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기 억제’ 부동산 정책, 공급 부족 논란 일자 프레임 변경

중앙선데이

입력 2020.05.16 00:37

업데이트 2020.05.16 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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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6호 04면

도심 주택 공급

아파트 8000가구가 들어설 서울 용산역 철도 정비창 부지. [연합뉴스]

아파트 8000가구가 들어설 서울 용산역 철도 정비창 부지. [연합뉴스]

“서울의 주택 공급이 부족하다는 건 전혀 근거가 없다.” 연초 서울시는 주택 공급 관련 기자간담회를 갖고 이렇게 주장했다. 이 자리에서 유훈 서울시 주택건축본부장은 “박원순 시장이 취임한 2014년 전후 6년간을 비교하면 주택 공급량은 오히려 늘어났다”며 “공급이 부족하다는 의견은 통계적 사실과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집값이 오르는 건 투기 수요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사실 이는 중앙정부의 해석이기도 하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과 동시에 “서울 집값이 뛰는 건 공급이 문제가 아니라 투기 수요 때문”이라고 외쳐왔다.

용산 정비창 아파트 8000가구
유휴부지엔 1만5000가구 건설

공공 재개발 인센티브 적어
자투리 땅 위주 탓 효과도 ‘글쎄’

그럼에도 공급 부족 논란은 끊이지 않았고, 정부는 2018년 경기도 남양주·하남시 등지에 3기 신도시를 개발해 30만 가구를 공급하겠다고 나섰다. 여기에 더해 6일에는 용산 철도정비창 8000가구 등 서울 도심에서 주택 7만 가구를 공급하는 방안을 들고 나왔다. 분양가·대출 규제 강화로 수요를 억제한 만큼 이제는 지속적으로 흘러나오는 ‘공급 부족 프레임’을 깨 집값 안정세를 이어가겠다는 의지다. 국토부의 한 관계자는 “집값을 끌어 올리는 건 투기 수요라는 정부의 판단에는 변함이 없다”며 “다만 공급이 부족하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수요를 자극하는 만큼 공급을 지속적으로 늘려가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 공장 이전 부지엔 1만5000가구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주택 공급 물량을 가늠할 수 있는 주택 인허가 물량은 2017년(11만3131가구) 정점을 찍은 후 지난해까지 2년 연속 줄었다. 지난해 주택 인허가 물량은 6만2200여 가구로, 2017년보다 44% 급감했다. 2009년 3만6000가구 이후 10년 만에 가장 적었다. 주택 인허가 물량이 확 준 건 아파트 물량이 대거 줄어든 영향이다. 2017년에는 7만4984가구가 인허가를 받았지만, 지난해에는 3만6220가구에 그쳤다. 이에 대해 정부는 2017년 주택 인허가 물량이 급증한 데 따른 기저효과라고 설명한다. 평년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데다 2023년부터는 3기 신도시에서 30만 가구가 공급되므로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6일 내놓은 서울 도심에서의 주택 공급 계획은, 실제로는 공급이 부족하지 않지만 투기 세력이 퍼트리는 ‘공급 부족 프레임’에 대응하겠다는 취지다. 박선호 국토교통부 1차관도 이날 “집값이 안정돼 있지만 투기 억제 못지않게 공급 관리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의도가 어떻든 주택시장에선 공급 확대 카드를 반기는 분위기다. 공급 물량 자체가 절대적으로 많은 건 아니지만, 시장에 공급 시그널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가 나온다. 심교언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정부가 규제만이 아니라 공급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건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고 말했다.

특히 용산 철도정비창에 미니 신도시급인 아파트 8000가구를 짓기로 한 건 의미가 크다. 문재인 정부의 첫 서울 도심 대규모 공급 계획이기 때문이다. 용산 정비창 부지는 과거 용산국제업무지구 개발 사업을 추진하다 무산된 곳으로, 한강을 품고 있고, 서울 지하철 1·4호선과 경부고속철도(KTX)가 지나는 서울 최고의 ‘노른자위 땅’이다.

서울의 한 가운데 있으면서도 계속 비어 있어 그동안 개발 필요성은 꾸준히 제기돼 왔다. 정부는 이와 함께 진행이 더딘 재개발 사업지에 한국토지주택공사·서울도시공사 등 공기업이 참여하는 ‘공공 재개발 사업’을 추진한다. 용적률 상향 등의 인센티브를 줘 사업을 재개하고, 이를 통해 4만 가구를 공급한다는 계획이다. 국·공유지나 유휴 부지를 활용해 1만5000가구를 짓고, 도심 내 공장 이전 부지에도 1만5000가구를 건설한다. 박 차관은 “부지 확보부터 입주까지 3∼5년 이상 걸리기 때문에 지금부터 준비해야 중장기 주택 공급 물량을 확보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다만 시장에선 이번 공급 대책이 ‘집값 안정 효과’가 있느냐에 의문을 제기한다. 공급 물량의 절반 정도는 집값 안정과는 관계가 없는 임대주택이고, 용산을 제외한 다른 지역은 규모나 지리적 이점이 크지 않기 때문이다. 금융권의 한 부동산 담당 프라이빗뱅커(PB)는 “단순히 이번 공급 물량만으로는 집값 안정 효과를 기대한 어려워 보인다”고 말했다. 공공 재개발 사업이나 유휴 부지 개발은 실현 가능성이 낮다는 평가다. 재개발 사업이 멈춰 서 있거나 더딘 건 각종 규제로 사업 채산성이 나빠진 때문인데, 공공 재개발 사업을 하면 임대주택을 더 많이 지어야 한다.

분양가 상한제 제외나 용적률 상향 등의 인센티브(유인책)가 있지만, 그만큼 임대주택을 지어야 하므로 실효성이 크지 않을 전망이다. 채산성을 개선할 인센티브가 없다는 얘기다. 서울의 한 재개발 구역 관계자는 “규제 완화로 당장은 채산성이 좋아질 수 있겠지만, 임대주택을 늘리면 입주 후 아파트 가치에도 영향을 받게 된다”며 “임대주택을 늘리는 데 동의하는 주민은 많지 않을 것”이라고 평가 절하했다.

유휴부지는 주민 반대 등이 문제다. 정부는 2018년에도 성동구치소 부지 등 유휴부지를 개발하겠다고 했지만, 주민 반대에 부딪혀 사업은 지지부진하다. 성동구치소도 올해 2월에야 개발 밑그림을 그렸다.

# 지나친 공공 개입 부작용 우려도

두성규 한국건설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2018년 12월 서울 8만 가구 공급계획을 발표 이후 진척사항이 거의 없고, 자투리 땅 위주여서 공급 효과나 주거 환경 개선 효과가 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나친 공공 개입의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한 도시계획 전문가는 “공기업인 코레일이 기대한 정비창 부지의 매각 가격은 5조원 정도인데, 이 땅을 단순히 아파트 단지로 개발한다면 제값을 받고 팔기도 어려울 것”이라며 “차라리 이 땅을 제값 받고 팔아 신도시를 개발하는 게 경제원리상 맞다”고 말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엔 ‘용산 개발 계획을 백지화해 달라’는 청원도 등장했다. 국토의 최중심부를 몇몇 거주자에게만 한정하는 사유화를 반대한다는 것이다. 이 청원인은 “임대주택이 밀집하면 불안정한 거주환경에 따라 환경이 낙후하는 슬럼화가 일어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황정일 기자 obidiu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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