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돔은 남성의 전유물일까. 유해성분 없는 '여성 친화적 콘돔'으로 콘돔 시장에 도전한 여성 창업가가 있다. 박지원(35) 세이브앤코 대표다. 사명이자 제품명인 '세이브(SAIB)'는 '편견(BIAS)'을 뒤집는다는 의미다. 세이브 콘돔은 2018년 9월 국내 출시 이후 지난달까지 누적 40만개가 팔렸다. 전국 세븐일레븐·올리브영 등 7500여개 오프라인 매장과 온라인에서 판매된 수치다.
![박지원 세이브앤코 대표 [사진 세이브앤코]](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005/16/e01f2782-82af-4bdb-9ce7-c86f6b7bbfb5.jpg)
박지원 세이브앤코 대표 [사진 세이브앤코]
박 대표는 미국 텍사스대 오스틴캠퍼스 디자인대학 조교수로 6년간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한국의 폐쇄적인 성(性) 문화를 깨달았다. 한 여학생이 수업 과제물로 제출한 무료 콘돔 배부 다큐멘터리를 보고 얼굴이 빨개진 사람이 교수인 자신밖에 없었던 것. 이후 기성 콘돔에는 여성의 몸에 해로운 성분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2018년 창업의 길을 택했다. 박 대표는 사업에 전념하기 위해 지난해 휴직계를 내고 한국에 들어왔다. 지난 13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세이브앤코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한국의 실리콘밸리, 판교]
- 미국 대학 교수라는 평탄한 길도 있었는데.
- 편안해지면 좀이 쑤시는 성격이다. 처음엔 힘들었다. 미국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영어도 부족했다. 보수적인 학계에서 체구 작은 어린 동양 여성이 교수를 하려니 차별도 많이 당했다. 6년쯤 지나니 적응이 됐다. 마냥 아기 같던 신입생들이 졸업할 때면 훌쩍 성장해있는 걸 보고 나는 왜 지난 몇 년간 성장하지 못했나 의문이 들었다. 30대면 한창 역량을 쌓을 나이지, 정체되어 있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도전이 필요했다.
![세이브 콘돔 [사진 세이브앤코]](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005/16/9813fd85-1175-4616-ac07-3b4bfc928f9d.jpg)
세이브 콘돔 [사진 세이브앤코]
- 기존 콘돔에 어떤 유해성분이 있나.
- 제일 유해한 성분은 발암 물질인 니트로사민류다. 라텍스 가공 과정에서 발생한다. 2018년 어린이용 고무풍선에서 검출돼 논란이 됐던 물질이다. 2016년 한국소비자원 조사에 따르면 시중 판매 콘돔 27개 중 15개에서 니트로사민류가 검출됐다. 니트로사민은 여러 번 세척하면 불검출 수준으로 만들 수 있는데, 콘돔엔 그런 생산 방침 규제가 없다. 화학 첨가물도 여럿 들어간다.
- 어떤 첨가물인가.
- 딸기향 콘돔, 야광 콘돔 같은 이색 콘돔엔 합성향료·색소가, 사정 지연 콘돔에는 벤조카인(마취제)·파라벤(보존제)이 들어간다. 피임률을 높이는 살정제(노녹시놀-9)도 유해물질이다. 윤활제로 쓰이는 글리세린도 여성의 생식기에 들어가면 질염 위험을 높인다. 이런 성분들은 남녀 모두에게 유해하지만, 성기 구조상 여성에게 42배 더 위험하다. 남성의 생식기는 피부 장벽으로 어느 정도 보호가 되지만, 여성은 유해성분이 장기에 바로 흡수되기 때문이다.

지난 13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세이브앤코 사무실을 찾았다. 김정민 기자
- 그 정도로 유해한데 왜 논란이 없었나.
- 저는 콘돔을 화장품 시장과 자주 비교해본다. 5~6년 전부터 소비자가 화장품 성분을 따지기 시작했다. 이젠 제조사들이 나서서 유해 성분을 뺀다. 반면 성(性) 관련 기구 시장은 '열린 논의' 자체가 어렵다. 말 꺼내기를 부끄러워하니, 유해 성분이 수십 년 전 수준 그대로 있는데도 소비자는 정보를 모르거나 말을 못 꺼낸다. 해외에는 이미 친환경·친건강 콘돔 브랜드가 많다. 한국도 소비자가 성분 좋은 콘돔을 경험하게 되면 서서히 변해갈 것이다.
- 세이브 콘돔은 뭐가 다른가.
- 100% 천연 라텍스를 쓰고, 니트로사민이 안 나올 때까지 세척한다. 다른 유해물질은 철저히 배제했다. 디자인도 신경을 많이 썼다. 콘돔처럼 보이지 않으면서도 외부 충격을 견디게 틴케이스에 넣었다. 콘돔은 원래 체온과 충격에 쉽게 손상돼서 뒷주머니나 지갑에 넣으면 안 된다. 틴케이스 때문에 가격이 비싸졌는데(3개 7900원), 케이스를 제외한 리필 패키지 문의가 많아 다음달에 출시할 예정이다.
- 한국에서 콘돔 스타트업을 하는 게 힘들지 않나.
- 여성이 성에 대해 말하는 걸 터부시하는 문화가 있으니 쉽지는 않다. 피임이 '스스로를 지키는 당연한 행동'이란 인식도 부족하다. 꼭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있는데, 포털에서 콘돔을 검색하면 성인인증을 요구한다는 거다. 콘돔은 법적으로 연령 제한 없이 누구나 살 수 있는 의료기기다. 청소년 성관계는 이미 일어나는 현실이고, 피임은 청소년에겐 훨씬 중요한 문제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제대로 된 성교육이 안 되는데, 포털에서조차 피임법에 접근할 수 없다면 아이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겠나.
![세이브앤코가 만든 제품들 [사진 세이브앤코]](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005/16/a106f1e7-e50a-42af-afcf-2d22e5ebfa42.jpg)
세이브앤코가 만든 제품들 [사진 세이브앤코]
- 투자받을 때 어려운 점도 있나.
- 벤처캐피탈(VC) 의사 결정권자 중 중년 남성이 많다. 성에 대해 터놓고 말해본 적 없는 세대이다 보니, 콘돔이란 말에 눈도 못 마주치고 민망해하거나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어떤 VC는 "우린 그런 (저급한) 아이템에 투자 안 한다"며 기분 나빠하기도 했다. 한번은 한 투자 심사역이 "여성 대표라 조곤조곤 말하는 것 같은데, 남성 대표처럼 작은 성과도 부풀려 공격적으로 얘기해야 투자받을 수 있다"고 조언한 적이 있었다. 데이터가 없는 초기 스타트업이 비전과 꿈을 팔아야 하는 건 맞지만, 투자자에게나 고객에게나 똑같이 과장 없이 대하고 신뢰받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주체적 여성상을 지향하는데, 컨셉 컬러는 왜 핑크인가.
- '핑크=여성성'으로 보는 것 자체가 낡은 사고방식이다. 과거엔 남성이 핑크색을 좋아하면 놀림을 당했다. 하지만 젊은 세대에게 핑크는 그냥 노란색, 파란색 같은 여러 색깔 중 하나다. 세이브의 컨셉 컬러 '밀레니얼 핑크'는 밀레니얼 남녀 모두의 사랑을 받아서 이 이름이 붙었다. 핑크는 유치한 여자아이의 색이라는 과거의 편견을 벗어던진 색이자, 중성성(젠더 뉴트럴)을 상징하는 색이다.
- 앞으로의 계획은.
- 성 건강은 누구에게나 중요한 삶의 일부다. 한국에 '보편적인' 섹슈얼 웰니스 시장을 구축하는 게 목표다. 다음달엔 여성 청결제를 출시한다. 여성 영양제도 구상 중이다. 올해 미국·유럽 수출도 시작할 예정이다. 기업·제품·미국 식품의약국(FDA) 등록까지 마쳤다. 일본은 통판 문의가 들어와 준비 중이다.
![오는 18일 성년의 날을 세이브앤코가 선보인 '스무살 키트' [사진 세이브앤코]](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005/16/43cedb59-ae83-4cc5-a64d-a99e8e0b0d5c.jpg)
오는 18일 성년의 날을 세이브앤코가 선보인 '스무살 키트' [사진 세이브앤코]
세이브는 상품 수익의 10%로 캠페인 상품을 만들고 그 수익을 모두 한국여성의전화, 청소년 페미니스트 단체 등 성평등과 여성 권리 증진을 위해 기부하고 있다. 최근엔 성년의 날(5월 18일)을 맞아 2001년생 보호종료 청소년(만18세가 되어 복지시설을 퇴소해야 하는 청소년)에게 성교육 책자와 콘돔·파우치, 장미 등으로 구성된 '스무살 키트' 200개 기부 캠페인을 진행 중이다. 소비자가 키트를 구매할 때마다 홀로서기를 시작하는 청소년에게 같은 키트가 하나씩 기부되는 형태다.
김정민 기자 kim.jungmin4@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