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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철재의 밀담

정부, 방아쇠 당긴 북한에 침묵…허허실실 전술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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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이철재 기자 중앙일보 국방선임기자 겸 군사안보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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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재 군사안보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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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 북한군이 강원도 철원 비무장지대(DMZ)에서 아군 감시초소(GP)를 향해 14.5㎜ 고사총으로 사격했다. 이에 국방부는 북한군의 GP 총격이 일체의 적대행위를 전면 중지키로 한 9·19 남북 군사합의를 위반했다고 지적하면서, 북한에 공식 해명을 요구했다. 그러나 닷새가 지난 8일 북한이 보낸 대답은 적반하장(賊反荷杖)이었다.

북한군 도발에 눈치보는 국방부 #총격·미사일 평가 애써 눈감아 #나약함 숨긴 침묵의 변명 논란

북한은 인민무력성 대변인 명의의 담화에서 지난 6일 공군과 해군이 서해에서 벌인 합동 방어훈련을 “군사 대결의 극치”라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모든 것이 2018년 북남(남북) 수뇌(정상)회담 이전의 원점으로 돌아가고 있다”며 “북남(남북) 군사합의에 대한 전면 역행이고 노골적인 배신행위”라고 주장했다.

북한이 헐뜯었던 서해 합동 방어훈련은 2015년부터 매년 여는 훈련이다. 적이 서해에서 아군 함정을 공격할 경우 해·공군이 함께 반격하는 시나리오로 진행한다. 그러나 북한의 담화에서 3일 총격에 대한 내용은 단 한 글자도 찾을 수 없었다. 북한은 사소한 트집을 잡고 도리어 한국을 나무란 것이다.

북한의 뻔뻔함은 국방부의 원죄와 같다. 국방부 안팎에선 국방부의 로키(low-key) 기조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로키는 원래 사진·방송에서 일부러 사진을 어둡게 하거나, 어두운 화면 분위기를 연출하는 기법이다. 국방부가 북한에 대해 로키를 유지한다는 뜻은 북한을 자극할 수 있는 발표를 삼가겠다는 걸 의미한다. 2018년 세 차례 남북 정상회담이 지핀 남북 화해 분위기의 불씨를 행여라도 군사적 충돌로 꺼트리지 않도록 조심하겠다는 게 국방부의 의도다. 그런데 지금까지 국방부의 로키는 정도가 지나친 나머지 대북 저자세로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총격 사건 당일 군 당국의 백그라운드(비공개) 브리핑이 대표적이다. 당시 브리핑을 담당한 군 관계자는 총격 사건 개요를 설명한 뒤 “현장 지휘관의 판단”이라는 전제를 달고는 ▶안개가 껴 시계가 안 좋았고 ▶북한군 근무 교대 시간이라 화기·장비 시간이 이뤄지는 때이며 ▶북한군 GP 근처 밭에서 총격 전후로 북한군 장병이 농사를 계속 짓고 있다는 등 사실을 나열했다.

합참은 3일 오전 7시 41분쯤 강원도 철원 아군 감시초소(GP)에 북한군 총탄 수발이 피탄됐다고 밝혔다. 군은 매뉴얼에 따라 경고 방송 및 사격 2회를 실시했다. 사진은 철원 화살머리 고지 GP에서 휘날리고 있는 태극기와 유엔기. [뉴스1]

합참은 3일 오전 7시 41분쯤 강원도 철원 아군 감시초소(GP)에 북한군 총탄 수발이 피탄됐다고 밝혔다. 군은 매뉴얼에 따라 경고 방송 및 사격 2회를 실시했다. 사진은 철원 화살머리 고지 GP에서 휘날리고 있는 태극기와 유엔기. [뉴스1]

‘총격이 도발이냐 오발이냐’는 질문이 나오기도 전에 군 관계자가 친절하게도 의도적 총격이 아니라고 먼저 알려준 것이다. 이후 국방부와 군 당국의 입장은 한결같이 ‘총격에 의도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대응 사격의 과정을 상세하게 밝혀달라는 언론의 요구에 대해선 “관련 조사가 끝난 뒤 공개하겠다”고만 응답하고 있다. 조사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우발적 총격이라고 사실상 결론을 내린 것이다. 이를 보면 국방부와 군 당국의 로키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지 궁금하다. 정부의 남북 협상을 돕는 차원을 벗어나 북한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지난해 ‘발사체’ 논란은 국방부 로키의 폐해를 보여준다. 북한은 지난해 13차례 탄도미사일을 쐈다. 처음에 군 당국은 이를 ‘발사체’라고 표현하더니, 나중엔 ‘미사일’로 평가했다. 탄도미사일이라면 2018년 남북, 북·미 회담의 성과가 깨진 것으로 볼 수 있고, 사거리와 상관없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위반이었다. 이를 의식한 군 당국이 탄도미사일을 인정하기가 힘들 것이었다. 나중에 군 당국은 13차례 모두 탄도미사일이라는 자료를 국회에 슬쩍 제출했다. 하마터면 한국의 최대 위협인 북한의 탄도미사일을 제대로 분석하지 못 할 뻔했다.

고고도 무인 정찰기인 글로벌호크의 도입 과정에서도 로키 잡음이 들렸다. 20㎞의 고도에서 지상 30㎝ 크기의 물체를 구별할 수 있는 글로벌호크는 북한뿐만 아니라 주변국을 상대하는 데 필요하다. 국방부와 군 당국은 글로벌호크가 한국에 도착한 사실을 숨겼다. 관련 기사가 나가면 대대적인 보안조사에 나서 입단속을 했다. 8800억원이 넘는 도입 예산을 낸 국민의 알권리는 무시됐다.

군 내부에서도 북한이 불편해할까 글로벌호크를 감춘다는 얘기가 나왔다. 이와 같은 과민 대응은 글로벌호크가 결국 북한을 노리는 무기임을 국방부가 입증하는 것과 다름없다. 철저한 보안 속에서도 공군 기지 주변에서 밤을 새운 사진 기자가 활주로에 내린 글로벌호크를 찍었다. 해리 해리스 주한 미 대사는 트위터에 격납고에 보관 중인 글로벌호크의 사진을 올려 국방부를 무안하게 만들었다.

국방부가 알아서 기니 북한이 오히려 당혹해 한다는 해석이 나온다. 북한이 도발하면 한국이 이에 반발해야 도발의 효과가 있다. 그러나 한국이 아무 일 없다는 듯 모른 척하니 북한 입장에선 도발이 수지가 안 맞는 셈이 된다. 국방부와 군 당국이 갑자기 수가 확 높아져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려고 허허실실(虛虛實實) 전술을 구사한 것은 아닐 것이다. ‘침묵은 금’이라는 격언이 있다. 그러나 결연한 행동이 뒷받침하지 않는 침묵은 나약함에 대한 궁색한 변명일 뿐이다.

이철재 군사안보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