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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원 깎여도 울면서 사인…유치원교사 '가짜 근로계약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2020년도 학기 시작을 앞둔 지난 2월 서울의 한 사립유치원 교사 A씨는 지난해보다 급여가 30% 삭감된 근로계약서에 사인을 해야만 했다. 원장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원생이 줄어 일도 줄 거고, 유치원 사정도 좋지 않으니 급여를 내릴 수밖에 없다”고 해서다. 결국 A씨는 3~4월 두 달간 실수령액으로 예년에 비해 100만원 정도 깎인 240만원(월 120만원)을 받았다. 최저임금에도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다.

그런데 지난주 원장은 A씨를 불러 “지난해 급여 수준으로 근로계약서를 다시 쓰자”고 요구했다. 정부에서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는 사립유치원을 위해 한시적 지원금을 주기로 했는데, 지급 전제 조건 중 하나가 “소속 교원의 인건비를 전액 지급했을 경우”이기 때문이다. 지원금 받는 데 차질이 없게 하도록 “교육청 제출용 ‘가짜’ 근로계약서”를 만들자는 얘기였다. 물론 원장이 A씨에게 삭감했던 급여를 다시 주진 않았다. A씨는 “편법인 줄 알지만 원장에게 대들어서 ‘짤릴’ 수는 없지 않나”라며 “다른 유치원 교사들에 비하면 30% 삭감은 ‘미비한 편’이라 꾹 참았다”고 말했다.

편법 근로계약·월급 페이백 '기승' 

사립유치원 교사들은 “안 그래도 교사로서 큰 의미가 없던 ‘스승의 날’인데, 코로나19로 인해 오히려 더 힘들어졌다”고 토로했다. 물론 예년과 똑같이 월급을 지급하며 힘든 시기를 함께 견디는 유치원도 있다. 하지만 많은 유치원에서 코로나19를 이유로 교사의 급여를 삭감하면서도 정부 보조금은 챙길 수 있는 다양한 ‘편법’이 이뤄지는 상황이다.

A씨처럼 근로계약서를 다시 쓰는 경우가 최근 비일비재하다는 게 사립유치원 노동조합의 설명이다. 유치원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한시 지원으로 원아 1인당 최대 월 16만원 정도가 지원된다. 코로나19로 원비 중 학부모 부담금(약 50%)을 돌려준 유치원 입장에선 ‘꼭 받고 싶은 돈’일 수밖에 없다. 사립유치원노조 박용환 사무처장은 “코로나19로 유치원 운영이 어렵다며 교사 월급을 깎지만, 따지고 보면 정부 지원금도 챙긴 데다가 유치원 운영비·원생에게 들어가는 비용 등이 줄어 예전보다 오히려 수익으로만 보면 더 ‘남는 장사’를 하는 유치원도 많다”고 설명했다.

A씨보다 더 안 좋은 상황에 처한 교사들도 많다. 사립유치원노조에 따르면 코로나19를 핑계로 아예 월급을 주지 않는 유치원들도 있다. 방과 후 교사로 일하며 받는 시간 외 수당을 지급하지 않거나, 연차에 따른 호봉을 깎아 계약하는 경우도 많다. 월급을 제대로 주는 척하며 교사에게 “다시 50%를 원장 계좌로 돌려보내라”라며 ‘페이백’을 요구하는 불법 행위도 더 심해졌다. 이는 사립유치원뿐만 아니라 어린이집 보육교사도 겪는 문제다. 박 사무처장은 “억울한 일이지만 폐쇄적인 사립유치원 환경 특성상 문제제기를 하면 아무 데서도 받아주지 않기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다들 원장의 위법 행위를 도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사립유치원 비리 적발 어려워

민주노총 전국공공운수노조 보육지부 회원들이 지난달 28일 오전 정부서울청사 인근에서 '어린이집 페이백 부실조사 사례 발표 및 국민권익위 집단신고'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민주노총 전국공공운수노조 보육지부 회원들이 지난달 28일 오전 정부서울청사 인근에서 '어린이집 페이백 부실조사 사례 발표 및 국민권익위 집단신고'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유치원 원비를 횡령하거나 지원금을 허위로 받으면 원장 자격이 박탈되는 등 책임을 져야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원장이 횡령한 금액을 ‘개인적인 목적’으로 썼다는 구체적 증거가 나오지 않으면 ‘무죄’로 판결나는 경우가 많다. 신고도 제대로 들어오지도 않기에 교육청 입장에서도 불법 행위를 하는 유치원을 적발하기가 쉽지 않다. 교육청 관계자는 “사립유치원 교원의 급여 등 지위를 보장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전수조사를 하지 않는 한 불법 행위를 하나하나 다 찾아내긴 어렵다”며 “원장과 교사가 제출한 서류를 바탕으로 일단 판단을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사립유치원 처우 개선을 위한 활동을 하고 있는 경기도의회 송치용 도의원은 “개인이 문제를 제기했을 때만 개선되는 상황이 아니라 전반적인 사립유치원 교원 지위를 둘러싼 시스템 개선이 필요한 상황”이라며 “또 사립유치원 교사들이 조금 더 용기를 내 적극적으로 위법을 알려야 하고, 동시에 그런 교사를 보호할 수 있는 철저한 제도적 지원이 갖춰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후연 기자 lee.hoo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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