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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숙 사건 담당검사 "대법 판결 부정하려면 재심 청구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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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검찰 수사와 법원의 판결이 잘못됐다면, 재심을 청구하면 되지 않습니까?”

21일 불법 정치 자금 혐의로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한명숙 전 국무총리 사건을 담당했던 한 검사의 말이다. 한 전 총리에게 9억원을 준 고 한만호씨의 옥중 비망록이 최근 언론에 공개되며 여권에서 ‘한명숙 무죄’를 주장하는 데 대해서다. 이 검사는 “재심을 청구할 만한 사유가 안 된다는 걸 당사자들도 알고 있기 때문에 언론을 통해 과거 판결과 검찰을 흔들려는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법조계 "한명숙 재심? 당장 어렵다"

한명숙 전 국무총리. 중앙포토.

한명숙 전 국무총리. 중앙포토.

한씨는 비망록에서 그가 검찰에서 “한 전 총리에게 9억원을 줬다”고 한 진술이 실제로는 강압에 의한 거짓 진술이었다는 취지로 고백했다. 이 비망록은 재심의 사유가 될까. 법조계는 재심 가능성에 대해 대체로 부정적이다.

부장판사 출신 호제훈 변호사(법무법인 위)는 “한씨의 비망록은 이미 한 전 총리의 1~3심 재판에 증거로 제출됐으며 새로울 게 없는 문건”이라며 “재심이 열릴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고 말했다. 형사소송법상 한씨나 다른 증인의 허위 증언 등이 다른 사건의 확정판결로 증명돼야만 재심이 가능하다. 설령 새로운 증거가 발견되더라도 기존 판결의 유ㆍ무죄를 뒤집을 만큼 명백한 수준이어야 한다.

과거 이 비망록을 증거로 제출받은 한 전 총리 사건 재판부 중 1심만 2011년 한 전 총리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2심과 대법원은 모두 한 전 총리를 유죄(징역 2년)로 판단했다.  판결문에 따르면 1심은 한씨가 재판이 시작되자 검찰 진술을 뒤집은 것과 한 전 총리와 자금을 주고 받을 만큼의 친분 관계가 맞는지에 의문을 제기하며 자금 수수를 인정하지 않았다.

비망록 과거에도 제출됐지만 '유죄'

뉴스타파가 입수했다고 보도한 한씨의 비망록 [뉴스타파 보도 캡처]

뉴스타파가 입수했다고 보도한 한씨의 비망록 [뉴스타파 보도 캡처]

하지만 2심은 한씨가 말을 바꾼 게 오히려 주변인들의 진술이나 다른 증거들과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여행용 가방에 3억원을 넣어 한 전 총리 집 근처에서 차에 직접 실어드렸다”는 건설업체 직원의 진술과 채권회수목록, 여행용가방 영수증, 자금조성 내역 등이 자금 수수의 신빙성을 높여준다고 봤다.

경리직원은 총괄장부에 기재된 ‘한’과 채권회수목록 세부자료에 적힌 ‘의원’이라는 단어가 한 전총리를 지칭한다고 진술했다. 이는 자금 조성 내역이 담긴 B장부에 적힌 날짜와도 연결됐다. 한씨가 발행한 1억원권의 수표를 한 전 총리의 동생이 전세자금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한 전 총리가 한씨와 사업가를 함께 총리공관으로 초대해 만찬을 즐긴 점이나 한씨 아버지가 한 전 총리에게 시세보다 싼 보증금을 받고 사무실을 임대해준 점, 한 전 총리가 고마움의 표시로 한씨 부자에게 넥타이를 선물한 점 등을 봤을 때 두 사람이 서로 금품을 주고 받을 정도의 사이였다고도 판단했다. 결국 2심은 "한 전 총리가 납득하기 어려운 변명을 한다”며 징역 2년을 선고했고, 대법원이 이를 확정했다.

위증 재판부 "나라가 소모적 진실공방 빠져"

이후 한씨는 법정에서 거짓말을 한 혐의로도 재판을 받았는데 2016~2017년 진행된 세 번의 재판에서 모두 유죄가 나왔다. 이 재판에서도 한씨의 비망록은 증거로 제출됐다.

당시 1심 재판부는 한씨가 진술을 뒤집은 데 에 대해 “회사 채권자들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을 것이 예상돼 기존 진술을 번복해 그 비난을 피하고 허위 증언을 함으로써 한 전 총리에게 유리한 판결을 선고받게 하고, 그 대가로 출소 후 한 전 총리의 도움을 받아 사업 재기를 도모하려는 생각”이라고 판단했다. 옥중 비망록은 진술을 번복하면서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거짓으로 꾸며냈다는 게 검찰과 재판부의 관점이었다. 한씨가 동료 수감자들과 진술 번복을 모의했다는 재소자 진술도 나왔다. 재판부는 “한씨의 발언 때문에 당시 대한민국 전체가 소모적인 진실공방에 빠졌다”며 꾸짖기도 했다.

"공수처로 수사" vs "공수처가 만능인가"

한 전 총리에 대한 재심 가능성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수사에 관여한 검사나 사법경찰관이 직무에 관한 죄로 확정판결을 받은 경우도 재심 청구가 가능하다. 당시 수사팀이 한씨를 회유 또는 협박해 진술을 받아낸 혐의로 기소돼 유죄가 확정되면 한 전 총리의 재심이 이뤄질 수도 있다. 부장판사 출신 여상원 변호사(법무법인 로고스)는 “확정판결을 받을 수 없을 때라도 수사팀의 강압이나 직권남용에 대한 사실 증명이 이뤄지면 재심 사유가 된다”고 했다.

하지만 수사팀의 회유ㆍ협박을 증명할 증거도 찾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과거 한씨는 법정에서 진술을 번복하면서도 “검찰에서는 강압수사나 증인을 힘들게 하거나 이런 적은 전혀 없습니다. 편안한 상태에서 너무 잘해주셔서 그 점에 대해서는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여권 일각에서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나 국정조사를 통한 재조사도 거론된다. 이날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은 "한 전 총리 사건이 공수처 수사 범위에 들어가는 건 맞다”고 MBC 라디오에서 밝혔다. 이에 대해 여 변호사는 “공수처가 만능도 아니고 이미 공소시효가 지난 사건을 재조사하긴 어려우며 국정조사 역시 정치적 부담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내다 봤다.

박사라 기자 park.sar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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