가. 한국은 지옥 불에도 무너지지 않은 그을린 가옥이며, 한국인은 지옥 불을 견디고 기어이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들이 바이러스 방역에 성공하는 것은 놀랍지 않다. 한국이 방역에 상대적으로 성공한 것은 선진국이어서가 아니라 헬조선이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인적·물적 자원을 갈아 넣을 수 있는 곳. 원하면 통신사 기지국을 통해 시민의 동선을 샅샅이 복구할 수 있는 곳. 와불(臥佛)처럼 달관하는 대신, 보란 듯이 살아남고야 말겠다는 결기를 가지고 너나 할 것 없이 추노꾼처럼 전력 질주하는 곳. 이곳에 안온한 선진국형 게으름과 권태가 들어설 자리는 없다. ‘헬카페’에 독한 위스키와 커피가 넘치듯이, 헬조선에는 독한 역동성이 넘친다. 사람들은 여전히 밥을 사냥하듯이 먹고, 자신이 굴릴 돌을 앞장서 고르는 시시포스의 심정으로 직장을 고른다. 각자도생에 분투하는 동안 삶은 빨리 지나가고, 영혼은 간헐적으로나 존재한다.

역병에 이어 도래할 경제 위기에, 시시포스는 노역에서 해방, 아니 해고될 것이 두렵다. 비참하게 죽기 싫어하는 그 두려움을 연료 삼아 예언자들이 설치기 시작한다. 역병을 예측하지 못했던 지식인들이 매스컴에 나와 역병 이후의 미래를 예측하기 시작한다. 마치 ‘노멀’이 존재했던 양 이제 ‘뉴노멀’을 말하기 시작한다. 정치인은 구원을 약속하고, 정치의 팬덤화는 가속화되고, 지난 100년 동안 지속된 한국 공론장의 굿판적 성격은 변함이 없다. 생각의 폐허를 가득 채운 구호와 비난과 불안과 억울함과 집단 흥분 속에 소 종파 종교들은 번성한다. 탁지원 국제종교문제연구소장에 따르면, 한국에는 현재 자신을 하느님이라고 주장하는 종교 지도자만 20여 명, 재림예수를 자처하는 이도 50명이 넘는다.

예언가들이 횡행하는 이곳에서 제정신을 유지하려면, 선진국에 대한 환상에 쉽게 의탁하거나, 자신을 연민하는 정신적인 울보가 되거나, 달콤한 힐링을 섣불리 찾지 않는 것이 좋다. 솜사탕으로 이루어진 사회 안전망과 이젠 쓸모없어진 흔적기관과도 같은 인권 의식을 가지고 선진국 행세를 하는 이곳에서 살아남으려면 도덕적 담론을 넘어서는, 강철같은 생각이 필요하다. 잘 다져진 절망과 희망을 안고 강철로 이루어진 생각의 징검다리를 밟으며 죽을 때까지 의연하게 걸어가야 한다.

그와 같은 길을 앞서 걸어갔던 미국의 의학자이자 작가인 올리버 색스(Oliver Sacks)는 죽음을 앞두고 ‘나의 삶’이라는 글을 썼다. 그 글에서 그는 담담히 회고한다. 자신은 맹렬하고, 폭발적이고, 극단적인, 불같은 열정의 인간이었다고. 즉, 그의 삶은 헬조선과 같았다고. 열정을 가지고 지옥을 통과한 그가 내린 인생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지각 있는 존재(sentient being)이자 생각하는 동물(thinking animal)로서 이 아름다운 행성에 살 수 있었다는 것이야말로 대단한 특권(privilege)이며 모험(adventure)이었다.”

실로 생각은 침잠이 아니라 모험이며, 그것이야말로 저열함에서 도약할 수 있는 인간의 특권이다. 타인의 수단으로 동원되기를 거부하고, 자극에 단순히 반응하는 일을 넘어 타성에 젖지 않은 채, 생각의 모험에 기꺼이 뛰어드는 사람들이 만드는 터전이 바로 생각의 공화국이다.

◆김영민 교수
고려대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아시아 정치사상, 비교 정치사상이 전공. ‘추석이란 무엇인가’란 그의 한 신문 칼럼이 젊은층의 큰 반향을 불렀다.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있는 것』 등의 저서가 있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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