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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O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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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권근영 JTBC 스포츠문화팀장

권근영 JTBC 스포츠문화팀장

술이 여러 잔 돌자 흥이 올랐습니다. 먹을 갈게 해 음식점 새로 도배한 벽에 큼직하게 썼답니다. ‘취시선(醉是僊)’, 취하면 곧 신선이라. 1976년의 일입니다. 일행 중 하나가 다음날 식당에 다시 가서 주인에게 도배를 새로 해 주마고는 글을 조심조심 떼어 배접한 것이 오늘에 남았습니다. 낭만이 살아있던 시절의 이야기죠. 미색 바탕에 구불구불 가늘고 길게 휘갈겼습니다. 가로 430㎝에 세로 194㎝ 크기여서 서예가는 춤추듯 있는 대로 팔을 뻗으며, 온몸으로 글을 썼을 것 같습니다.

제주 서귀포의 서예가 소암 현중화(1907~97)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취필(醉筆)’입니다. 무림 고수가 흐트러진 스텝과 허우적거리는 손놀림의 ‘취권(醉拳)’으로도 내공을 보여주듯 소암의 글은 술 취해 적는 날아갈 듯한 속필에도 탄탄한 조형미가 살아 있습니다. 읽지 못해 서예를 외면하는 오늘날에도 그의 글을 사랑하는 이들이 많은 이유입니다.

현중화, XO뿐, 1989, 종이에 먹, 34.8x135.9㎝. [소암기념관 소장]

현중화, XO뿐, 1989, 종이에 먹, 34.8x135.9㎝. [소암기념관 소장]

이 글(사진)도 독특합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XO뿐’, 딱 세 글자를 빠르게 썼습니다. ‘기사년(1989) 초여름 광주 데모 때 그날, 서귀소옹’, 제발은 이렇습니다. 서예에서 알파벳을 만날 줄도, ‘데모’라는 외래어를 보게 될 줄도 몰랐습니다. ‘그날’ 두 글자에 사연이 있습니다. 김찬호 경희대 교수에 따르면 소암은 1980년 5월 목포 소묵회를 지도하고 광주에 갔습니다. 5·18의 참혹한 현장을 본 게지요.

그리고 9년 뒤 5월, 여든 두 살의 서예가는 잊을 수 없던 그때의 한탄을 종이에 옮겼습니다. 마른 붓 들어 친 가위표에 붓털이 그대로 곤두서 있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간할 수 없는 세상, ‘오 아니면 엑스, 중간은 없다, 당신은 어느 편이냐’ 몰아세우던 시대에 대한 울분이 담겼을까요.

소암은 18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 정경학부를 마치고 일본의 서예 대가 두 사람에게 10여년 간 서예 지도를 받았습니다. 때문에 남과 다른 창의적인 서체가 종종 ‘왜색’으로 오해받았습니다. 그러나 소암은 “글씨로 일본을 이기고자 했다”고 돌아봤습니다. 일본의 공모전을 휩쓸다가 1955년 귀국해 제주사범학교·서귀중학교 등에서 교사로 재직하며 계속 썼습니다. 구순까지 제주에서 지내며 만년에는 먹고 잠자는 외에는 오로지 쓰기에만 몰두했습니다.

사람은 갔지만 글씨는 남았습니다. 소암을 비롯해 소전 손재형, 갈물 이철경, 일중 김충현 등 근현대 서예가들의 글씨는 코로나19로 최근 다시 문을 연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미술관이 개관 50년 만에 처음 여는 서예전입니다.

‘XO뿐’에는 또 다른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술을 즐기던 소암이 특히 좋아한 것은 헤네시 XO코냑이었다고….

권근영 JTBC 스포츠문화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