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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8가지, 아내 190가지···코로나에 드러난 '집안일 민낯'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 3월 일본 도쿄의 규시바리큐온시 정원에서 한 커플이 웨딩 사진을 찍고 있다. [AP=연합뉴스]

지난 3월 일본 도쿄의 규시바리큐온시 정원에서 한 커플이 웨딩 사진을 찍고 있다. [AP=연합뉴스]

일본에서 마케팅 웹 컨설턴트로 일하는 카타오카 스스무는 최근 아내로부터 집안일 리스트를 작성해달라는 요구를 받았다.

그는 ‘아이들 등 하원’, ‘놀아주기’, ‘설거지’ 등 8가지를 적어냈다. 그러자 아내는 190가지를 엑셀 파일로 만들어 전했다. ‘머리카락 줍기’, ‘행주 삶기’, ‘아이들 깨우기’ 등 평소 카타오카가 무심히 지나쳤던 일들도 적혀있었다.

아내는 “내가 집에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있는지 깨닫기를 바란다”며 “앞으로 집안일을 나눠서 하자”고 요구했다.

카타오카가 한 달 전 트위터에 올린 사연이다. 그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재택근무를 시작하며 아내에게 가사분담을 요구받았다고 한다. 카타오카는 “집안일이 이렇게 많은지 몰랐다”며 “많은 남편들이 아내들의 수고스러움을 깨달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카타오카 스스무와 그의 아내는 각자 맡은 집안일 리스트를 작성했다. 그 결과 카타오카는 8개, 아내는 190개를 적어냈다. 그는 그 내용을 트위터에 올리고 "남편들이 집안 일에 동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트위터 캡처]

카타오카 스스무와 그의 아내는 각자 맡은 집안일 리스트를 작성했다. 그 결과 카타오카는 8개, 아내는 190개를 적어냈다. 그는 그 내용을 트위터에 올리고 "남편들이 집안 일에 동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트위터 캡처]

“일본 남편, 돕는 법을 배우다”

집안일에 무심하던 일본 남편들이 변하고 있다. 19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는 재택근무와 이동제한령으로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진 일본 남편들이 아내의 집안일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NYT는 남편의 가사 참여율이 낮은 것으로 알려진 일본에서 변화가 시작됐다는 점에 주목했다. NYT는 “일본의 맞벌이 부부 가운데 절반 이상은 ‘남편의 가사 참여율이 20% 이하’”라며 “전 세계에서 유독 많은 집안일을 하고 있는 일본 여성들이 그 짐을 덜 수 있을지에 관심이 쏠린다”고 전했다.

일본에서는 코로나19 사태 이후 많은 부부들이 갈등을 드러내며 이혼 위기에 놓였다. 도시 봉쇄로 부부가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그동안 쌓였던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

갈등의 원인에는 집안일에 대한 불만도 포함됐다. 아사히신문은 이날 “평소 바쁜 회사업무와 사회생활로 가정일에 소홀했던 남편들에 대한 아내들의 불만이 터져 나온 것”이라며 “집안일을 모두 아내에게 맡기는 남편들의 의존성도 영향을 미쳤다”고 보도했다.

아내 SOS에 집안일 배운 남편들

무역회사에 다니는 테라지마 요시아키는 최근 “도와달라”는 아내의 호소를 들은 뒤 가사 분담의 필요성을 깨달았다.

코로나19로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며 일본 남편들이 아내들의 집안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pixabay]

코로나19로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며 일본 남편들이 아내들의 집안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pixabay]

맞벌이 부부인 테라지마와 그의 아내는 이동제한령이 내려지면서 모두 재택근무에 들어갔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일과는 달랐다. 테라지마는 종일 회사 일만 봤지만, 아내는 집안일에 치여 업무에 손도 못 댔다. 결국 아내는 “더는 혼자 할 수 없다”며 도움을 요청했다. 테라지마는 그제야 집안일이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이제 그는 매일 아이들의 점심과 숙제를 챙기고, 화장실을 청소한다. 테라지마는 “코로나19 사태가 끝나도 계속해서 집에서 일하며 집안일을 돕고 싶다”고 인터뷰에서 말했다.

도시 봉쇄 풀려도 가사 분담 계속될까?

도시 봉쇄가 해제된 뒤에도 가사 분담이 계속될지는 의문이다. 일본의 사회학자들은 “비상사태가 끝나면 집안일은 다시 아내가 전담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후지타 유이코 메이지대 사회학과 교수는 “일본 남편이 가사를 돕는 건 일시적인 변화다. 코로나19 사태가 끝나면 집안일은 다시 아내 몫이 될 것”이라고 인터뷰에서 말했다.

NYT는 그 원인으로 ‘경직된 기업문화’를 지목했다. 기업에 대한 충성심과 생산성을 강조하는 노동 문화가 남편들을 가정보다 일에 더 집중하게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여성보다 남성의 정규직 비율이 높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했다. 고용 안정성이 보장된 남편은 경제적 책임을, 아내는 집안일을 전담하는 구조라고 NYT는 분석했다.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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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집안일 습관화, 기업문화 바꿔야 

가사 분담을 시작한 남편들도 봉쇄 해제 후를 걱정한다. 출퇴근 생활로 돌아가면 다시 회사 일과 개인 생활에 매몰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카타오카는 “업무에 치이면 또 집안일에 소홀해질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대신 집안일을 리스트로 만들어 들고 다니며 몸에 익히고 있다고 했다. 그는 “아내들의 사회생활을 장려하기 위해서라도 남편이 집안일을 분담해야 한다”며 “집안일을 소홀히 보지 말고 습관화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테라지마는 기업문화 변화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코로나19로 집에 머물며 아이들과 함께 있다 보니 가족과 함께하는 삶이 정상적인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면서 “코로나19 사태가 일본의 융통성 없는 기업 문화를 바꿀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민정 기자 lee.minjung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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