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마음 다이어리

수업 때 낙서만 하던 민규, 사회성 치료 후 디자이너 됐다

중앙선데이

입력 2020.05.23 00:02

업데이트 2020.05.23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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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7호 16면

아이 마음 다이어리 〈2〉 자폐스펙트럼장애

“내 이름은 크리스토퍼 존 프랜시스 부운이다. 나는 세계의 모든 나라와 그 나라의 수도를 알고 있고, 7507까지의 모든 소수를 기억하고 있다.”

의사소통·상호작용 능력 떨어지고
자기만의 제한적인 세계에 몰입
부모 잘못 아닌 유전적 신경 장애

경주용 차 즉석 세밀화 그린 초등생
치료 프로그램 참여, 그림 특기 살려
“곤충서 착안한 자율주행차 디자인”

이 문장은 영국 소설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의 도입부 첫 문장이다. 주인공 15세 소년 크리스토퍼는 수학과 물리학에 뛰어난 자질을 보인다. 집안의 가구나 물건이 본래의 자리에 있기를 고집하며 목록과 패턴을 좋아한다. 노란색과 갈색을 싫어하고 두 가지 종류의 음식이 섞이면 먹지 못하며 누군가 자기 몸을 만지면 공격성을 보인다. 농담을 이해하지 못하고 시나 소설의 은유적 수사를 거짓말이라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작가 마크 해던은 크리스토퍼의 병명을 거의 언급하지 않지만, 독자들은 첫 장부터 그가 매우 독특하고 일반적이지 않음을 직감한다. 주인공 크리스토퍼는 아스퍼거 증후군 환자이다.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이웃집 개를 살해한 범인을 추리하며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이 정한 규칙으로부터 조금씩 벗어나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게 된다.

수학에 흥미, 국어·사회엔 전혀 관심 없어

일러스트=이정권 gaga@joongang.co.kr

일러스트=이정권 gaga@joongang.co.kr

크리스토퍼는 15년 전 민규를 생각나게 했다.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민규는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주의력 검사를 권유받아 부모와 함께 나를 찾아왔다. 아이는 수업시간 내내 교과서나 노트에 낙서만 하고 공부에 집중을 못 했다. 수학에 흥미가 많았고 성적도 좋았지만, 국어나 사회에는 전혀 관심 없었다. 3학년 1학기 어느 날 모둠별 자석을 이용한 나침반 실험 시간에 자동차만 만드는 민규 모습에 친구들이 불평하자 민규가 화를 내며 실험도구를 다 엎는 사건이 있었다. 그 이후 친구들은 민규를 무서워하고 피하게 되었다고 한다. 사실 민규 부모는 집중력 문제보다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본인이 하고 싶은 것만 하려는 고집스러운 행동에 대해 더 많은 걱정을 했다.

“민규야, 수업시간에 주로 뭘 그리는 거야?” 민규가 낙서를 많이 한다는 엄마의 말에 민규를 향해 질문했다.

“다 자동차죠 뭐!” 당연하다는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 나는 민규의 억양이 단조롭고 부자연스럽다고 느꼈다.

나는 엄마를 쳐다보며 물었다. “어머님, 민규가 집에서도 주로 자동차를 그리나요? 혹시 사진 찍어둔 것 있으세요?”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 휴대폰 속 민규의 그림들을 보여주었다. 주로 경주용 자동차였다. 초등학생의 그림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고 세밀했다.

“민규야, 선생님이 종이 줄 테니 자동차 하나 그려볼래?”

“그러죠. 뭐. 어렵지 않아요.” 자신만만한 말투였다.

민규는 연필을 사용해 잦은 터치로 경주용 자동차를 금세 완성한 후 앞면에 브랜드 로고까지 붙였다. 마치 영국의 천재 화가 스티븐 윌트셔의 작품 속 뉴욕 택시를 연상케 하는 그림이었다. 현재 46세인 윌트셔는 3세에 자폐증 진단받고 9세가 되어서야 말을 했지만, 시각적 기억력이 뛰어난 화가이다. 헬기 위에서 단 몇 분 동안 본 도심 풍경의 모든 것을 세밀한 부분까지 그려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나는 그의 작품을 무척 좋아해서 강의에서 자주 언급한다.

‘아스퍼거 증후군’은 2013년 이후 정신장애진단통계편람(DSM-5)에서 삭제되었고 ‘자폐스펙트럼장애’라는 진단명으로 편입되었다. 소설 속 크리스토퍼와 민규 둘 다 자폐스펙트럼장애를 지녔다. 자폐스펙트럼장애 아이들은 돌 무렵 조기징후를 보이다가, 2~3세에 증상이 뚜렷해지기 시작한다. 즉, 의사소통과 상호작용 능력이 떨어지고 제한적이고 반복적인 행동과 관심사를 나타낸다. 미국에서는 59명당 1명 정도 발생하며 남자에서 4배 더 많다. 현재 아스퍼거 증후군은 공식적으로 사라진 진단명이지만 자폐스펙트럼장애 환자 중 언어와 지능이 정상적인 경우에 사용된 명칭이다. 민규는 18개월까지 옹알이만 하다 24개월 이후 말이 트이면서 자동차 번호판을 다 읽고 차 로고를 짚어가며 모델 이름을 줄줄이 외우기를 반복했다. 대형 마트에 가면 상품 로고를 확인하기를 고집해서 다른 코너로 이동할 때마다 애를 먹었다고 한다. 유치원 시절 주차장에 즐비한 자동차들을 보고 집에 와서 그대로 그리기 시작한 이후 줄곧 자동차만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엄마는 민규가 아스퍼거 증후군을 갖고 있으며 자폐스펙트럼장애의 일종이라는 설명을 듣고 뜻밖에도 크게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를 키우며 들었던 의문점들이 드디어 풀렸다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 다만 병의 원인이 자신 때문이라고 여겼다.

“아이 돌 무렵부터 남편과 자주 다투었어요. 민규 아빠가 매우 고지식하고 주장이 강하거든요. 게다가 둘째를 임신하고 입덧이 너무 심해 민규에게 짜증을 많이 내고 항상 아이 혼자 놀게 내버려 두었어요. 너무 후회되네요.” 엄마는 흐느꼈다.

나는 부모와 가족 구성원들에 대해 자세히 물었다. 그중 미국으로 이민 간 민규의 삼촌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어느 연구소 통계학자인 삼촌은 사람들을 거의 만나지 않고 연구실 안에 틀어박혀 데이터 코딩과 분석만 한다고 했다. 민규 아빠는 자기 동생의 어린 시절이 민규와 매우 흡사했다고 회상했다. 이처럼 자폐스펙트럼장애는 가족력이 높은 신경발달장애이며 유전적인 요소가 근본 원인으로 사회성을 담당하는 뇌 회로에 이상이 생기면서 다양한 증상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자폐’라는 편견과 낙인의 병명 바꿔야

“어머님 잘못으로 민규에게 이런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닙니다. 자책하지 마세요.” 나는 위로를 담아 단호하게 말했다. “선생님, 제가 병원에 너무 늦게 왔나요? 아스퍼거 아이들은 어른이 되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엄마는 민규의 치료 과정과 미래가 궁금하고 걱정스러웠다. 나는 민규와 같이 지능과 언어가 정상인 자폐스펙트럼장애 아이들은 또래 집단 사회성 기술 훈련을 꾸준히 받는 것만으로도 꽤 호전될 수 있다고 말했다. 민규는 3명의 초등학교 3~4학년 아이들과 함께 하는 집단 치료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진단 직후부터 적극적으로 참여해온 사회성 치료를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멈추지 않고 지속했다. 치료 시간에 터득한 대인관계 기술을 학교에서 잘 적용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기도 했다. 중학교 시절 친구와 오해가 생겨 화를 참지 못하고 식판을 던진 사건으로 분노조절 약물을 복용하기도 했지만 1년 만에 끊을 수 있었다. 민규와 부모가 치료에 적극적이었고 학교에서도 아이의 병에 대해 잘 이해하고 배려한 덕분이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자폐’라는 용어가 개정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왔다. 자폐의 영문명 ‘autism’은 그리스어 ‘self’를 뜻하는 “autos”와 “-ism”의 합성어로 스위스 정신과 의사 오이겐 브로일러가 조현병의 증상 중 하나를 기술하기 위해 1900년대 초 처음 사용했다. 이후 1943년 레오 캐너가 사회성이 부족하고 반복적인 행동을 보이는 아동 11명의 사례를 보고하면서 ‘autism’을 차용했고 현재까지 쓰이고 있다. 그렇다면 ‘autism’이 어떻게 한국에서 ‘자폐(自閉)’가 되었을까? 일본 번역어 연구의 대가 야나부 아키라의 저서 『프리덤, 어떻게 자유로 번역되었는가?』에서는 ‘society’란 용어가 초기에는 ‘인간교제’라고 번역되었다가 최종적으로 ‘사회(社會)’로 번역되기까지의 과정을 흥미롭게 기술했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사회성’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게 된 대목이다.

‘autism’속에 ‘자기(self)’는 포함되어있지만 닫을 ‘폐(閉)’는 어디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자폐라는 병명이 가져다주는 부모의 좌절과 두려움은 세간의 편견과 낙인에서 비롯된다. 민규 엄마가 사라진 용어인 ‘아스퍼거’를 지속적으로 사용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자폐’라는 용어가 병의 본질을 더 잘 반영하는 명칭으로 개정되기를 희망한다.

민규는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는 항상 병원을 찾았다. 입시 준비 과정에서 컴퓨터와 미술 전공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예술대학에 들어가 디자인을 전공했다. 졸업 후 자동차 회사 수습사원으로 입사해 디자이너 경력을 쌓고 있다는 민규가 오랜만에 나를 찾아왔다. 약간 신이 난 듯 자신이 디자인 중인 자율주행 전기자동차에 관해 이야기했다. “궁금하시겠지만 지금은 선생님께 보여드릴 수 없어요. 단지 어떤 곤충에서 착안했다는 것만 알고 계세요”라고 경쾌하게 말했다.

※개인 정보 보호를 위해 등장인물을 가명으로 처리했고, 전체 흐름을 왜곡하지 않는 범위에서 일부 내용을 각색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천근아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소아정신과 교수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8년 영국 국제인명센터(IBC)의 ‘세계 100대 의학자’로 선정. 서울시교육청 자문위원, 가정 법률상담소 교육위원, 법무부 여성아동정책심의위원으로 활동했으며, 저서로는 『아이는 언제나 옳다』, 『엄마 나는 똑똑해지고 있어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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