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시조 백일장] 5월 수상작

중앙일보

입력 2020.05.26 00:03

업데이트 2020.05.26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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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장원〉

어느 등짝 

-김미영

누가 이 섬 안에 부려놓은 바위인가
녹동항 배에 실려
아버지 등에 실려
열세 살 소년의 눈에 여태 남은 어느 등짝

여기까지 업고와 등을 돌린 그믐달
칠십년 흘렀지만 단 한번 보지 못한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그리운 서울 한쪽

창파에 떠 있지만 소록소록 소록도
한센병의 섬에도 연애질은 있었나보다
눈 한쪽 귀 한쪽 없어도 比翼鳥 사랑은 남아

때마침 후드드득 한소절의 소낙비
팔뚝에 낀 우산으로 외려 나를 받쳐준다
한시도 내리지 못 한 십자가 같은 저 등짝

◆김미영
김미영

김미영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재학중. 2019년 8월 중앙 시조 백일장 차상. 서귀포문학작품 전국 공모전 가작.

〈차상〉

드라이브 스루

-김경아

뫼비우스 띠를 따라 용케 잘 오셨습니다
우주행 티켓은 마침 두 장 남아 있군요
당신의 홍채 인식이 결재를 끝냈습니다

이곳의 티 메뉴는 블랙이 전부입니다
쓴맛에 뺏긴 시선 흔들림을 유념하세요
목적지 가는 동안은 구매취소 불가입니다

유리벽 사이 두고 봄 색채 지워졌다고요
여기선 기계음만이 대화가 허용됩니다
다음에 찾게 될 때는 무선 헬멧 쓰세요

〈차하〉

격세지감隔世之感 

-김나경

‘개’라는 접두사의 질기고 긴 수난시대
시고 떫고 맛없다고 개살구 개복숭아
이것 참 개만도 못한, 푸념에나 달려있던
음지도 양지된다는 옳거니 맞는 말씀
21세기 신조어엔 칭찬으로 딱 붙어서
개좋아, 개맛있단다 개잘났어, 개만세!

〈이달의 심사평〉   

서로 얼굴을 쳐다보기가 민망하고 상대방에게 비치는 나의 모습이 참으로 기괴하고 머쓱한 시절을 살고 있다. 모두에게 충격이 컸음이리라. ‘코로나19’를 주제로 투고작이 많았지만 이를 내면화하기에는 너나없이 더 많은 사유의 천착이 요구되는 것 같다.

이 달의 장원으로는 김미영의 ‘어느 등짝’을 놓는다. 한 많은 비사를 간직한 소록도를 배경으로 어느 한센인의 한 생을 담담하되 서럽게 노래했다. 섬 안에 있는 어떤 ‘바위’와 소년이 느끼는 ‘아버지 등’ 을 등치시켜서 행간에 감춘 묵직한 서사를 아프고도 서럽게 토해내고 있다. ‘등을 돌린 그믐달’ 아래서 ‘팔뚝에 낀 우산’으로 ‘비익조 사랑’을 한 눈물겨운 이야기를 풀어낸 솜씨가 비범하다. 차상에는 김경아의 ‘드라이브 스루’를 올린다. 뉴스에 많이 등장하는 ‘드라이브 스루’라는 용어를 제목으로 앉혀놓고 짐짓 시치미를 떼듯 ‘코로나19’ 검진의 우울함보다는 디지털 시대의 생기발랄함을 표현했다. 차하에는 김나경의 ‘격세지감’을 선한다. ‘개’라는 접두어의 쓰임에 관한 이야기다. ‘개’라는 접두어의 변화에 대한 시인의 시선이 생각 좀 하고 살라는 충고인 것만 같다. 살기 힘든 시기에도 투고자가 많은 것은 시가 삶을 위로하는 하나의 방편인 듯해서 매우 고무적이다. 신영창, 김문진, 선관종, 조우리의 작품을 끝까지 관심 있게 보았다. 정진을 바란다.

심사위원: 강현덕·김삼환(심사평: 김삼환)

 〈초대시조〉

폭포

-노중석

사는 일
벼랑이란들
어찌 다 피해 가랴

깊은 소(沼)
곤두박혀
우레소릴 낼지라도

빛 부신
무지개 한 채
덩그렇게 놓는다

◆노중석
노중석

노중석

1946년 경남 창녕 출생. 1983년 서울신문신춘문예 등단. 시조집 『비사벌 시초(詩抄)』 『하늘다람쥐』 『꿈틀대는 적막』. 금복문화상 수상.

노중석 시인의 시조가 지닌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잘 다듬어진 정갈하고도 세련된 언어다. 작품 전체가 미리 계획된 설계도에 따라 제대로 지어진 건축물처럼 탄탄한 느낌을 줄 뿐만 아니라, 단시조 형태의 극도로 짧은 서정시에다 중후한 주제를 역동적으로 담아내기도 한다. 이와 같은 면모는 위에서 소개한 ‘폭포’라는 작품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깊은 산 계곡을 따라 흘러내리는 시냇물이 처음부터 끝까지 순조롭게만 술술 흘러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야말로 파란만장과 우여곡절을 다 겪고 나서 천신만고 끝에 최종 목적지인 바다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 파란만장과 우여곡절을 대표하는 것이 바로 난데없이 나타나는 천 길 만 길의 낭떠러지다. 완전 방심하고 흘러내려가던 시냇물이 돌연 아찔한 낭떠러지를 딱 만났을 때, 갑자기 눈앞이 다 캄캄했을 게다.

하지만 이 깊은 산 중에서 오로지 외길 인생인 물이 피해서 갈 곳이 어디 있으랴. 설사 낭떠러지 밑의 깊은 소에 들입다 곤두박혀 천지를 뒤덮는 우레 소릴 내며 혼절을 하게 될지라도, 두 눈을 질끈 감고 용감무쌍하게 뛰어내릴 수밖에 없을 터. 자신을 과감하게 내던지다 보면, 죽기는커녕 “빛 부신/ 무지개 한 채”를 거느린 장엄하기 짝이 없는 폭포가 된다.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아찔하게 높은 장대 꼭대기에서 허공으로 난 길을 한 걸음 더 과감하게 내딛듯, 목숨마저도 아낌없이 냅다 내던질 때, 우리네 인생에도 찬란한 무지개가 한 채씩 덩그렇게 놓이게 될 것이다.

이종문(시조시인)

◆응모안내
매달 20일까지 우편(서울시 중구 서소문로 100번지 중앙일보 문화부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 또는 e메일(choi.jeongeun@joongang.co.kr)로 접수할 수 있습니다. 응모 편수에 제한이 없습니다. 02-751-5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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