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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 중국 경제 쥐락펴락한 상인조직

중앙일보

입력

중화민국 탄생 후 근대자본이 생기기 전, 중국 역사에서 예금, 대출 등 은행 업무를 담당하며 중국 경제를 쥐락펴락한 상인 조직이 있었다. 바로 진상(晋商)이다. 진상은 명청(明清) 500년간 전성기를 맞았던 산시 상인(山西商人)을 일컫는 말이다. 이들은 남방의 신안(新安)상인과 더불어 중국 상업계의 2대 세력을 이뤘다.

핑야오 고성

핑야오 고성

그들은 가장 먼저 명조(明朝)의 몽골 방위를 위한 군량 수송을 맡아 큰 이익을 얻었다. 축적된 부를 토대로 진상은 대량의 소금, 곡물, 비단, 철기를 비롯하여 일용잡화 거래까지 장악했다. 또 러시아 및 몽골과의 차 무역으로도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참새가 있는 곳에 산시 사람들이 있다.’는 중국 속담이 있는데, 진상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진상을 최고의 상인으로 역사에 남도록 만든 것은 뭐니뭐니 해도 선구적인 금융업이었다. 명·청 시대 진상은 전당포와 고리대금업으로 부를 쌓았다. 청나라 강희제 시대 중국 전당포의 25%가 산시성에 있었다. 그들은 고리대금업에서 한발 더 나아가 은행의 모태가 되는 ‘표호(票号)’를 탄생시켰다.

금융기관 운영하며 천문학적 부 쌓아

표호(票号)는 오늘날 은행의 3대 업무라고 할 수 있는 예금·대출·환업무를 통해 이윤을 챙기는 오늘날의 상업은행과 유사한 기능을 지닌 기관이다. 중국 최초의 표호는 1823년 설립된 핑야오현(平遥县)의 일승창(日升昌)표호다. 일승창은 대륙 곳곳에 지점을 두었다. 청대 통틀어 51개의 표호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43개가 산시성 사람이 세운 것이었다. 그중 평요에 22개가 있었다. 당시 평요는 중국의 월스트리트였다.

중국 최초의 금융허브 '일승창' 표호

중국 최초의 금융허브 '일승창' 표호

일승창 표호는 종업원들에게 '신고'라는 이름의 주식을 줌으로써 수익을 분배하는 선구적인 경영모델을 일찌감치 실현했다. 또한 암호화되고 복잡한 장부기재 방법으로 내부 비리를 차단했다. 또, 표호의 소유주는 총지배인이라 불리는 CEO에 경영을 일임했다. 또한 표호는 신용을 최우선으로 꼽았으며 시대에 따라 제도에 따라 업종과 경영방식을 탄력적으로 바꿔나갔다. 진상은 개방시대 중국에서 유행한 ‘시대에 발 맞춰 나아가자’는 구호를 실천했다.

사실 표호는 고객의 돈을 받은 다음 법적으로 보호도 받을 수 없는 환어음만 한 장 써줬다. 그 어음이 다시 돈이 되어 돌아올 수 있을 것인지는 오로지 표호의 신용에 달려 있었는데, 진상은 ‘의(義)로서 이(利)를 제약한다.’는 원칙으로 수백년 동안 신용을 지켜와 표호업에 뛰어들 수 있었다고 한다.

황실서도 돈 빌려간 '막강 경제력'

진상(晉商)은 황실에서 돈을 빌릴 만큼 막강한 경제력을 갖고 있었다. 8국연합군이 원명원(圆明园)을 불태운 후 중국 정부에 배상금을 요구할 때 정권을 잡고 있던 자희태후는 진상의 교가(乔家)로부터 돈을 빌리려고 했다.

또한 수당(隋唐) 교체 시기에 무측천의 부친 무사확(武士貜)이, 이연(李渊) 부자가 태원(太原)에서 군사를 일으켰을 때 막대한 자금을 제공해 이연 부자의 정예 군사와 무씨(武氏)의 재력이 천하를 얻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당 건국 후, 무씨(武氏)는 국공(国公)에 봉해져 지위가 당 초기 건국 공신인 능연각24공신(凌烟阁二十四功臣)과 동등했으며 이후 중국 역사상 최초의 여황제 무측천(武则天)을 낳은 이야기는 진상(晉商)의 경제력이 어떠했는지를 말해준다.
진상의 3대 상업 수칙, 신용·근면·지혜

‘작은 부자는 머리를 쓰고, 큰 부자는 덕을 짓는다’

진상은 신용을 으뜸 덕목으로 삼아 남을 속이거나 빼앗지 않고 부자가 됐다. 진상에서도 '거상'으로 통했던 교치용의 상점에 있었던 일화를 통해 그들의 핵심철학을 엿볼 수 있다. 당시 많은 상인들은 저울을 조작해 밀가루 무게를 속이곤 했다. 그런데 교치용은 무게를 속이지 않은데다 1근을 팔면서 실제로는 1근2냥을 줬다. 처음엔 손해를 봤지만 그곳에서 밀가루를 사 본 소비자들은 "교치용의 상점만 믿을 수 있다"며 그곳에서만 물건을 샀다고 한다. ‘작은 부자는 머리에 의존하고, 큰 부자는 덕에 의지한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속임수를 쓰지 않는 상업윤리를 실천했다.

산시 사람들에겐 장사 유전자가 있었던 걸까? 청나라 옹정제 때, 산시성 총독 유어의가 황제에게 이런 글을 올렸다고 한다. "산시성에서 똑똑하고 재주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장사를 합니다. 장사꾼이 못될 것 같으면 차라리 농사를 짓거나 군인이 됩니다. 그저 그런 평범한 사람들이나 글을 읽어 과거를 봅니다." 사람들이 '배워서 뛰어나면 관직에 나아가던(學而優則仕)' 시대에 장사의 가치를 외쳤던 진상의 전통은 오늘날 화교 상인들의 정신으로 자리잡았다.

비즈니스 자리서 관우보다 더 잘 통하는 '교치용'

진상에서 가장 유명한 상인이라면, 소설·드라마 ‘교가대원(乔家大院)’의 주인공 교치용(乔致庸, 1818~1907)을 꼽는다. 교치용은 지금까지도 중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 중 하나로 꼽힌다.

드라마 '교가대원'에서 교치용 역을 맡은 배우 진건빈

드라마 '교가대원'에서 교치용 역을 맡은 배우 진건빈

혼란하던 청나라 말기, 교치용은 산서 지역에서 신용을 바탕으로 상업 질서를 세우고 근대 은행시스템과 물류유통의 기반을 닦았다. 그는 "장사의 첫째는 의리(義), 둘째는 신용(信), 마지막이 이익(利)"이라는 신조를 토대로 장사를 했다. '의리와 신용을 지키는 상인에게 이익이 따라온다'는 말은 통했다. 교치용은 청나라 정부가 정한 토지제도마저 위태롭게 할 정도로 많은 재산을 모았다. 산시성에서 비즈니스 자리에 가면 관우(关羽)보다, 교치용(乔致庸)을 얘기하면 더 큰 도움이 된다.

진상의 흥망성쇠

진상(晋商)은 부를 기반으로 풍부한 건축유산도 여럿 남겼다. 저명한 교가대원(乔家大院), 상가장원(常家庄园), 조가(曹家) 삼다당(三多堂) 등이 그것이다.
특히 교가대원은 5A급 여유경구로 황실에는 궁궐이 있고, 민가에는 '교가'가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웅장하다. 장이모 감독과 궁리 주연의 〈홍등〉의 촬영지이자 45부작 TV 드라마 〈교가대원〉의 무대로 유명하다. 부지 1만642㎡(건축면적 4175㎡)에 6개의 대원(大院)과 20개의 소원(小院), 313칸의 방으로 구성됐다. 외벽의 높이는 10여m에 달한다.

그러나 진상도 근대화의 파고를 넘지 못했다. 청말 태평천국의 난, 백련교도의 난등 농민봉기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조정의 금고로 전락하게 됐다. 아편전쟁 이후 몰려든 외국 상사와 은행은 진상의 영역을 잠식했으며 신해혁명(辛亥革命) 이후 이들의 표호(票号)가 쓰촨, 산시 등지에서 일어난 전쟁과 습격으로 신뢰도가 떨어지자, 대규모 자금인출 사태가 벌어지며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차이나랩 임서영

차이나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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