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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북핵 위기와 안티프래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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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정재홍 기자 중앙일보 부데스크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한국은 코로나19 위기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만들고 있다. 지난 2월 말 코로나19가 대구를 중심으로 무섭게 확산하며 중국에 이은 제2 감염국이라는 불명예를 안기도 했다. 그러나 질병관리본부(질본)를 중심으로 한 공격적 진단 검사와 접촉자 추적·격리, 시민들의 자발적인 마스크 쓰기와 사회적 거리두기는 경제봉쇄 없이도 코로나19 확산을 저지할 수 있게 했다. 한국형 방역 모델 K방역은 전 세계가 부러워한다.

북핵은 한국의 최대 ‘블랙 스완’ #미국에 줄 건 주고 안보 보장받아 #위기에 강한 대비태세 구축해야

K방역의 선방은 2015년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 때의 호된 경험이 도움이 됐다. 메르스 경험을 통해 시간을 다투는 신종 감염병 진단 키트는 사전 승인을 받고 신속히 공급할 수 있는 제도가 도입됐다. 또 질본과 의료기관의 유기적 협조체계도 갖출 수 있었다. 이런 대비태세가 코로나19 대처 성공으로 이어지며 한국의 위상을 끌어올렸다.

한국은 코로나19 위기에 안티프래질(Antifragile)하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월가 투자전문가이자 뉴욕대 교수인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가 만들었다. 유리병 등이 충격이나 변화에 프래질(fragile·부서지기 쉬운)한 것과 반대 개념이다. 안티프래질은 위기나 충격에 부서지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강해지는 걸 일컫는다. 마블 영화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에서 아이언맨이 토르와 싸울 때 토르의 번개를 맞고 파워가 엄청나게 상승하는 장면이 안티프래질의 예라 할 수 있다. 위기를 기회로 활용해 더 강해지는 개인이나 기업·사회·국가는 모두 안티프래질하다.

서소문 포럼 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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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브는 저서 『안티프래질(Antifragile)』에서 예측이 불가능한 데다 불규칙적으로 발생해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는 대형 사건인 ‘블랙 스완’에 대한 해독제로 안티프래질을 강조한다. 한국의 최대 블랙 스완은 북핵 위기라 할 수 있다. 북핵 위기는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이 불가능하고 불규칙적으로 발생하며 위기가 실제화했을 한국엔 재앙적 타격을 입힐 수 있다.

문재인 정부는 북핵 위기가 현실화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듯하다. 그러나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와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모두 발생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다가 불의에 타격을 입은 공통점이 있다. 현 정부는 북핵 위기를 과소평가하며 제대로 대처하지 않고 있다. 북·미 대화를 통한 비핵화가 사실상 물 건너갔는데도 북한은 관심도 보이지 않는 대북 협상에 매달린다. 그 사이 북한의 핵 능력은 고도화하고 있다.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당 중앙군사위원회 확대회의를 주재했다며 “나라의 핵전쟁 억제력을 한층 강화하고 전략 무력을 고도의 격동 상태에서 운영하기 위한 새로운 방침들이 제시됐다”며 “인민군 포병의 화력 타격 능력을 결정적으로 높이는 조치들도 취해졌다”고 지난 24일 전했다. 핵을 뜻하는 ‘전략 무력’과 ‘포병 전력’이 함께 거론되며 단거리 탄도미사일과 초대형 방사포 등에 핵탄두를 장착하는 전술핵 확대를 의미하는 게 아닌지 전문가들은 우려한다. 북한이 전술핵 확장에 나서면 한국군의 재래식 전력 우위는 무의미해진다.

문재인 정부는 이제라도 북핵 위기가 현실화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위하기보다는 이에 대해 안티프래질해질 수 있는 대비태세를 갖추는 게 필요하다. 이를 위해선 무엇보다 북핵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북핵은 한국의 생존을 위태롭게 한다. 북한은 핵을 ‘만능의 보검’으로 여기며 한국을 위협한다. 한국 정부가 대화에 목맬수록 북한은 우리를 무시한다.

북한이 경제 개발을 위해 핵을 폐기할 것이라는 현 정부의 시각은 이미 시효가 지났다. 문 대통령은 국가와 국민의 생존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 그러려면 북핵 대비태세를 갖춰야 한다. 국내외 요인으로 인해 한국이 자체적으로 핵을 개발하는 건 어렵다. 한·미 동맹에 따른 미국의 핵우산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냉전기에는 미국이 공산주의 확산을 막으려고 한국에 일방적 지원을 한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미·중 경쟁에 따른 신냉전기에 미국의 일방적 지원은 힘들게 됐다. 미국도 한국에 더 많은 기여를 바란다. 결국 주고받기식이 돼야 한다.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핵우산 등 안전 보장을 더 확실히 얻는 대신 미국이 원하는 인도태평양전략 참여나 화웨이 사태 등에 적극성을 보여야 한다. 구해우 미래전략연구원장은 “북핵을 견제하려면 한국은 한·미 동맹을 최우선으로 하고 안보 문제에서 타협하지 말아야 한다”며 “안보 문제에서 미·중 사이에 눈치를 보다가는 오히려 화를 키운다”고 지적했다.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