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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감이 서럽다' 중국 공산당 모자 쓴 노인 판화에 숨은 뜻

중앙일보

입력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장비의 일화(익덕 의석엄안)를 표현한 채색 판화 문자도. 18세기 후기에 제작된 걸로 추정되며 원판 없이 문자도만 전해진다. [사진 고판화박물관]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장비의 일화(익덕 의석엄안)를 표현한 채색 판화 문자도. 18세기 후기에 제작된 걸로 추정되며 원판 없이 문자도만 전해진다. [사진 고판화박물관]

글자인지 그림인지, 시원하게 뻗은 획 안에 깨알같이 꽃, 새, 사람 등을 그려 넣었다. 궁중판본은 형형색색 치장도 화려하다. 직접 그렸어도 놀라운 세밀함인데, 심지어 두툼한 목판을 한땀한땀 파서 표현했다. 글자를 그림으로 표현한 문자도(文字圖)와 판화의 만남이다.

글자와 그림 맞물려 찍은 '문자도 판화' #한·중·일·베트남 등 70여점 모아 특별전

조선시대 ‘문자도’는 글자 뜻을 그림으로 손쉽게 전달하면서 장식적 기능도 발휘했다. 특히 민간에서는 용(龍), 호(虎), 구(龜) 등 수호적 상징이나 부귀(富貴), 수복강녕(壽福康寧) 등 소망을 담아 제작했다. 유교 가르침을 따라 효제도(孝悌圖)라고 불리는 ‘효, 제, 충, 신, 예, 의, 염, 치’를 넣은 8폭 병풍 문자도 역시 인기였다. 다만 문인화가 발달했던 나라답게 육필 문자도는 다양했으나 판화는 드물었다. 특히 판화 문자도를 찍었던 원판은 전해지는 게 희소하다.

오는 30일부터 강원도 치악산 자락 명주사 내 고판화박물관(관장 한선학)에서 열리는 ‘판화로 보는 동아시아 문자도의 세계’ 특별전에선 최근 발굴된 희귀 문자도(원판 포함) 3종이 첫 공개된다. 이 가운데 문병 구룡(龜龍) 목판화는 19세기 정축년에 제작했다는 기록이 뒷면에 남아 있다. 문병(門屛)이란 밖에서 집 안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거는 대문 가림막인데, 이같은 걸개 형태까지 온전히 보존됐다.

특별전을 통해 처음 공개되는 문병 구룡(龜龍) 목판화. 19세기 정축년에 제작했다는 기록이 뒷면에 남아 있는 판화 문자도다. [사진 고판화박물관]

특별전을 통해 처음 공개되는 문병 구룡(龜龍) 목판화. 19세기 정축년에 제작했다는 기록이 뒷면에 남아 있는 판화 문자도다. [사진 고판화박물관]

또 그간 원판이 발견되지 않았던 가회박물관 효제도(19세기) 가운데 효의(孝義)와 치충((恥忠) 목판이 처음으로 발굴됐다. 한선학 관장은 “지난해 수집한 수복 문자도 원판 등 최근 발굴 성과를 토대로 총 70여점을 전시한다”고 소개했다. 한국 작품 20여점 이외 중국(30여점), 일본(15점), 베트남(10점) 등 동아시아 문자도를 한눈에 비교할 수 있게 했다.

이번 전시회에선 가회박물관 효제도(19세기) 원판 일부가 처음으로 발굴돼 선보인다. 각각 효의(孝義, 왼쪽)와 치충((恥忠) 목판. [사진 고판화박물관]

이번 전시회에선 가회박물관 효제도(19세기) 원판 일부가 처음으로 발굴돼 선보인다. 각각 효의(孝義, 왼쪽)와 치충((恥忠) 목판. [사진 고판화박물관]

문자도 판화가 발원했고 지금도 왕성하게 제작되는 중국 작품 중엔 ‘노래난(老來難)’이 눈에 띈다. 글자 안에 그림을 새긴 게 아니라 글자들을 노인 형상으로 배치한 문자도다. 늙어감의 어려움을 토로한 내용으로, 노인 모자 형태로 볼 때 공산당 집권 이후에 제작된 걸로 추정된다. 한 관장은 “판화는 인쇄등사기에 비해 제작비용이 적게 들어 루쉰(魯迅)이 사회계몽 운동을 할 때도 널리 쓰였다”면서 “중국 공산당도 이를 응용해 ‘증가생산’ 등의 글자를 채색판화로 장식해 집집마다 걸게 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중국 공산당 집권 이후 제작된 판화 문자도 '노래난'의 목판(왼쪽)과 판화. [사진 고판화박물관]

중국 공산당 집권 이후 제작된 판화 문자도 '노래난'의 목판(왼쪽)과 판화. [사진 고판화박물관]

에도시대(18세기) 일본에서 제작된 '나무아미타불' 채색 문자도 판화 역시 이번 전시에서 첫 공개된다. 나무아미타불 6자 안에 무량수경의 내용을 그림으로 담아 교화 용도로 쓰였다. [사진 고판화박물관]

에도시대(18세기) 일본에서 제작된 '나무아미타불' 채색 문자도 판화 역시 이번 전시에서 첫 공개된다. 나무아미타불 6자 안에 무량수경의 내용을 그림으로 담아 교화 용도로 쓰였다. [사진 고판화박물관]

2003년 개관한 고판화박물관은 국내 최대인 6000여점의 고판화 유물을 수집했으며 이번 전시품은 모두 자체소장품이다. 이번 전시는 7월31일까지.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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