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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신자유주의로는 진보 독주 못막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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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고현곤 기자 중앙일보 편집인
고현곤 논설실장

고현곤 논설실장

온건 보수를 자처해온 친구가 4월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을 찍었다.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딸이 공기업에 계약직으로 다녀. 문재인 대통령이 ‘임기 내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를 약속했잖아. 정부·여당에 힘을 실어줘야 딸에게 1%라도 희망이 생겨. 가능성 0%인 야당보다는 낫지.”

정부·여당 ‘없는 자’ 편 자리매김 #서구에선 용도 폐기한 신자유주의 #보수, 눈치 못채고 매달리다 몰락 #‘따뜻한 시장’의 새 경제철학 필요

그는 보수·진보 담론이나 포퓰리즘 논란에 더는 관심이 없었다. 딸을 정규직으로 전환해준다면 바랄 게 없다는 눈치였다. 정규직 전환이 말처럼 간단치 않고, 외려 지난해 비정규직이 87만명 늘었다고 해도, 그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어느새 비정규직 750만명과 그 가족은 정부·여당을 응원하고 있었다.

21대 총선에서 여당이 압승한 요인으로 ‘코로나 대처를 잘해서’ ‘야당이 너무 못나서’ 등의 분석이 나왔다. 하지만 표심을 지배한 건 역시 먹고사는 문제다. ‘어느 당이 이겨야 내게 도움이 되느냐’. 지극히 개인적이고, 현실적인 이 질문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종합부동산세를 보자. 정부·여당은 세율을 0.1~0.8%포인트 올리려 한다. 야당은 1주택자의 세 부담 상한선을 낮추자는 입장이다. 어느 당에 마음이 끌릴까? 지난해 종부세를 낸 사람은 59만명이다. 가족을 포함해도 종부세 영향권은 200만명쯤이다. 나머지 5000만명은 올리든 말든 상관없다. 아니, ‘비싼 집에 살면 세금 좀 더 내야지. 못 내겠으면 집을 팔든지’라고 생각한다. 종부세에 관한 한 200만명만 야당 편이다.

정부·여당은 다수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현금 살포 같은 좌파 특유의 포퓰리즘에다 편 가르기, ‘남 탓’을 절묘하게 섞어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정부가 추진 중인 전 국민 고용보험제는 또 다른 취약계층을 같은 편으로 끌어들일 것이다. 급작스러운 고용보험 확대의 부작용을 걱정하면 ‘탐욕스런 보수’로 낙인 찍힌다. ‘진보는 없는 자, 약한 자의 편’이라는 프레임이 짜여 있다. 이 구도를 깨지 못하는 한 보수는 필패다. 경제가 어려우면 없는 자, 약한 자는 늘어난다. 민생이 파탄 날수록 정부·여당은 책임을 지는 게 아니라 지지층을 넓히는 묘한 구조가 됐다. 진보가 전국 선거에서 4연승한 결정적 이유다.

반면 보수는 서구에선 이미 용도 폐기한 신자유주의에 매달려 있다. 신자유주의는 작은 정부와 자유시장주의에 기반을 둔다. 1970~80년대 노조 병(病)과 정부 실패로 허덕이던 서구 자본주의를 구해냈다. 여세를 몰아 소련이 이끄는 공산체제도 무너뜨렸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이후 양극화와 불평등이 심화됐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시장이 실패하자 각국 정부가 개입했다. 신자유주의는 설 땅을 잃었다. 2011~12년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 시위는 ‘1대99 사회’를 문제 삼았다. 신자유주의에 종언을 고한 상징적 사건이었다. 트럼프는 이 흐름을 간파했다. 신자유주의 대신 ‘러스트 벨트(쇠락한 공업지대)’ 부활과 신고립주의, 보호무역을 내세우며 집권했다.

올해 코로나 사태는 큰 정부, 반(反)시장, 탈(脫)세계화 추세를 공고히 했다. 각국은 코로나로 멈춘 시장에 개입하고, 리쇼어링(reshoring, 해외투자의 본국 유턴)에 주력한다. 곳곳에서 배타적 국수주의와 독재의 불길한 그림자가 감지된다. 양극화의 민낯도 드러났다. 부유층은 호화 요트와 최첨단 벙커에 안전하게 도피하고, 저소득층은 붐비는 지하철에서 집세를 걱정한다. 그럴수록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감은 커졌다.

우리나라 보수만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고장 난 레코드판처럼 성장, 감세, 친기업, 민영화를 외쳤다. ‘분배보다 성장이 먼저다’ ‘시장에 맡기고 작은 정부를 추구하자’ ‘세금을 줄여 민간에 활력을 불어넣자’ ‘노동 유연성을 높여야 일자리가 늘어난다’. 맞는 얘기다. 하지만 국민은 염증을 느낀다.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성장하면 정말 내게 과실이 돌아올까. 시장에 맡겨두면 승자가 독식하는 건 아닐까. 노동 유연성을 높이면 해고가 늘지 않을까.

정부·여당은 불안한 민심을 파고들었다. 저성장, 불평등, 중산층 붕괴를 신자유주의와 보수의 탓으로 돌렸다. 총선 압승 이후 이익공유제, 토지공개념 같은 자유시장주의에 반하는 개념에 군불을 지피고 있다. 시장에서 밀려난 많은 국민은 벌써 마음이 끌린다. 이번에도 정부·여당은 다수의 편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 채 게임을 시작한 것이다.

일찌감치 장하준 교수가 신자유주의를 비판했다. 주류 경제학자들은 그를 ‘별종’이라고 폄하하며 애써 외면했다. 2012년 대선 때 김종인 전 의원이 들고나온 경제민주화는 모처럼 보수가 신자유주의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였다. 경제민주화는 자유시장경제에서 발생한 과도한 빈부 격차를 조정하자는 주장이다. 경제학 책에도 없는 얘기였지만, 국민은 따뜻한 보수에 기대를 걸고 박근혜 대통령을 뽑았다. 그때 진작 보수는 눈치챘어야 했다. 신자유주의에만 매달려선 필패라는 것을. 비정한 시장을 도려내고, 따뜻한 시장을 기반으로 한 새 경제철학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게 궁극적으로는 위기의 자유시장경제를 지키는 길이라는 것을.

고현곤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