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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연의 타락은 불가피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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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고정애 기자 중앙일보
고정애 정치에디터

고정애 정치에디터

인간의 모든 혁명은 반드시 그것의 당초 약속을 배반하게 되는가. 모든 혁명의 성과는 권력에 주린 지배 엘리트의 손에 반드시 장악되는가. 권력의 타락은 인간 사회의 불가피한 조건들인가.

16년 전 정대협 고발한 피해자 #그 피해자를 배제한 정대협 #성역이 된 권력의 변질 씁쓸

조지 오웰이 숙고한 주제다. ‘혁명의 배반’이다. 『동물농장』(도정일 역)은 그 결과다. 더 나은 세계를 외쳤던 이들이 독재집단으로 타락하기까지다. 흘려 넘겼던 순간이 변곡점이 됐다. 모든 걸 공유하겠다던 그들(돼지)이 사과와 우유를 자신들의 몫으로 빼돌렸을 때였다.

“우리(돼지)는 밤낮으로 여러분의 복지를 보살펴야 합니다. 그러므로 돼지들이 우유를 마시고 사과를 먹어야 하는 건 바로 ‘여러분의’ 이익을 위해섭니다. 돼지들이 그 의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되면 어찌 되는지 아십니까? 존스(인간인 전 농장주)가 다시 오게 돼요. 존스가!”

일본군 위안부 출신 심미자 할머니의 역정을 탐문하면서 떠오른 얘기다. 정의기억연대(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포함) 논란이 이어지는 와중 심 할머니가 2004년 1월 32명의 할머니들과 함께 발표한 성명(‘위안부 두 번 울린 정대협, 문 닫아라’)이 주목받았다. 정대협을 향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안부 할머니들을 역사의 무대에 앵벌이로 팔아 배를 불려온 악당”이라고 비판하는 내용이다. ‘세계평화무궁화회’ 명의였다.

덜 알려진 일화 중엔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에게 심 할머니가 띄운 글도 있다. 2004년 9월 이 전 교수가 MBC토론 프로그램에서 위안부 발언을 했다가 사회적 지탄을 받던 때였다. 심 할머니는 ‘세계평화무궁화회 33인의 대표’로 자신을 소개하며 이런 취지의 글을 남겼다.

서소문 포럼 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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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대변하고 있다는 정대협이나 나눔의 집이란 사이비단체에서 우리를 발길로 차서 내쫓아놓고 (우리의) 인권과 명예를 짓밟고 우리를 시궁창에 차버리곤, 반인륜적 반도덕적으로 우리의 목을 조이고 있다. (중략) 정대협이나 나눔의 집에 가서 마음에 없는 사과를 하지 말고 (위안부 할머니란) 역사적 산증인을 만나달라. (우리와) 뜻이 같으면 힘없이 죽어가는 우리들을 도와 달라. 지푸라기라도 잡고 애원하고 싶은 심정이다.”

사실 심 할머니는 1990년 한 월간지 인터뷰(‘치욕과 절망의 삶 극복, 나라의 독립 위해 산 심미자 할머니’)를 통해 위안부 출신임을 조심스럽게 공개했다. 최초 증언자로 알려진 김학순 할머니보다 한 해 앞선다. 그러다 91년 10월 라디오에서 “위안부는 민간업자가 데리고 간 것이지 일본군은 관여하지 않았다고 일본 정부가 주장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곤 방송국에 항의전화를 했다.

심 할머니와 10여 차례 인터뷰를 한 이토 다카시는 “이때부터 할머니의 긴 싸움이 시작됐다”며 “집회나 시위 장소엔 언제나 심 할머니의 모습이 보였다”(『기억하겠습니다』)고 했다. 13년 걸려 일본의 최고재판소에서 일본군 위안부란 결정을 받은 것도 그 하나였다. 그런 심 할머니가 평소했다는 말이다. “나는 일본군 위안부였다는 게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만든 일본이 나쁘지 나는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다.”

이토에 따르면 90년대 초만 해도 심 할머니와 정대협은 동행했다. 정대협이 산하에 ‘무궁화자매회’의 결성을 제안했고 할머니들의 투표를 통해 심 할머니가 회장으로 선출됐다. 심 할머니는 수요시위에서 마이크를 잡곤 했다. 그러다 94년 5월 심 할머니가 모임을 관두겠다고 했고 정대협과 결별했다. 이후엔 내부고발자의 길을 걸었다. 2008년 작고한 심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에 대해 한 지인은 “퇴촌에서 혼자 숨어 살며 유언장(7000쪽 분량)을 썼다”고 했다.

이제 정의연은 권력이면서 성역이 됐다. 활동가들이 장관이 되고 국회의원이 됐다. 사실상 견제받지 않았다. 정의연을 향한 비판은 ‘친일’로 매도되곤 해서다. 근래 의혹을 보면 그러나 정의연도 절대 권력의 항로를 따라간 듯하다. ‘피해자’를 말해왔지만 사실은 ‘일부 피해자’, 특히 자신들의 뜻을 따르는 ‘피해자’와 함께했음이 드러나고 있다. 자신을 거스르면 설령 피해자(심 할머니)라도 피해자를 기리는 조형물(‘기억의 터’)에서 배제했다. 진실을 자신들이 규정했다. 심 할머니가 16년 전 고발했고, 이용수 할머니가 다시 고발한 바다. 선의였고 정의였던 단체의 변질이다.

『동물농장』의 끝은 이렇다.

“그래, 맞아, 돼지들의 얼굴에 무슨 변화가 일어났는지 이제 알 수 있었다. 창밖의 동물들은 돼지에게서 인간으로, 인간에게서 돼지로, 다시 돼지에게서 인간으로 번갈아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누가 돼지고 누가 인간인지,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이미 분간할 수 없었다.”

고정애 정치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