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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 ‘라디오 공무원’ 배철수의 장수 비결은?

중앙일보

입력

일상에 내재된 소소한 기쁨… 그는 자신의 행복 지점을 알고 있다

조지선의 심리학 공간

‘배철수의 음악캠프’ 30주년을 맞아 포스터 촬영을 하고 있는 배철수(오른쪽). 사진은 2008년부터 폴 매카트니의 전속 사진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MJ KIM이 찍고 있다. / 사진:MBC

‘배철수의 음악캠프’ 30주년을 맞아 포스터 촬영을 하고 있는 배철수(오른쪽). 사진은 2008년부터 폴 매카트니의 전속 사진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MJ KIM이 찍고 있다. / 사진:MBC

영원한 DJ, 배철수(67)가 음악캠프를 진행한지 30년이 되었다. 1년만 넘기자고 시작한 일이 공무원보다 더 안정된 직업이 되었고, 프로그램을 통해 처음보다 더 빛나는 제2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다. 배철수 음악 인생의 제1 전성기는 하드록밴드 ‘송골매’의 리더 시절이었다. 오늘 BTS가 있다면 1980년대엔 송골매가 있었다. 대한민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에 앨범을 올린 이 밴드는 9집을 끝으로 1991년 해체했다.

1990년 3월 19일에 첫 방송을 내보낸 MBC FM 팝 음악 전문 라디오 프로그램, ‘배철수의 음악캠프’(이하 배캠)와 배철수는 서로의 상징이 되었다. 중년에 인기 전성기를 맞은 사람! 배캠 10주년 즈음 시작된 배철수의 별칭은 그 후 20년간 지속된다. “아직 전성기가 오지 않았다”는 그의 농담이 사실이 돼버렸다. 배철수의 인기는 늘 현재가 최고다. 시간이 갈수록 커지는 존재감, 전무후무한 기록과 대체 불가한 캐릭터로 국내 팝 음악의 기둥이 된 그의 모습에서 송해 선생의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어른거린다.

MBC라디오 PD는 두 종류로 나뉜다. 배캠을 맡아 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그동안 PD가 30명 정도 바뀌었다. 방송 초기에 배철수와 함께 했던 조정선 PD는 음악캠프 10주년 기념행사에서 이런 말을 했다. “형이 10년을 한 건, 정말 기적이야!” 처음 몇 년은 고전했다. 가요를 틀어야 일정 수준의 시청률을 확보할 수 있었던 시기에 정통 팝으로 경쟁하려니 어려움이 따르는 건 당연했다. 개편 때마다 프로그램이 폐지 대상 리스트에 오르곤 했다. 본인도 인정하는 바다. “오래하니까 이젠 좋게 봐주시지만 초반엔 방송과 안 맞는 진행자였습니다. PD는 내가 방송 사고라도 낼까 걱정했고 청취자들이 내가 1년을 넘기느냐 못 넘기느냐로 내기를 했다고 해요.”

‘배칸트’에게 없는 것은 술·담배·저녁약속

배철수(왼쪽에서 둘째)·구창모(넷째) 등이 활동하던 1980년대 초반의 송골매 멤버들.

배철수(왼쪽에서 둘째)·구창모(넷째) 등이 활동하던 1980년대 초반의 송골매 멤버들.

그런데 20주년을 보내고 다시 30주년을 맞았으니 놀랄 일이다. 장수의 비결은 무엇일까? 다양한 인터뷰에서 그가 거듭 밝힌 이유는 다음 몇 가지로 요약된다. 운이 좋았고 건강했다. 덕분에 펑크를 낸 적도, 지각을 한 적도 없다. “그 다음에는 성실함이에요. 내 입으로 성실하다고 한다면 좀 그렇지만 지내고 보니 내가 성실한 사람이더라구요. 내 생활의 대부분은 ‘배철수의 음악캠프’에 맞춰져 있습니다.”

그는 다양한 별명을 얻었다. 배칸트, 라디오 공무원, MBC 직원. 배칸트는 시계처럼 규칙적인 그의 생활이 유명한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와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애칭이다. 사실 그의 하루 일과는 칸트를 비롯한 위대한 창작가들의 일상과 핵심적 특징을 공유한다.

저널리스트 메이슨 커리의 저서 [리추얼: 세상의 방해로부터 나를 지키는 혼자만의 의식]에 소개된 161명의 위대한 창작가들 일상을 살펴보면 창작가들이 일하는 방식은 그들의 얼굴 생김새만큼 제각각이지만 그 와중에도 다양성을 관통하는 한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일을 위해 자신만의 방법으로 하루를 보내는 엄격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예술을 업(業)으로 삼은 자유로운 영혼들은 일반적인 기대와 달리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며 단조로운 루틴으로 채워진 하루를 보냈다.

다음은 배철수가 한 방송 인터뷰에서 밝힌 하루 일과다. ‘배칸트’는 아침 9시에 일어나서 토스트 두 쪽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뉴스를 검색한다. 11시30분이 되면 방송국 주변으로 가서 주로 20~30대 젊은 PD나 작가들과 점심식사를 한다. 커피까지 마신 후에 피트니스센터로 가서 (운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만 하면서)목욕을 한다. 그는 오후 4시가 되기 전에 생방송 스튜디오에 입장한다(대부분의 DJ들은 방송 직전에 녹음실로 들어간다). 방송이 끝나는 8시엔 곧장 집으로 간다. 책을 읽거나 쉬면서 저녁 시간을 보낸다(많은 독서량은 그의 또 다른 특징이다). 그의 삶에 없는 것 세 가지는 술, 담배, 저녁 약속이다. 이 생활을 지난 30년 동안 반복했다.

뛰어난 창작가들의 성취 비결은 새벽 기상도, 긴 작업 시간도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일을 중심으로 단순한 하루 루틴을 만들고 세상의 방해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것이었다. 규칙적이고 예측가능한 생활을 함으로써 그들이 얻은 것은 핵심 과제에 집중할 수 있는 역설적 자유였다. 위대한 창작가들이 그랬듯이, 배칸트는 생활의 중심에 배캠을 놓았고 방해로부터 자신을 지켰다.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을 항상 1순위에 두고, 프로그램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일이라면 아예 시작하지 않았다. “나는 라디오 DJ입니다. 더 이상 가수도 아니고 TV방송에 나갈 이유가 없어요.” TV 출연 요청을 숱하게 거절했고 출입국 기록의 직업란에는 라디오 DJ라고 적었다.

어떻게 이게 가능했을까? 밴드 생활에 지쳐가고 있던 1990년 어느 날, 그는 친구였던 PD의 전화를 받았다. “라디오 DJ 해볼 생각 없어?” 흔쾌히 수락하고 달려든 프로그램이 음악캠프다.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음악 처음 할 때처럼요. 노래를 소개하는 것도 재밌고 청취자 사연 듣는 것도 재밌고요.” 이 초심은 30년 동안 유지되었고 현재진행형이다. 배캠이 방송 역사를 새로 쓸 때마다 그가 밝힌 소감을 들어보자.

“언제까지 DJ를 할 거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데, 제가 먼저 그만둘 일은 없을 겁니다. 15년간 한 번도 이 일을 노동으로 여기지 않을 만큼 즐거웠습니다.” - 배캠 15주년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고 20년이 훌쩍 지나갔어요. 무척이나 행복하게 방송을 했기 때문에 ‘나만 혼자 행복해도 되나’라는 생각을 지금도 가끔 해요.” - 배캠 20주년

“제게 배캠은 삶 그 자체입니다.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하고 애인이기도 하죠. 제게서 라디오 프로그램을 떼어내면 남는 게 무엇일까 생각하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중요합니다.” - 배캠 25주년

“음악을 좋아하고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해서 좋은 음악을 들으면서 매일 행복하게 지냈는데, 30년이 됐다고 큰 축하를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 배캠 30주년

이 일을 노동으로 여기지 않을 만큼 매일 행복했다! 배철수의 DJ 30년, 그 단출한 일상엔 수많은 연구를 통해 학자들이 발견한 행복의 가장 중요한 사실이 압축되어 있다.

첫째, 행복은 기쁨의 강도(intensity)가 아니라 빈도(frequency)라는 점이다. 행복 연구의 전문가인 연세대 심리학과 서은국 교수가 그의 책 [행복의 기원]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이는 행복의 가장 중요한 진리를 담은 문장 중 하나다. “큰 기쁨이 아니라 여러 번의 기쁨이 중요하다. 객관적인 삶의 조건들은 성취하는 순간 기쁨이 있어도, 그 후 소소한 즐거움을 지속적으로 얻을 수 없다는 치명적인 한계가 있다.”

80년대 대중가요를 논할 때, 송골매는 당대 최고 스타였다. 가요 프로그램의 1위 자리를 밥 먹듯 차지하고, 록 밴드로서 유일하게 10대 가수상을 4년 연속 받았으니 배철수는 여러 차례 ‘큰 기쁨’을 누린 사람이다. 그러나 요란한 스포트라이트가 행복으로 이어진 건 아니었다.

“그 시절엔 밴드를 유지하려면 나이트클럽에서 연주를 해야만 했어요. 1년 중, 클럽이 문을 닫는 현충일을 제외하고 364일을 매일같이 연주했죠. 그런데 취객들이 무대 위로 뭘 그렇게 던져대는지. 수박이나 사과 같은 거요. 가끔 직장인들이 아침에 출근하기 싫어하듯이, 어느 날 무대에 올라가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좋아했던 음악이 하기 싫은 일이 돼버렸다. 때마침 행복의 여신이 그에게 새 기회를 선물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DJ 활동이 여러 번의 작은 기쁨을 가져다 줄 천직임을 알아봤다. 10년 동안 최고의 록밴드 지위를 누린 수퍼스타가 원한 것은 더 큰 인기와 명성이 아니었다. 판단의 기준은 심플했다. 라디오 스튜디오에 있으면 마냥 좋았다는 것.

“저는 일상이 좋아요. 아무 것도 없는 일상이…” 그가 한 말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표현이다. 생활이 너무 단순해 극적인 일은 생기지 않았다. 10주년, 20주년 마일스톤을 달성할 때마다 책을 내고 상을 받고 콘서트를 여는 특별한 일을 벌였지만 이 모든 행사들이 피곤했다. 그는 자신이 행복을 느끼는 정확한 지점을 알고 있다. 반복되는 단순한 일상에 내재된 소소한 기쁨.

배철수의 30년이 증명해 보인 두 번째 행복의 진리는 행복해야 성공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엔 이런 공식이 있다. “성공하면 행복해질 거야. 고진감래 (苦盡甘來), 쓴 것이 다하면 단 것이 온다고!” 어렸을 때부터 이렇게 배웠다. 그래서 오늘의 고통을 참고 내일의 성공을 위해 달린다. 그런데 거꾸로 관계도 사실일까? 행복해야 성공하는 것은 아닐까? 심리학자 소냐 류보머스키(Sonja Lyubomirsky) 연구팀이 무려 225개나 되는 관련 연구를 종합 분석한 후, 내린 결론은 이거다. 행복이 먼저 내 안에 자리하고 있어야 성공이 찾아올 가능성이 높아진다. 행복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좋아하고 자기 자신도 좋아한다. 자기가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남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본인도 도움을 많이 받는다. 신체적으로 심리적으로 건강하고 어려움이 닥쳤을 때, 쉽게 좌절하지 않는다. 모두 성공의 가능성을 높이는 요인들이다.

성공해야 행복? 행복해야 성공 온다

“스튜디오에서 음악을 틀어 놓고 청취자와 함께 레드 제플린, 이기 팝 노래를 듣고 있으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어요. 청취자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막 떠오르고요.” 일터에서 행복한 사람은 성공의 토대를 매일 단단하게 다지고 있는 셈이다.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는 소리를 듣지 않는 이상, 그가 30년을 내달리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행복해야 성공이 온다.

30년 장수는 좋아하니까, 행복하니까, 그리고 배캠을 중심으로 설계된 담백한 하루하루를 살았으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이 단순한 진리를 더 단순한 그의 일상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을 하든지 톱스타가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냥 좋아하는 일을 재미있게 할 수 있으면 최고 아닌가요. 우등상은 못 타도 개근상은 탈 수 있어요.” 이 멋진 말을 곱씹다 보면 지난해보다 올해 더 멋있는 DJ의 오프닝 멘트가 듣고 싶어진다. “배철수의 음악캠프, 출발합니다!”

조지선 연세대학교 객원교수, 심리과학 이노베이션연구소 전문연구원

※ 필자는 스탠퍼드대에서 통계학(석사)을, 연세대에서 심리학(박사·학사)을 전공했다. SK텔레콤 매니저, 삼성전자 책임연구원, 아메리카 온라인(AOL) 수석 QA 엔지니어, 넷스케이프(Netscape) QA 엔지니어를 역임했다. 연세대에서 사회와 인간행동을 강의하고 유튜브 ‘한입심리학’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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