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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그깟 밥, 찌개가 뭐라고…고향이 되고 추억이 될까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홍미옥의 모바일 그림 세상(52)

동네엔 소박한 식당이 있다. 요즘 오르내리는 말 그대로 골목식당이다. 그렇다고 SNS에 오르내리는 소문난 맛집은 물론 아니다. 외양을 보자면 언제 페인트칠을 했는지 가늠이 가지 않는 이상한 색을 입고 있다. 드르륵 열리는 출입문은 본의 아니게 요즘 유행인 레트로풍처럼 낡아서 오히려 눈에 띌 정도다.

메뉴는 아주 간단하다. 그냥 찌그러진 양푼에 담긴 찌개 두어 가지와 고등어구이다. 그래선지 회사의 회식이나 모임을 위해 오는 손님들은 찾아볼 수가 없다. 물론 데이트족은 눈을 씻고 봐도 없다. 하지만 정과 사연이 있는 편한 밥집이다.

음식에는 각자의 추억이 하나쯤 있다. 작은 동네식당의 평범한 음식에도 사람들은 위로를 받곤 한다. 갤럭시탭S6 아트레이지. [그림 홍미옥]

음식에는 각자의 추억이 하나쯤 있다. 작은 동네식당의 평범한 음식에도 사람들은 위로를 받곤 한다. 갤럭시탭S6 아트레이지. [그림 홍미옥]

비엔나 문어 소시지와 고등어구이

“하루가 끝나고 사람들이 귀가를 서두를 무렵, 나의 하루는 시작된다. 영업시간은 자정에서 아침 7시. 사람들은 이곳을 ‘심야 식당’이라 부른다. 손님이 원하는 메뉴가 있으면 가능한 한 만들어 주는 게 영업 방침이다. 손님이 오느냐고? 그게, 꽤 온다니까.”

식당 주인의 독백으로 시작하는 심야식당은 만화가 원작이지만 드라마로도 인기가 대단했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정식 메뉴는 두어 가지에 불과하다. 하지만 손님의 고민을 풀어주는 위로의 메뉴는 수를 헤아릴 수 없다. 손님 중에는 한밤중에도 새까만 선글라스를 쓰고 나타나는 현직 야쿠자가 있다. 생김새답게 공포스런 분위기로 등장하지만, 그가 먹고 싶은 건 의외로 문어 모양으로 칼집을 낸 비엔나소시지다. 그와는 어울리지 않게 귀엽기까지 한 음식이다.

누구나 음식에 얽힌 추억 하나쯤은 가지고 있게 마련이라고 한다. 그 살벌한(?) 야쿠자도 비엔나소시지처럼 순수한 추억을 간직한 게 틀림없다. 비록 현실은 어두울지라도 음식을 통해 순수했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여기, 동네식당에도 시간을 넘나들며 추억을 소환하는 음식이 있다. 취준생으로 보이는 슬리퍼 차림의 청년 둘이 둥그런 식탁을 차지하고 앉아있다. 근처의 고시원에서 밤낮으로 공부에 매달리고 있을 청년의 말투엔 남쪽 억양이 진하게 묻어났다.

식당 주인이 내어 온 노릇노릇한 고등어를 보더니, 목청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좁은 고시원에서 지내다 보니 환기 때문에 생선구이는 언감생심 꿈도 못 꾼다는 거다. 남쪽 바닷가 어디쯤이 고향이라는 청년은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고등어구이 앞에서 마냥 좋은가보다. 울 엄마는 특히 이걸 잘 굽는다느니, 우리 동네에선 이걸 갈비처럼 뜯어 먹는다느니 이야기가 끊이질 않는다. 대놓고 말은 안 했지만 엄마가 보고 싶은 게 틀림없다. 때론 음식은 냄새로 맛으로 시간을 돌리기도 하고 온갖 추억을 가져다주기도 하니까.

도통 친절해 보이지 않던 주인은 청년들에게 공깃밥을 툭 던지듯 놓고 간다. 우리 식당은 공깃밥이 무한리필이라는 말과 함께. 따뜻하다. 갓 지은 공깃밥처럼.

고향을 떠올리게도 만들고 하루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기도 한다는 동네식당의 고등어구이와 김치찌개. [사진 홍미옥]

고향을 떠올리게도 만들고 하루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기도 한다는 동네식당의 고등어구이와 김치찌개. [사진 홍미옥]

그깟(?) 밥이, 찌개가 뭐라고!

연이어 밖이 소란스럽다. 드르륵 문이 열리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근처 공사장에서 일하는 작업 인부들인 모양이다. 큰 공사는 아니어서 식사를 대어주는 곳이 없는지 동네식당에 자주 들르는 모양이다. 안전모를 벗으며 땀을 닦는 그들의 옷엔 페인트 자국과 건설 현장의 냄새가 가득 묻어있다. 이쁘고 깔끔한 식당이었다면 아마 주인이 눈살을 찌푸렸을지도 모를 복장인 셈이다.

주인과 요란하게 한바탕 인사가 오갔다. 어라? 주문하지 않았는데도 주인은 푸짐한 김치찌개를 들고 온다. 알아서 척척이다. 마치 퇴근 후 돌아온 가족들에게 따스한 밥상을 차려주는 그런 풍경이다. 손님들은 일이 힘들어도 여기 김치찌개만 먹으면 힘이 솟는다며 너스레를 떨기도 한다. 듣자 하니 집을 떠나 석 달 동안 공사장 일을 맡게 되었나 보다. 가끔은 힘도 들고 가족도 그립지만, 이 찌개 한 숟갈에 위로가 된다는 말을 곁들인다. 식당을 하는 사람이라면 아마 최고의 찬사지 싶다. 하지만 시종일관 뚱한 표정의 주인, 한마디를 하고 지나간다.

‘아! 그깟 김치찌개가 뭐라고…. 참, 어서 들기나 해요 식기 전에.’

정말 그깟(?) 찌개가 뭐라고! 고향을 떠올리게도 하고 가족을 불러오기도 하고 추억을 통째로 소환하기도 하는가 말이다. 주인도 손님도 하나같이 정답다.

어릴 적, 밥상에 갈치구이가 오를 때면 엄마는 유난히 밥을 늦게 드시곤 하셨다. 아직 젓가락질이 서툰 자식들에게 가시를 발라 주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엄마가 발라주신 생선 살을 담쏙담쏙 받아먹던 나는 오십이 훌쩍 넘은 중년이 되었다. 그리고 이젠 갈치구이의 가시를 찾아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게 되었다.

사십 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노릇하게 구워진 갈치토막을 보면 나도 모르게 침이 고이고 엄마가 생각난다. 사는 게 힘들거나 허전할 때 우리는 음식으로 위로받곤 한다. 그게 시장통 떡볶이든 혹은 소문난 맛집의 대표요리든지 말이다. 허구한 날 다이어트 건강식을 외치지만 정작 날 토닥여주는 음식 한가지쯤은 따로 있을 게다. 오늘 우리들의 하루는 어떤 음식으로 위로받았을까?

그나저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내 앞에 놓인 기름 자르르 밴 고등어구이는 식기 전에 얼른 먹는 게 최선이다.

스마트폰 그림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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