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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 냉전에 ‘홍콩 뇌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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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갈등을 빚은 미·중이 이번엔 홍콩 국가보안법으로 맞붙었다. 중국은 홍콩 문제를 체제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이고, 미국은 인권과 자유민주주의 수호라는 가치의 문제로 인식하는 만큼 차원이 다른 충돌의 전조일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중국, 홍콩 국보법 제정 움직임에 #폼페이오 “홍콩 지위 박탈” 경고 #중국 공안기관 제재 대상에 올려 #왕이 “어떤 외부 개입도 용납 못해”

중국이 22일 전국인민대표대회 개막식에서 소개한 홍콩 국가보안법 초안의 골자는 국가 분열 및 국가 정권 전복 시도 및 외국 세력의 홍콩 내정 개입을 처벌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홍콩의 반중국 인사들을 처벌하는 근거가 될 수 있다. 중국은 홍콩 민주화 시위를 미국이 막후에서 조종하고 있다는 외세 개입론을 주장해 온 걸 고려하면 미국을 겨냥한 것으로 볼 소지도 크다.

미국은 제재와 경제적 혜택 철회라는 견제구를 재빨리 날렸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22일 성명에서 “중·영 공동 선언문이 보장한 홍콩의 자치와 자유를 침해하는 모든 결정은 특별구 지위에 필연적으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폼페이오 장관이 언급한 특별지위 덕에 홍콩은 그간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 본토에 부과한 추가 관세를 적용받지 않았는데, 이를 박탈할 수도 있다는 위협이다.

또 미 상무부는 22일 밤 중국의 33개 기관 및 대형 기업을 수출규제 ‘블랙리스트’에 올렸다. 중국 공안부 과학수사연구소(IFS)도 포함됐다. 신장·위구르 지역 인권 탄압이 명분이지만, 중국이 홍콩 국가보안법을 밀어붙일 경우 중국 정부 기관 및 인사들을 제재할 수 있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중국은 홍콩 국가보안법 처리 의지가 확고하다. 왕이(王毅) 중국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은 24일 기자회견에서 홍콩 국가보안법 제정이 홍콩의 특수지위 상실 등 타격으로 이어지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그는 “(국가보안법이 대상으로 하는 것은) 국가 안전을 엄중하게 해치는 극소수 행위”라며 오히려 홍콩이 안정돼 금융과 무역, 해운 중심지로서의 지위가 지켜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왕 위원은 또 미·중 관계에 대해 “미국의 일부 정치 세력이 중·미 관계를 인질로 잡고 양국 관계를 소위 ‘신냉전’으로 몰아가려고 시도하고 있다”며 “이처럼 위험한 행동은 역사를 거꾸로 돌리는 것이며, 양국 인민의 협력 성과를 매장하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홍콩 시위대 “하늘이 중국공산당 멸할 것” 수천명 도심 시위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가 홍콩 국가보안법안 상정을 강행하자 홍콩 시민들이 다시 거리 시위에 나섰다. 미국은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홍콩 특별지위 박탈 카드를 꺼내는 등 중국 압박에 나서고 있다. 24일 시위대를 진압하는 홍콩 경찰. [EPA=연합뉴스]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가 홍콩 국가보안법안 상정을 강행하자 홍콩 시민들이 다시 거리 시위에 나섰다. 미국은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홍콩 특별지위 박탈 카드를 꺼내는 등 중국 압박에 나서고 있다. 24일 시위대를 진압하는 홍콩 경찰. [EPA=연합뉴스]

또 “우리는 중국의 주권과 영토, 정당한 발전권리 특히 중국 인민이 온갖 고생 끝에 얻은 지위와 존엄을 지킬 것”이라며 “중국이 미국을 변화시킬 의도가 없듯이 미국도 자신의 혼자 생각만으로 중국을 변화시킬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유감스럽게도 미국엔 코로나19 외에도 일종의 정치 바이러스가 확산하고 있다”며 “일부 정치인이 가장 기본적인 사실을 무시하고 중국에 대한 거짓말을 날조하고 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중국인은 원칙과 기개가 있어 중상모략에는 반드시 반격한다”면서다.

미·중 간 갈등의 원인을 ‘일부 정치인’에게 돌리고 협력을 강조하는 등 여지를 남기면서도 체제와 직결되는 홍콩 문제에 대해서는 물러나지 않겠다는 뜻을 명확히 한 셈이다.

실제 왕 위원은 “홍콩의 일은 중국 내정으로 어떤 외부 개입도 용납할 수 없다. 내정 불간섭은 국제관계의 기본 준칙으로 각국 모두 이를 준수해야 한다”며 사실상 미국을 겨냥했다.

특히 미국이 홍콩 국가보안법 문제를 반중 결집의 기회로 삼을 가능성이 커 미·중 간 대립의 전선이 확대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당장 영국의 홍콩 반환 당시 마지막 총독인 크리스 패튼 전 홍콩 총독은 영국, 호주, 아시아의 정치인 등 185명의 세계 지도자들과 공동성명을 내고 “국가보안법 제정은 홍콩 자치권과 자유에 대한 도전이자 중·영 공동 선언문(1984)의 노골적 위반”이라며 “국제사회가 중국의 홍콩에 관한 약속을 못 믿는다면 다른 사안에 관해서도 믿기를 주저하게 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런 편가르기가 가속화한다면 한국 역시 미·중 양쪽으로부터 어느 한쪽을 선택하라는 압박을 받을 우려가 있다.

홍콩 시민들은 국가보안법 제정에 반대하며 다시 거리로 나왔다. 24일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와 CNN 등에 따르면 이날 오후 홍콩 중심가인 코즈웨이 베이와 완차이 등에서는 반중의 상징인 검은 옷을 입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수백 명이 시위에 나섰고, 속속 합류한 시민들로 시위대 규모는 수천 명까지 늘어났다. 이들은 ‘하늘이 중국 공산당을 멸할 것이다(天滅中共)’ 등의 팻말을 들고 행진했다.

홍콩 경찰은 강경 진압했다. 시위대가 코즈웨이 베이에 모이자마자 최루탄을 발사했고, 물대포도 쐈다.

베이징·워싱턴=유상철·정효식 특파원
서울=서유진 기자 jjpo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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