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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기현의 철학이 삶을 묻다

차가운 이성, 사랑이란 이름의 뜨거운 의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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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의지와 은총의 철학자 성 아우구스티누스

루브르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네덜란드 화가 아리 셰퍼(1795~1858년)의 그림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그의 어머니 성 모니카’. [중앙포토]

루브르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네덜란드 화가 아리 셰퍼(1795~1858년)의 그림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그의 어머니 성 모니카’. [중앙포토]

고대 그리스에서 인간은 신과 동물 사이에 위치한다. 아킬레우스의 경우처럼 신과 인간이 결합하여 후손을 낳을 수 있을 만큼 신과 인간은 가깝다. 완전한 신이 될 수는 없지만, 인간은 정신적으로 신의 경지에 오르는 것을 목적으로 산다. 신은 자신들이 있는 곳으로 인간을 인도하기 위한 길잡이로 이성을 인간에서 선물로 주었다. 이성을 따름으로써 인간은 신을 닮아 간다.

로마의 제국주의적 확장과 혼란 #마음의 안정을 위한 욕구 높아져 #삶은 이성·지식 아닌 의지가 주도 #인간의 약한 의지는 신에 의지해야

이성을 따라 신의 길로 가는 길에 동물적 충동과 욕망이 문제다. 건강과 미를 유지하려면 다이어트를 하여야 한다고 이성은 이야기하는데, 고기 맛에 길들인 나의 발길은 삼겹살집으로 향한다. 흡연에 중독된 나의 몸은 담배는 백해무익하다는 이성의 충고를 무시한다. 이성과 욕망 사이에서 인간의 마음은 찢기어 충돌한다.

이성과 욕망, 영혼과 몸, 선과 악

이성과 욕망의 충돌은 선과 악의 이분법을 불러들인다. 과도한 욕망은 인간을 파멸로 이끄는 악한 것이어서, 신이 준 선물인 이성에 의하여 절제되고 통제되어야 좋은 삶이 가능하다. 욕망은 악하고 이성은 선하다는 생각은 몸은 악하고 영혼은 선하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욕망은 몸과 가깝기 때문이다. 몸의 에너지가 부족할 때 허기가 져서 식욕을 느끼며, 습도가 과할 때 후덥지근한 불쾌감을 느껴 쾌적한 곳으로 가고 싶어진다. 피부가 상하면 고통을 느끼고, 부드럽게 만져주면 쾌감을 느낀다.

이성은 몸과 거리가 있다. 세상의 근본적 모습과 삶의 원리를 고민하는 이성은 신체의 자극에 요동하지 않는다. 영혼은 순수한 것인데 몸에 갇혀 욕망과 충동 때문에 휘둘린다는 생각,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라는 그리스적 생각은 이런 연유를 가진다.

그리스 사상가들은 이성의 승리를 낙관하는 지성주의자들이었다. 이성은 깨달음의 능력이다. 세상이 어떤 원리로 운행되고 있는가를 연구하고, 어떤 삶이 훌륭한 삶인가를 궁리한다. 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 최선일까 묻고 대답한다. 그리스인들은 이런 깨달음이 성숙하면 욕망이 통제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소크라테스가 가장 두드러진다. 그는 이성적 지식이 욕망과 충돌하는 현상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성적 지식이 올바로 선다면, 욕망에 의하여 도전을 받거나 굴복하는 일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삶을 지배하는 동력이 이성에서 온다는 믿음에 대한 엄청난 신뢰다. 그의 지적 후손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지성주의를 이어받아 세계와 삶에 대한 장대한 체계를 제시하였다.

쇠퇴하는 이성주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의하여 국력이 쇠퇴하고, 마케도니아와 로마가 도처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소용돌이 속에 그리스는 변방으로 내몰린다. 철학은 세상의 경영보다 마음의 평안을 추구하는 치유의 철학이 되어 기개가 약해진다. 초월적 영역에서 피난처를 찾고 싶은 마음이 왜 안 생기겠는가? 페르시아의 미트라교, 이집트의 오시리스 등의 신비주의가 새로이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 무엇보다 유일신적 절대자 여호와를 중심으로 한 유대교를 향하여 마음이 열린다. 예수의 탄생과 예수를 알리는 바울의 포교는 보편종교로서의 기독교를 탄생시키면서, 삶을 바라보는 시각에 큰 지각변동을 일으킨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기원전 6세기부터 거의 천 년에 이르도록 문명사의 새로운 이정표를 마련한 그리스의 이성주의에 도전하여 새로운 시대 정신을 담아낸다. 로마의 제국주의적 확장, 그리스도교의 박해, 외침에 의한 혼란 등을 겪으면서 이성이 우리의 삶을 인도하기에 너무 차갑다고, 어쩌면 무력하다고 생각하였는지도 모른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더 많이 배운 사람이 정의와 진리에 더 합당한 모습으로 사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진작에 깨달았는지 모른다. 차가운 이성과 구분되는 뜨거운 정신의 영역, 의지라는 새로운 영역을 삶을 이해하는 새로운 지평으로 제시한다.

사랑이라 불리는 의지

의지란 어떤 것일까? 인간은 동물과 달리 일차적 욕망에 기계적으로 반응하지 않는다. 우리의 선택이 개입하여야 욕망이 행위로 이어진다. 단것을 먹을까, 향기로운 것을 먹을까 욕망이 서로 갈등한다. 담배를 피울까, 피우지 말까 욕망과 이성이 갈등한다. 어떻게 행동하는가는 어떤 욕망에 나의 뜻을 싣는가에 달려있다. 나의 뜻을 싣는 것, 일차적인 욕망에 마음을 실어 행동으로 이어주는 매개체가 바로 의지다.

의지는 단순한 본능적 이끌림과 다르다. 감각적으로 즐거운 것을 접할 때 우리의 마음은 동물적으로 끌린다. 이런 일이 반복되고 습관화되면, 생리적 반응을 지나 그를 추구하는 단계에 이른다. 이러한 추구의 상태는 호의적 감정 상태를 넘어선, 목표 의식(의도)을 동반하는 복합적 상태다. 이것이 바로 의지다. 욕망의 방향등이 서로 다른 길을 가리킬 때, 지식이 아니라 의지가 행동을 결정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의지를 ‘사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결국 사람됨은 지식이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는지에 의하여 결정된다.

욕망과 이성의 대립은 육체적 의지와 영적 의지 사이의 대립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몸을 향한 육체의 의지가 불분명한 심연에서 지성에 거슬러 자신을 이끌어가는 과정을 생생히 증언한다. 그가 ‘사랑의 중력’이라고 부르는 비이성적 욕망의 의지는 마음을 지배한다. 그리하여 마음은 끊임없이 ‘육이 영을 거슬러 탐하는 내적 전쟁’ 상태에 머물게 된다. 이 전쟁은 이성적 깨달음만으로 이길 수 없고, 이성에 의하여 정확히 그 모습도 파악되지 않는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내적 전쟁은 우리의 힘으로 이길 수 없다는 비관적인 결론을 내린다. 이 결론은 기독교 주교였던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는 하나님의 은총에 의지할 이유로 작동한다. 막강한 중력으로 육체의 소욕을 따라 아래로 아래로 인간에게 가하는 압력에 저항하여 선한 방향으로 영적인 힘을 얻는 방법은 예수와 하나님의 은총에 의지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요지다.

의지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이성의 힘은 그토록 약한가? 개인의 힘에 맡겨진 의지는 욕망에 패배할 수밖에 없는가? 좋은 삶으로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절대자의 은총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는가?

아우구스티누스는 많은 질문과 논쟁을 남겼다. 그에게 동의할 수도, 반대할 수도 있다. 그 여부를 떠나, 마음의 한 요소로 의지를 전면에 제시하고, 이것이 삶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이야기함으로써 마음에 대한 이해, 삶에 대한 논의를 확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역사적 공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회심한 기독교 사상가 아우구스티누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대 말기 354년 로마의 지배를 받던 북아프리카의 타가스테(오늘의 알제리 지역)에서 독실한 기독교인 어머니 슬하에 태어났다. 젊은 날 페르시아 영지주의의 한 유파인 마니교에 심취하였지만, 밀라노 유학 시절 암브로시우스 주교의 영향 아래 기독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그가 『고백록』에서 서술한 무화과나무 아래에서의 회심 사건은 사도 바울이 다마스쿠스로 가는 도상에서 겪은 회심 사건과 더불어 기독교의 2대 회심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회심은 자신에 의하여 극화된 것이라는 후세인들의 주장도 있지만.

이후 아우구스티누스는 북아프리카의 히포(지금의 알제리 영토)로 돌아와 성직에 봉직하여 주교가 된다. 당시 마니교, 도나투스파, 펠라기우스파 등의 여러 기독교 지파들과 논쟁을 벌이며, 초기 기독교의 교리를 확립하는 데에 절대적인 기여를 하였다. 원죄, 은총, 삼위일체 등의 기독교적인 논쟁점뿐 아니라, 언어의 본성, 지식과 회의주의, 자유의지와 결정론 등 수많은 철학적 논의의 기초를 놓아, 중세를 거쳐 거의 현대에 이르기까지 막대한 영향을 미친 고대 최고의 기독교 사상가다.

김기현 서울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