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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윤영관의 퍼스펙티브

2020년대는 세계 정치·경제 패러다임의 대전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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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코로나19와 국제 질서 변화 

1930년대 미국 대공황 당시 거리 구직에 나선 미국 실업자들. [중앙포토]

1930년대 미국 대공황 당시 거리 구직에 나선 미국 실업자들. [중앙포토]

코로나19 팬데믹이 세상을 흔들고 있다. 매일매일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초현실적인 소식이 현실로 다가온다. 세상은 지금 어디에 와 있고,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세계 질서의 두 가지 장기 추세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선진자본주의 국가들 내부의 경제 불평등 심화와 미·중 경제력 격차의 소멸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이러한 추세를 확인하고 가속한 중대 사건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소외계층의 정치적 불만 커져 #코로나가 보호주의·탈세계화·디커플링·각자도생 가속 #미국은 의지 없고 중국은 역량 안돼 국제 리더십 실종 #미·중, 상호 공생 방식 못 찾으면 파국의 길 치달을 것

자본주의가 진화해온 궤적을 보면 1930년대와 1970년대는 패러다임의 대전환기였다. 1870년대에서 1차 세계대전까지 유럽 자본주의는 정부의 경제 개입은 최소화하고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자는 자유방임(l’aissez-faire)적 자본주의였다. 그러나 1930년대 대공황의 도전 앞에 정부가 적극 나서서 실업을 구제하고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케인지안(Keynesian) 자본주의가 자리 잡게 됐다. 1970년대에는 경기 침체와 고인플레의 난제 앞에서 케인지안 자본주의는 다시 시장의 역할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neo-liberal) 자본주의로 대체됐다.

흥미로운 점은 미국의 소득 불평등 추이였다. 케인스주의에 기반한 뉴딜정책이 실시되자 미국 상위 10%의 소득 비율은 1930년대 45% 수준에서 1940~70년대 평균 33% 정도로 떨어져 소득 불평등이 확연하게 개선됐다. 그러다가 신자유주의가 본격 추진된 1980년대 초에 상승을 시작해 2015년에는 50% 수준까지 악화했다.

경제적 불평등 여지없이 드러내

1970년대 석유 파동으로 주유소에 장사진을 친 차량들. [중앙포토]

1970년대 석유 파동으로 주유소에 장사진을 친 차량들. [중앙포토]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을 통해 실업을 구제하고 성장과 복지를 동시에 추구한 케인즈주의와 달리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자유시장에 대한 강한 믿음 위에 각종 규제를 대폭 완화하고 경제의 세계화를 추진했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점차 세계화 과정에서 낙오하고 소외당한 사람들의 분노가 쌓이기 시작했다. 많은 미국인은 싼 소비재를 수입하고 일자리를 아웃소싱하는 세계화로 미국 제조업이 망하고 실업도 늘었다고 생각했다. 계층 상승의 사다리도 서서히 무너지고, 기술 발전과 디지털화까지 진행돼 일자리는 더욱 줄었다.

미국 민주주의의 치명적인 약점은 약자들에게 튼튼한 사회안전망을 제공하고 직업 재훈련, 재취업 등을 통해 공생하도록 돕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 그들의 분노가 분출되기 시작했고 정치는 양극화됐다. 그 흐름을 타고 트럼프가 당선되고 각국에서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국내 개혁을 통해 불평등 문제를 근본적으로 치유하려 하기보다는, 손쉽고 인기 있는 방법, 즉 해외에서 적을 찾았다. 트럼프 행정부도 자유주의 국제 질서의 리더 역할을 버리고 미국우선주의, 보호무역, 반중 노선으로 나아갔다.

지난 16일 코로나19에 따른 경제 봉쇄가 풀리자 영업을 재개한 미국 의 한 음식점.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16일 코로나19에 따른 경제 봉쇄가 풀리자 영업을 재개한 미국 의 한 음식점. [로이터=연합뉴스]

코로나19 팬데믹은 경제적 불평등의 현실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올 4월 미국 하위 소득자의 53%가 주택 임대료 지불 불능 상태이고 흑인의 코로나19 사망률이 백인보다 2.6배 높다. 코로나19는 이처럼 경제적 약자들에게 극심한 타격을 주었고 그 결과 불평등은 더욱 심해질 것이다. 또 높은 전염력과 치사율 때문에 아무리 빨라도 18개월 걸린다는 백신이 개발되기까지 록다운과 봉쇄정책은 반복될 것이다. 그래서 V자형 회복은 어려울 것이다.

또 다른 장기 추세는 미·중 경제력 격차의 소멸이다. 중국은 1978년 말 개혁개방 추진 이래 경제가 급성장했다. 경제력이 성장하면 그다음 정치·군사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이 상승 대국들의 공통 현상이었다. 미국과의 경제력 격차가 줄고, 2008년 세계 금융 위기로 미국의 허약한 모습이 드러나니까 중국은 도광양회(韜光養晦) 외교 전략을 버리고 공세 외교로 전환했다.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일대일로, 남중국해 영유권 주장 등이 그 사례다.

자유주의 국제 질서 종언 고해

1979년 수교 이래 미국인들은 중국을 포용하면 중국의 제도·관행·가치 등이 서구민주주의 쪽으로 수렴하리라고 기대했었다. 그런데 시진핑 주석이 권위주의 정치와 공세 외교를 강화하자 배신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미·중 관계는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14일 폭스비즈니스 인터뷰에서 “중국과의 모든 관계를 끊을 수 있다”고 말할 정도로 최악의 대결로 치닫고 있다.

국제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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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대는 1930년대, 1970년대에 맞먹는 세계 질서 패러다임의 대전환기가 될 것이다. 새로 등장할 자본주의는 어떻게 정부·시장 관계를 정립할지 미지수다. 다만 최근 위기상황 속에서 각국은 엄청난 예산을 경제살리기에 투여하는 등 케인스주의적 정책들을 채택하고 있다. 그리고 자유주의 국제 질서는 종언을 고했다. 최근 이코노미스트지는 올해 세계 상품 무역은 10~30% 감소하고 다국적기업의 초국경 투자는 3분의 1 감소할 것으로 예측한다. 대신 보호주의, 탈세계화, 디커플링, 각자도생의 시대가 오고 있다. 올 연말 바이든이 당선돼도 획기적 개혁으로 소외계층의 불만을 잠재우고 과거 자유주의 질서로 복귀하자고 호소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무엇보다 코로나19 팬데믹과 경제 위기라는 엄청난 도전을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국제적 리더십이 실종된 것이 안타깝다. 미국은 의지가 없고 중국은 역량이 안 되는데 서로 갈등하고 있다. 결국 미·중 관계는 신냉전기를 거쳐 안정적인 상호 공생의 방식을 찾든지, 아니면 1930년대 후반처럼 파국의 길로 치달을 것이다.

한·미 동맹 전제 아래 중국과도 우호 유지해야

4·15 총선 결과는 한국 정치 이념의 추가 보수에서 진보로 이동했음을 보여줬다. 중도보수에 속하던 유권자의 복지 문제에 대한 태도 변화도 감지된다. 이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속에서 소외계층의 불만 증대가 정치 지형을 바꾸는 세계적 추세와 맥이 닿아 있다.

이같이 험난한 미래 질서 속에서 한국은 어떻게 생존 번영할 것인가? 먼저 보호주의 강화로 수출 주도 경제발전전략의 기본 전제가 무너지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5월 첫 10일간 한국의 수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46% 감소했다. 문제는 이것이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결국 무역의존도를 줄이고 내수를 늘리면서, 기업 환경 개선으로 해외투자기업들의 귀환을 유도해 국내 일자리를 늘려야 한다.

유연성, 사회 통합, 경쟁력을 높이는 정치·경제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공정경쟁 관련을 제외한 기업 규제를 대폭 완화하고 노동시장 개혁으로 유연성을 높이며, 사회안전망을 대폭 강화해 사회적 약자들을 품어야 한다. 특히 고용보험의 확대 정착은 창의적 자본주의의 생태 조성에 중요하다. 젊은이들이 공무원 시험에 몰리는 이유는 일반직장보다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민간 분야에서도 고용보험 확산을 통해 최소한의 직업 안정성이 보장돼야 혁신을 위한 모험이 가능하다. 또 혁신성장으로 세계 최고의 기술과 업종을 다수 확보해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 이런 시스템을 만들려면 노사정합의체 확립이 필수적이다.

미·중이 부딪치고 있는 상황에서 외교적으로도 뱀 같은 지혜가 필요하다. 서둘러 어느 한쪽을 택일하면 득보다 실이 크다. 한·미 동맹의 대전제 아래 중국과 우호를 유지하는 기존 전략을 유지하되, 미·중이 한반도 문제만큼은 상호협력하도록 지혜를 짜내야 한다. 그리고 바깥세상이 험할수록 한반도 내부 차원에서는 실속을 챙겨야 한다. 난관이 많으나 남북이 상호 실용적, 실리적 관점에서 관계를 개선하는 노력을 지속하자. 성공적 K방역의 긍정적 이미지를 활용해 인도주의적 대북 보건의료 협력의 타당성을 국제사회에 호소하고 협조를 끌어내는 것도 한가지 방안이다.

윤영관 서울대 명예교수·전 외교통상부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