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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살 소녀는 왜 듣지 못하는 아이가 되고 싶었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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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가족 중 유일하게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열한살 소녀 보리(김아송)의 엉뚱한 소망을 통해 ‘다름’의 문제를 풀어가는 성장영화 ‘나는보리’. 부모가 농인인 김진유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다. [사진 영화사 진진]

가족 중 유일하게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열한살 소녀 보리(김아송)의 엉뚱한 소망을 통해 ‘다름’의 문제를 풀어가는 성장영화 ‘나는보리’. 부모가 농인인 김진유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다. [사진 영화사 진진]

21일 개봉하는 ‘나는보리’(감독 김진유)는 소리가 보이는 영화다. 전기밥솥 소음, 시계 알람, 바닷가 파도 소리가 돋보기 들이댄 듯 확대돼 다가온다. 가족 중 유일하게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열한살 소녀 보리(김아송)의 눈과 귀로 세상을 감각하기 때문이다. 소리만큼이나 눈빛과 손짓도 크게 다가온다. 수어(手語, 농인들의 수화를 언어로 분류한 표기)로 희로애락을 표현하는 부모와 남동생 틈에서 ‘나만 다르다’라며 외로워하는 보리의 고민이 눈높이로 전해진다.

청각장애인 부모 둔 김진유 감독 #가족체험 녹인 성장 영화 ‘나는보리’ #‘다름’을 받아들이는 아이의 시선 #한국 영화지만 한글 자막 달아

들리지 않으면 나도 가까워질 수 있을까. “소리를 잃고 싶다”는 엉뚱하지만 간절한 소망을 이처럼 천진하게 빚어낼 수 있는 것은 김진유(32) 감독 본인이 ‘코다’ 출신이기 때문이다. 코다(CODA, Children of Deaf Adults)란 농인 부모 밑에서 태어난 자녀를 뜻한다. 주인공 보리처럼 강원도 주문진에서 자란 김 감독 역시 집에선 수어를, 학교에선 음성 언어를 쓰며 살았다. 부모님이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게 별다르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초등학교 때 소풍 가서 학부모·친구들 앞에서 사회를 보기 전까지는.

고향 강원도 주문진의 풍경에 담은 우화

“그제야 내가 하는 이야기를 부모님은 못 알아들으실 텐데 싶었어요. 평소엔 크게 다른 게 없거든요. 다만 저도 보리처럼 부모님 대신 배달음식을 주문하고, 택시 보조석에 앉아 길을 설명했지요. 가족과 영화관에 간 기억이 없는 게 좀 다른 경험일까요?”

18일 서울 서소문 중앙일보에서 만난 김 감독은 보리의 남동생 정우(이린하)를 연상케 하는 함박웃음을 자주 보였다. 정우가 축구를 좋아한다는 설정 등 영화 전체에 자전적 경험이 녹아들었다. 직접적으론 수년 전 한국농아인협회에서 주최한 ‘수어로 공존하는 사회’ 행사에서 만난 농인 수어통역사 현영옥씨의 고백이 계기가 됐다.

‘나는보리’의 김진유 감독.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나는보리’의 김진유 감독.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어렸을 때 엄마, 아빠와 똑같아지고 싶어서 소리를 잃고 싶었고, 결국 그렇게 돼서 행복하다”는 현씨 말에 자신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 걸 떠올렸다. 강릉단오제에 놀러 갔다가 길을 잃었을 때 부모님이 안내방송을 듣지 못하니 막막했던 경험, 옷가게 점원이 농인이라고 흉보며 어머니에게 바가지 씌운 기억 등이 새록새록 살아났다. 영화는 이런 실제 애환을 보리의 비밀작전에 맞물려 따뜻한 웃음기 속에 녹여냈다.

“어렸을 때부터 일반적인 영화들이 농인을 비롯한 장애인을 그리는 방식이 공평하지 않게 보였어요. 측은하게 몰아감으로써 그 자체로 소비해버리는 듯한? 실제론 똑같은 사람들이거든요. 이웃에 살 지 모르는 농인 가족, 지체장애인 가정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어요.”

“소리를 잃고 싶다는 소망, 저도 가졌죠”

소리를 잃고 싶다는 보리의 소망을 이뤄주기 위해 적극 노력하는 은정(황유림)의 모습엔 어릴 적 자신을 이해해준 친구들이 한데 들어있다. 수업시간에 선생님 말을 듣질 못하니 책상에 엎드려 자는 정우의 모습엔 김 감독이 수년간 만나온 소외계층 풍경도 녹아 있다.

“2013년부터 미디어교육 보조강사 일을 했어요. 전국 방방곡곡의 한부모 가정이나 폐교 직전인 촌락의 학교 등을 다니며 컴퓨터 수업을 도왔는데, ‘폴더’ 만드는 방법을 모르는 아이도 있더라고요. 또래에서도 교육 격차가 큰 거죠. 영화 속 바닷가 아이들 일상이 ‘응답하라’ 시리즈처럼 먼 얘기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여전한 현실을 간접적으로 담았습니다.”

200여 명 중 오디션을 거쳐 보리로 발탁한 김아송과 황유림·이린하 등 아역배우들은 연기뿐 아니라 처음 배운 수어도 생생하게 체화했다. 부모 역할 배우들과 처음 만난 날, 감독은 미리 아역배우 부모님들의 동의를 구해 마치 두 배우가 실제 농인인 양 소개했다고 한다. “1시간가량 손짓과 눈빛으로 대화하려 애쓰는 모습들에서 아이들이 영화 속 캐릭터와 하나가 된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고. 스턴트맨 출신으로 다큐영화 ‘우린 액션배우다’(2008) 등에서 액션 연기를 주로 선보인 곽진석은 눈빛만으로 진한 부성애를 전하는 감성연기를 너끈히 소화했다. 실제 부부인 허지나와 집에서도 연기하듯 생활하듯 준비했다고 지난 12일 언론 간담회에서 밝혔다.

스턴트맨 출신 곽진석, 아내와 동반출연

“들리든 안 들리든 우린 똑같아.” 보리의 고민에 이렇게 답하는 엄마의 수어는 그 어떤 굉음보다 크게 관객에게 메아리친다. ‘나는보리’라는 제목은 ‘보리가 난다(성장한다)’라는 뜻과 ‘보리라’ 즉 본다는 의미를 함축한다고. 아름답게 다듬어진 가족 이야기이자 성장 우화, ‘다름’에 대한 깊은 시선으로 2018년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감독조합 감독상 수상 등을 받았다. 한국농아인협회 주최 제20회 가치봄영화제는 대상을 수여하면서 “장애인, 비장애인이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고민을 담아 큰 공감을 줬다”고 평했다.

2013년 단편 ‘높이뛰기’로 주목받은 김 감독은 차기작으론 20대 여성 농인과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사랑 혹은 바다를 두고 서핑과 생계를 각각 영위하는 사람들 이야기 등을 준비하고 있다. 그의 손에 끌려 영화를 나란히 본 아버지·어머니는 “별말씀 없이 쿨한 반응이었다”고. 농인 관객도 편히 볼 수 있도록 한국 영화임에도 한글 자막을 달고 상영된다.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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