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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계획대로 안되는 인생처럼…까미노의 하루는 다채롭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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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박재희의 발로 쓰는 여행기(42)

바르셀로스(Barcelos) 시청사를 향해 가는 길. 가을꽃이 화려하다. [사진 박재희]

바르셀로스(Barcelos) 시청사를 향해 가는 길. 가을꽃이 화려하다. [사진 박재희]

완벽한 여행이란 없다고 한다. 나는 모든 여행이 그대로 완벽하다고 믿는 쪽이지만. 가슴을 설레게 만드는 사진, 비현실적인 풍광의 아름다운 영상에는 여행자의 헛발질이나 고생은 보이지 않는다. 공연히 헤매다가 길을 잃고 불친절한 날씨를 온몸으로 견딘 날이 자로 잰 듯 딱 떨어지는 여정으로 마무리한 날보다 더 완전할 수 있다. 나의 포르투갈 까미노 21일, 22일차가 그랬다. 계획대로 하지 못하고 놀라울 만큼 마음대로 되지 않았던, 그러나 결과적으로 더 아름다웠던 시간이다. 이틀 동안 라테스(Sao Pedro de Rates)에서 타멜(Portela de Tamel) 그리고 폰테데리마(Ponte de Lima)까지 50여 km 동안 내가 걸었던 것은 거리가 아니라 사람이다.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났다.

매일 순례길 까미노를 걸으면서 몇 km를 걸었는지 어디까지 왔는지 기록하게된다. 지나고보면 걸은 길의 의미는 거리가 아니라 사람들이었음을 알게된다.

매일 순례길 까미노를 걸으면서 몇 km를 걸었는지 어디까지 왔는지 기록하게된다. 지나고보면 걸은 길의 의미는 거리가 아니라 사람들이었음을 알게된다.

까미노가 인생과 같다고 말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계획대로,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고백하자면 한국에서 올 때 이번엔 배낭 택배 서비스를 종종 이용하리라고 마음먹었다. 편하게 노는 것처럼 걸어보리라 다짐했다. 첫 번째 까미노를 가열차게 걸었으니 이번에는 순례보다는 여행처럼, 선물처럼, 소풍처럼 걷고 싶었는데 역시 그렇게 되지 않았다. 일단 프랑스 길처럼 사람이 많지 않으니 짐을 보내는 서비스를 하는 지역이 거의 없다. 택시를 불러서 배낭을 태워 보내는 꼴이니 혼자 이용할 경우는 매우 비싸기도 하고 얼마나 갈지, 어디까지 갈지를 미리 정하는 일이 어렵기도 해 도무지 성미에 맞지 않는다. 목적지를 정하지 못하니 어쩔 수 없었다. 이번에도 무거운 배낭을 온전히 지고 다녀야 했다.

바르셀로스 성당에서 열린 결혼식의 피로연. 결혼식으로 작은 타운 전체가 파티를 하는 것처럼 떠들썩해졌다.

바르셀로스 성당에서 열린 결혼식의 피로연. 결혼식으로 작은 타운 전체가 파티를 하는 것처럼 떠들썩해졌다.

해가 떠오르며 조금씩 땅을 축복하는 의식. 햇살이 세상을 깨우기 시작하고 나는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매일 순례를 시작했다. 그날은 정말 16km만 걷고 모처럼 슬로우 데이(slow day)로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점 찍어둔 바르셀로스(Barcelos)에 도착했을 때 성당 앞 광장이 한껏 차려입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순례자인가요? 내 친구의 결혼식인데 와서 함께 축하해주세요~” 이미 충분한 와인을 마신 듯 보이는 신부의 친구에게 끌려서 얼떨결에 결혼피로연에 합류하게 되었다. 미국에서 유학 중인 신랑 신부가 고향으로 와서 결혼식을 올리는 것이라고 했다. 까미노에 관심이 많은 신부의 친구들에 둘러싸여 무화과에 치즈, 각종 빵을 곁들여 와인을 마셨다. 드레스를 입은 여인들 사이에 꾀죄죄한 차림으로 계획에 없던 파티를 즐겼다. 신랑 신부를 웨딩카에 태워 보내고 나니 다리에 힘이 넘친다. 바삭바삭한 햇살 아래 와인을 마셨고 배도 부르고 어디라도 조금은 더 걷고 싶었다. 저녁이 되면 아프고 힘들어 후회할 걸 뻔히 알면서 더 걷기로 했다.

신랑신부를 위해 대기중인 웨딩카.

신랑신부를 위해 대기중인 웨딩카.

“랄랄라 랄랄라… 랄라랄라랄랄라~”
배낭을 메고 어깨에는 아이를 올려놓은 남자가 행진곡 리듬으로 따라 걷는 아이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슈퍼맨 망토처럼 긴 타월을 두른 아이는 눈이 마주치자 수줍게 웃는다. 인사를 건넸다. “하이, 봄 까미뇨(Bom Caminho).”
포르투에서 출발한 순례자 가족이다. 아빠는 큰아들을 가리켜 대장이라고 불렀다. 자신은 막내를 어깨에 메고 옮겨주는 사람일 뿐이라고. 슈퍼맨 아들이 대장, 둘째 딸이 부대장이다.

"3년 전부터 매년 아이들을 데리고 순례를 하고 있어요. 아내가 몸이 좋지 않아 함께하지 못하지만, 우리가 걷는 것을 기뻐해요.” 엄마가 아프니 아이들이 집에서 침울한 것이 가슴 아팠다고 한다. 아이들에게 의미 있는 시간을 주고 싶어서 아이들과 까미노를 걷기로 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짐을 스스로 등에 메고, 먹기도 쉬기도 쉽지 않은 힘든 시간을 견디게 하는 선물이라니. 게임기를 사주는 것도 오락을 마음껏 하도록 해주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두 다리로 걸어서 순례하는 것을 선물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포르투갈의 순례자 가족. 세 아이와 아빠는 순례원정대 팀을 이루어 3년 전부터 매년 순례길에 오른다.

포르투갈의 순례자 가족. 세 아이와 아빠는 순례원정대 팀을 이루어 3년 전부터 매년 순례길에 오른다.

큰아들이 가족순례단의 대장, 부대장은 큰 딸이다. 막내를 무등태워 걷는 아빠는 마법망또를 두른슈퍼맨 아들에게 캡틴, 대장님이라고 부른다.

큰아들이 가족순례단의 대장, 부대장은 큰 딸이다. 막내를 무등태워 걷는 아빠는 마법망또를 두른슈퍼맨 아들에게 캡틴, 대장님이라고 부른다.

“첫해에는 큰 녀석도 어렸으니까 정말 힘들었어요. 나도 힘들고 아이들도 힘들고. 그런데 집으로 돌아가서 아이들이 너무 좋았다는 거예요. 결심했죠. 매년 조금씩이라도 걸어 끝까지 가기로.” 어떻게 어린아이들이 땀과 고통, 침묵 속에 걷는 기쁨을 알 수 있었을까. 너무 아름다웠고 그런 아빠를 둔 아이들이 부러웠다. 어쩐지 조금 부끄럽기도 했다.

“너 한국 사람이니? 오 마이 갓. 나 통쿡대학교 다녔어.” 금갈색 눈동자의 아이가 등 뒤에 새겨진 동국대학교 로고를 보여줬다. 어디서 왔냐고 물었더니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출신이지만 떠나 온 지 너무 오래되어 자기 집이 어딘지 혼란스럽다며 웃는다. 세계 어디든 살고 싶은 곳에서 일하며 그곳에서 지내는 방식의 삶을 살기로 결정한 스물일곱 살의 청년이다. 독일어, 영어, 프랑스어, 네덜란드어, 스페인어를 하니까 어느 나라든 일단 언어적 장벽이 없어 가능하겠구나 했는데, 한국 영화에 꽂혀서 1년 동안 한국에서도 지냈다고 한다. 역시, 자유와 해방은 조건부로는 가능하지 않다.

“파전. 너무 먹고 싶어. 이모님의 파전에 막걸리! 너무 맛있어. 너무 그리워.” 떠듬떠듬 한국말로 그리움을 떠올렸다. 그리움은 먹는 것과 짝을 이룰 때 강력한 법이다.

살고싶은 곳을 정해 일을하며 세계 어느 곳이든 집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코스모폴리탄 청년. 한국 영화에 반해 한국에서도 1년간 생활했다. 파전과 막걸리를 '그립다'고말하는 네덜란드 출신의 젊은이.

살고싶은 곳을 정해 일을하며 세계 어느 곳이든 집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코스모폴리탄 청년. 한국 영화에 반해 한국에서도 1년간 생활했다. 파전과 막걸리를 '그립다'고말하는 네덜란드 출신의 젊은이.

아르헨티나에서 온 아이린은 바이올린을 가지고 다닌다. 순례 중에는 어떻게든 물건을 버리고 빼면서 무게를 줄이는데 바이올린이라니. 버스킹을 할 계획이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저었다.

“연주할 줄 몰라요. 그냥 모레니스(Morenez)와 함께 가고 싶어서 데려왔어요.”
“바이올린에 이름이 있어요?”
“(웃음) 이름 예쁘죠? 스페인어로 갈색이라는 뜻이에요.”

산티아고 동반자로 바이올린이라. 이름까지 붙여 주었지만 켤 줄도 모르는 바이올린을 가지고 다닌다니 어지간히 멋을 부리는구나 생각했다 그때는. 출발하면서부터 함께 길을 잃고 헤매며 말 그대로 죽을 뻔했던 날 우리는 기어서 폰테 드리마(Ponte de Lima)에 도착했다. 죽을 만하면 반드시 그것을 보상하는 풍광이 나타나는 까미노의 법칙. 꿈같이 흐르는 강 위로 저녁노을이 조각처럼 떨어졌다. 아이린이 말했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아이린은 무거운 배낭에 본인은 연주할 줄도 모른다면서 바이올린과 순례를 함께한다. 짧지않은 아름다운 순례의 이유가 바이올린에 있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아이린은 무거운 배낭에 본인은 연주할 줄도 모른다면서 바이올린과 순례를 함께한다. 짧지않은 아름다운 순례의 이유가 바이올린에 있다.

“모레니스는 제 여동생 이름이에요. 이건 제 동생 바이올린이고요.” 아이린과 인연이 시작된 날이었다. 세상은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선물을 안긴다. 충동적으로 계획을 바꾸지 않았다면 만날 수 없었던 사람들, 뻔한 길을 잃고 헤매는 바람에 생기는 모든 것. 내리 이틀을 무리한 탓에 걷는 것은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이었지만 그저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완벽한 여행이란 없다고들 하지만 나는 모든 여행이 그대로 완벽하다고 믿는다.

기업인·여행 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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