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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민모임’의 광화문 한글현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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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강혜란 기자 중앙일보 문화선임기자
강혜란 대중문화팀 차장

강혜란 대중문화팀 차장

“문화재청은 객관적 절차를 다 밟았지만, (국민이) 훈민정음 꼴의 가치도, 광화문 현판 글씨 역사도 잘 모른다. SNS 시대니까 충분한 논의의 장을 만들어 정책을 움직이는 데 필요한 시민의 힘을 보여주겠다.”

최근 서울 광화문 인근에서 열린 ‘광화문 현판을 훈민정음체로’ 시민모임(이하 ‘시민모임’) 기자간담회에서 나온 말이다. 이들은 올 가을 한글날까지 한글 현판 교체와 관련된 문화재청의 답변을 듣겠다며 500만 서명 운동을 제안했다. 훈민정음 해례본 서체로 재구성한 현판 모형(오른쪽 사진)도 선보였다. 이들은 “한자 문화재를 다 한글로 바꾸자는 건 아니다”면서 “광화문 광장의 역사적 의의와 상징성을 새로운 세대와 공유하기 위해” 훈민정음체 현판 필요성을 역설했다.

노트북을 열며 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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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론 이날 선보인 현판이 현대적이고 신선해 눈길이 갔다. 이런 ‘오브제’를 갖고 노는 문화예술운동도 의미 있다고 본다. 혹은 광화문 현판을 원점에서 재검토하는 시점이라면 경청할 만한 주장이다. 2010년 현판 재제작이 결정됐을 때처럼 말이다. 이후 관련분야별 의견수렴(문화재, 문화관광, 국가브랜드, 언론 등)과 공청회(1회), 토론회(4회), 관련단체 간담회(2회), 자문회의(3회) 등을 거쳐 2012년 고종 중건 당시 임태영 글씨(한자)로 결론 났다. 검은 바탕 금박 글씨(왼쪽)로 제작이 거의 완료돼 거는 일만 남았다.

당시 회의록에 가장 많이 나오는 게 ‘문화재 원형 복원’ 원칙이다. 1999년 개정된 문화재 보호법 제3조(문화재의 보존·관리 및 활용은 원형유지를 기본원칙으로 한다)에 준거한다. 앞서 97년 공표된 ‘문화유산헌장’도 ‘문화유산은 원래의 모습대로 보존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2005년 4월 경복궁 복원정비 계획에 따라 문화재위원회가 광화문 현판 교체를 결정했을 때도 ‘원형 복원’을 내세웠다. 1968년 한글로 내걸렸던 박정희 대통령 친필 휘호는 설 자리를 잃고 철거됐다.

시민모임은 “마지막 교체 찬스”라고 주장하지만 SNS 청원이 문화재보호법을 우선할 수 없고 경복궁 복원이라는 큰 그림에서 정문 현판만 떼놓는 것도 사리에 맞지 않다. 2012년 회의록에서 강조된 ‘정책 일관성’ ‘갈등 최소화’ 등은 여전히 유효한 가치다. 수차례 거듭된 고증은 ‘원형의 신뢰도’를 깎는 게 아니라 우리 문화재 복원 역량이 그만큼 성숙했다는 증거다. “이미 들어간 국고(약 3억5000만원)가 대수냐. 한글 현판은 3조5000억원 이상 부가가치를 낼 것”이라는 주장을 일개 시민이 해도 놀라울 판에 전직 국가건축정책위원회 위원장 등을 아우르는 문화예술계 명사들이 하고 있다. ‘시민’ 이름 뒤에 숨는 전문가의 책임의식이 아쉽다.

강혜란 대중문화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