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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속 첫 골프대회, 주인공은 프로 첫 우승 박현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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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17일 최종 라운드에서 샷을 하는 박현경. 선두에 3타 뒤지다가 역전으로 생애 첫 우승을 차지했다. [사진 KLPGA]

17일 최종 라운드에서 샷을 하는 박현경. 선두에 3타 뒤지다가 역전으로 생애 첫 우승을 차지했다. [사진 KLPGA]

동료들은 우승자에게 물 대신 장미꽃잎을 뿌렸다. 물을 뿌리려고 다가 가다가 코로나바이러스가 번질까 우려해서다. 하지만 인터뷰하는 우승자 얼굴은 마치 물세례를 받은 것처럼 흠뻑 젖었다.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KLPGA선수권 마지막날 역전승 #물 대신 장미꽃잎으로 축하세례 #친구 임희정에 3타 지다 뒤집어 #선수로 불운했던 아버지가 캐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속 첫 골프대회에서 박현경(20)이 우승했다. 박현경은 17일 경기 양주 레이크우드 골프장에서 열린 한국 여자프로골프(KLPGA) 챔피언십 최종라운드에서 5언더파, 합계 17언더파로, 합계 16언더파인 친구 임희정(20)에 역전승했다. 아마추어 시절부터 유망주로 꼽혔던 박현경의 프로 첫 우승이다.

우승 트로피에 입맞춤하는 박현경. [사진 KLPGA]

우승 트로피에 입맞춤하는 박현경. [사진 KLPGA]

아버지 박세수(52)씨는 한국 프로골프(KPGA) 투어 선수 출신이다. 둘째가라면 서러울 노력파였지만 불운했다. 골프를 늦게 시작했고 왼손잡이였다. 당시 왼손 클럽은 커녕, 왼손 타석도, 왼손잡이를 가르치는 선생님도 없었다. 오른손으로 각고의 노력을 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박씨는 “1980년대엔 왼손으로 치는 것 자체를 상상할 수 없었다. 돌아보면 오른손으로 친 걸 후회한다. 왼손잡이가 오른손으로 치니 자연스럽지 않았고, 컨디션에 따라 스윙 변화가 심했다”고 회상했다.

박씨는 딱 한 번 우승했다. 1999년 KPGA 2부 투어 대회에서다. 그 우승으로부터 넉 달 뒤에 박현경이 태어났다. 미국 여자프로골프(LPGA) 2부 투어에 진출한 홍예은의 아버지 홍태식(51)씨는 “박세수씨는 주니어 선수 부모 중 가장 성심성의껏 아이를 가르치는 분”이라고 평가했다.

캐디백을 멘 아버지 박세수씨는 KPGA 정회원 출신이다. [사진 KLPGA]

캐디백을 멘 아버지 박세수씨는 KPGA 정회원 출신이다. [사진 KLPGA]

박현경은 공을 잘 쳤다. 국내 72홀 최소타 기록이 그의 것이다. 2017년 송암배 아마추어선수권대회에서 무려 29언더파를 쳤다. 2위보다 8타나 앞섰다. 1년 전 최혜진이 세운 한 대회 최소타 우승 기록(16언더파)보다도 13타가 적었다. 프로에서도 잘할 걸로 기대됐다. 그러나 지난해 조아연, 임희정에 이어 신인상 후보 3위에 그쳤다. 우승을 못 해서다.

기회는 많았다. 지난해 최종전이었던 ADT캡스 챔피언십에서 우승 기회를 잡았다. 마지막 날 1타밖에 줄이지 못해 공동 3위에 머물렀다. KB금융 챔피언십에서도 마지막 날 75타를 치는 바람에 8위로 밀려났다. 하이원 챔피언십에서는 마지막 날 73타를 쳐 4위에 그쳤다. 하이원 챔피언십 우승을 친구인 임희정이 차지했다. 박현경은 “동기들의 우승이 부러웠고 속도 상했다. 지난해 루키 우승이 8번이나 됐는데, 내 것이 없어 아쉬웠다”고 말했다. 박세수씨 마음은 더 아팠다. 박현경에게 기대를 걸었던 스폰서는 1년 만에 떠났다.

코로나19 여파로 동료들은 물 대신 꽃을 뿌렸다. [사진 KLPGA]

코로나19 여파로 동료들은 물 대신 꽃을 뿌렸다. [사진 KLPGA]

이번 대회는 무관중으로 진행됐다. 지난해 우승 기회마다 깔끔하게 마무리하지 못했던 박현경으로서는 나쁠 게 없는 조건이었다. 많은 사람이 지켜본다는 압박감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 등이 상대적으로 덜 할 수 있다. 박현경은 “아마추어와 2부 투어 경기처럼 관중 없는 것에 익숙해 부담이 없었다”고 말했다.

박현경은 선두 임희정에 3타 뒤진 공동 2위로 최종라운드를 시작했다. 2, 3라운드에서만 15타를 줄인 임희정은 3번 홀까지 버디 2개를 잡아 5타 차로 달아났다. 박현경은 포기하지 않았다. 4번 홀 버디로 분위기를 바꿨고, 6, 7번 홀에서 다시 버디를 잡았다. 11~13번 홀 연속 버디로 기어이 2타 차 선두로 나섰다. 그냥 물러설 임희정이 아니었다. 흔들렸던 아이언의 영점을 잡더니, 15번 홀 버디로 한 타 차를 만들었다. 박현경이 지켜내냐 못하느냐의 싸움이었다. 박현경은 17번 홀에서, 어렵지는 않지만 실패하면 망신스러운, 그래서 종종 실수가 나오는 1m 좀 넘는 퍼트를 남겼다. 침착하게 마무리했고, 사실상 경기를 끝냈다.

박현경은 “많이 꿈꿔왔던 순간이 왔다. 1라운드 날 엄마 생신이어서 좋은 선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그걸 이뤘다.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말했다. 또 “안 풀릴 때 캐디를 해주신 아버지 도움이 컸다. 고진영, 이보미 선배와 전지 훈련하면서 멘탈이 많이 좋아졌다. 고진영 선배가 어제 내게 전화를 해 ‘우승하지 말라’고 했다. 욕심내지 말라는 얘기였다. ‘우승 생각하지 말고, 네가 할 수 있는 영역 빼고는 다 하늘에 맡기라’는 말이었다”고 전했다.

양주=성호준 기자 sung.ho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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