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김호정의 왜 음악인가

아름답다고 다가 아닌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4면

김호정 기자 중앙일보 기자
김호정 문화팀 기자

김호정 문화팀 기자

20여년 동안 다소 잘못 전해진 이야기가 있는데, 이스라엘 국적의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사진)의 바그너 연주에 대한 것이다. 바렌보임은 2001년 세계적 이슈였다. 이스라엘 연주에서 앙코르로 바그너 ‘트리스탄과 이졸데’ 전주곡을 연주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서 바그너의 연주는 불문율로 금지됐다. 히틀러가 바그너의 음악을 열렬히 사랑했고 정치적 배경음악으로 사용했다는 이유에서다.

히틀러 출생 8년 전 세상을 떠난 바그너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물론 바그너가 생전에 남긴 글은 유대인의 음악과 인간성을 원색적으로 비난하고 있다. 하지만 멘델스존, 마이어베어처럼 당시 큰 성공을 거둔 유대인 음악가를 견제하기 위한 정도의 기고를 유대인 학살까지 연결시키는 건 과도할 수도 있다. 그의 음악은 미학적 관점에서 인정하고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연주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수십 년 동안 한 작곡가의 음악을 전혀 듣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폭력이 아닐까. 이런 논리가 바로 바렌보임의 바그너 연주에서 강조된 측면이었다.

다니엘 바렌보임

다니엘 바렌보임

하지만 이런 이유는 바렌보임을 포용과 화해의 음악가로 부르기에 완전하지 못하다. 이스라엘에는 아직도 학살의 고통을 상처로 간직한 사람들이 있다. 홀로코스트의 희생자와 후손이다. 아우슈비츠에서 바그너 ‘로엔그린’이 흘러나왔다든지 학살의 순간에 ‘탄호이저’ 순례자의 합창을 틀었다는 증언도 있었다. 유대인 학살을 정당화하는 선전 영화에도 바그너가 사용됐다. 사람의 기억을 환기하는 음악의 특성은 필연적이다. 따라서 바렌보임의 바그너 연주는 사람의 고통에 무심했다. ‘관행에 맞선 용감한 예술인’이라는 수식어는 일정 부분 수정돼야 마땅하다.

20년 전의 일을 떠올린 것은 이달 초 나온 한 책 때문이다. 지난해 『반일종족주의』라는 문제작을 냈던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는 『반일종족주의와의 투쟁』이라는 후속편을 냈다. 11일 기자간담회에서 확인한 그의 신념은 확고했다. “일본국 위안부의 대부분은 당시 합법이었으며 비정한 아버지, 포주, 중개업자가 함께 연출한 그 시대의 고유한 역사적 현상이었다.” 경제사학자로서 그는 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한 끝에 기존의 관념을 뒤집었다. “평생 학문을 업으로 살아온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이라고 했다.

학자의 연구에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은 없었다. 호주의 계약에 의한 것이었고 성매매 산업의 긴 역사 속 부산물이면, 실제로 존재했던 인간의 고통은 무시해도 좋은 것인가. 이 전 교수의 말과 글에서 그에 대한 답은 찾지 못했다. 바렌보임의 바그너 연주도 마찬가지다. 아름답고 완성도 높은 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타인의 비극에 무심할 이유가 될 수 있을까. 불행에 대한 공감은 학술 연구, 명작 해석에 우선한다. 당연한 만큼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김호정 문화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