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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찬의 인프라]돈 퍼주고 신용 떨어지면 말짱 도루묵…OECD, 신용경색을 막아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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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인한 신용등급 하락으로 대출을 갚기 위한 재융자의 악순환이 발생하면 금융시장과 경제가 크게 흔들릴 수 있다. AP=연합뉴스

코로나19로 인한 신용등급 하락으로 대출을 갚기 위한 재융자의 악순환이 발생하면 금융시장과 경제가 크게 흔들릴 수 있다. AP=연합뉴스

지난달 기업이 은행에서 빌린 돈이 28조원 늘었다. 3월 증가액(18조7000억원)의 두 배에 육박한다. 두 달 연속 통계 작성 이후 최대치를 갈아치웠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 가동률이 뚝 떨어진 기업의 신용도는 의심받을 수밖에 없었다. 회사채와 기업어음(CP) 시장에서 돈을 조달하기 힘들어졌다. 이전에 발행한 회사채와 CP 상환도 급했다. 결국 은행에서 상환자금과 유동자금을 빌리는 길뿐이었다. 그만큼 자금 사정이 악화했다는 의미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기업의 신용도가 크게 떨어진다. 신용 경색은 포스트 코로나19의 복병이 될 수 있다. 유동성 부족은 부채 부실로 이어지고, 경제회복도 덩달아 더뎌진다.

"정부 지원금 소진하면 도산 기업 속출 위험"…신용등급 낮아 자금 조달도 안 돼

권순원 숙명여대 경영학 교수는 "6월 이후가 걱정이다"고 말했다. "고용유지지원금 지원(90%), 무급휴직지원금 같은 정부 지원금을 다 쓰고, 기업 비즈니스는 못해서 캐시 플로우(현금 유동성)가 없으면 도산하는 기업이 속출할 수 있다. 특히 중견기업이 위험하다"고 덧붙였다. 한국자동차협회에 따르면 이미 완성차 부품업체의 신용도가 1~2단계 하락했다. 이런 업체는 신용등급이 낮다는 이유로 채권담보부증권(P-CBO) 인수 신청에서도 탈락했다. 정만기 자동차산업협회장은 "부품사들의 어려움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며 "낮은 신용등급 때문에 대출을 받을 수 없는 기업을 위한 지원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국가·기업, 줄줄이 신용강등 사태 #돈 빌려 돈 막기 어려워져 출구 안 보여 #"한국도 6월 이후 중견기업 큰 위험"

한국만의 상황이 아니다. 이탈리아, 브라질,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국가의 신용등급이 추락하는가 하면 포드는 투기등급인 정크로 떨어졌다. 디즈니와 글로벌 컨테이너 선사 등 기업의 신용등급 강등도 이어지고 있다.

한국신용평가는 지난달 14일 코로나19 여파로 인한 항공업계의 상환능력 악화를 고려해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항공운임채권 자산유동화증권(ABS) 신용등급을 한단계씩 강등했다. SK이노베이션 등 국내 기업이 줄줄이 강등되거나 강등위기에 몰렸다. 중소기업의 사정은 더 열악하다. 연합뉴스

한국신용평가는 지난달 14일 코로나19 여파로 인한 항공업계의 상환능력 악화를 고려해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항공운임채권 자산유동화증권(ABS) 신용등급을 한단계씩 강등했다. SK이노베이션 등 국내 기업이 줄줄이 강등되거나 강등위기에 몰렸다. 중소기업의 사정은 더 열악하다. 연합뉴스

OECD, "금융시장 급속 붕괴"…신용 경색과 그에 따른 파장 경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도 이런 상황에 주목하며 글로벌 시장의 신용 경색을 최근 경고했다. OECD와 OECD 한국대표부에 따르면 OECD 금융시장위원회는 "코로나19 이전에는 주가지수가 최고치를 기록하고 초저금리 등으로 풍부한 유동성을 확보해 안정적인 모습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코로나19 이후 글로벌 금융시장은 급속히 붕괴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코로나19 이후 금융시장의 동향을 제시하면서다.

고수익 채권을 대상으로 하는 ETF(상장지수펀드)의 회사채 투매로 회사채의 시장 변동성이 커졌다. 여기에다 경기하방 위험이 신흥시장(이머징 마켓)에서 고조되면서 이들 국가의 공공·기업 부채 부실이 늘고 있다. 신흥시장국이 가진 허약한 경제 펀드멘털과 통화 가치를 고려할 때 경기침체에 대응하는 확대재정정책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OECD는 지적했다.

지난해 5월 스페인에서 주택담보대출(모기지)을 갚지 못한 은퇴부부가 자살하는 등 모기지를 둘러싼 사회문제가 심각해지자 주거권을 주장하는 시민모임인 PAH가 은행에 항의 포스터를 붙이며 시위를 벌였다. EPA=연합뉴스

지난해 5월 스페인에서 주택담보대출(모기지)을 갚지 못한 은퇴부부가 자살하는 등 모기지를 둘러싼 사회문제가 심각해지자 주거권을 주장하는 시민모임인 PAH가 은행에 항의 포스터를 붙이며 시위를 벌였다. EPA=연합뉴스

소득 줄어 대출 상환능력 상실한 가계 위험 직면…기업의 채무불이행 위험도 증가

서민 경제의 위험성도 꼬집었다. 고용 감소와 실직자 증가 등으로 가계소득이 줄면서 주택 모기지와 대출 상환 능력이 감소해 주택금융시장의 부실 우려가 증폭되고 있다는 게 OECD의 분석이다. 리츠(부동산 투자신탁회사)와 같은 주택금융 펀드가 시장 가치 하락에 따른 추가 담보를 요구하고, 결과적으로 부동산 금융 유동화 증권(MBS) 시장도 경색된다는 것이다. 국내에서도 이와 관련된 움직임이 있었다. 신한은행이 최근 다세대 주택에 대한 전세자금 대출을 중단하려 했던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시장에선 받아들인다. 아파트는 그나마 회수 가능성이 있지만 빌라나 오피스텔 등에 대한 대출은 회수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 취하려 했던 조치로 보인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유럽중앙은행(ECB) 등 주요 통화 당국이 정책금리를 제로까지 낮추고 양적 완화를 하며 금융시장의 유동성을 일부 개선했다. 그러나 금융시장의 불안정성은 여전히 상존한다는 게 OECD의 판단이다. 특히 "실물 시장이 회복하지 않는다면 다른 분야에서 추가 충격이 발생할 경우 금융시장으로 그 충격이 번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무엇보다 기업의 재융자 부담이 증폭되면 채무불이행(default)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 지금처럼 기업 부채가 증가하는 상황에서는 장기간 유사한 리스크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게 된다고 OECD는 지적했다.

또 지속적인 하방 위험은 은행의 자산가치 하락과 수익성 악화를 불러 금융 부문 발 위기의 실마리가 될 수도 있다고 봤다.

아르헨티나의 마틴 구즈만 경제장관(왼쪽)이 지난달 디폴트를 막기 위한 채무조정 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아르헨티나의 마틴 구즈만 경제장관(왼쪽)이 지난달 디폴트를 막기 위한 채무조정 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이런 분석을 바탕으로 OECD 금융위원회는 신용 경색을 막을 대책을 회원국에 촉구했다.

선진국 신용지원 위한 보호막 장착…소득세까지 납부유예

실직자나 기업에 대한 고용유지 지원 외에 중소기업에 신속한 신용제공을 제공할 특수법인 설립 등으로 실물 발 금융시장 충격을 완화해 나가야 한다고 제안했다. Fed, ECB 등은 기업에 대한 신용제공을 위해 SPV(특수목적법인)를 설립하는 등 안간힘을 쓰고 있다. 독일을 비롯한 선진국도 이런 움직임을 가속화하는 추세다.

하르트무트 자이페르트 독일 한스뵈클러재단 산하 경제사회연구소(WSI) 전 소장은 "유럽은 5400억 유로에 달하는 신용지원이란 거대한 보호막을 펴고 있다"고 말했다. 또 "독일 연방정부는 8197억 유로의 연방 보증을 제공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외에 독일은 판매세, 법인세, 에너지세, 항공세 등의 납부를 유예하는 것은 물론 소득세까지 납부유예 조처를 내렸다. 독일 국책부흥은행이 개인이나 중소기업에 지원·융자하는 돈에 대한 연방정부의 위험인수 비율도 올렸다. 연방정부가 위험을 떠안는다는 의미다.

미국 Fed는 지난달 말부터 투자부적격 등급으로 떨어진 기업의 회사채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손실 위험이 있는 자산을 매입할 수 없는 Fed의 특성을 고려하면 기업의 신용 회복을 위한 초강수 지원책인 셈이다.

한국은 2월 발표한 초급 수준의 지원조차 감감…OECD, "신용경색 억제하라"

한국 정부는 지난 2월 숙박시설 등의 재산세 감면, 항공기 재산세율 한시 인하, 도로점용료 25% 한시 감면조치 등의 기업 지원책을 내놨다. 선진국에 비해서는 상당히 초보적인 수준의 지원책이다. 한데 이마저도 현실화하지 못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 소관의 조례 개정이 늦어지면서 언제 시행될지도 미지수다.

OECD는 "거시경제 당국과 금융감독 당국은 신용규제의 유연성을 완화해 기업과 가계의 신용 경색 발생을 억제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그러면서 초저금리 상황을 활용해 적극적인 확대 재정으로 수요를 진작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소기업과 소상공인 대출 상환을 유예하거나 완화 또는 정부가 지급보증을 해 신용경색을 방지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장기적으로는 금융시스템의 탄력성(resilience)을 강화하기 위한 균형 있는 거시금융정책 마련을 촉구했다.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wols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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