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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성범죄, 함정 수사 합법화할 필요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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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곽대경 동국대 경찰사법대학 교수

곽대경 동국대 경찰사법대학 교수

n번방 사건을 통해 아동과 미성년 여자 청소년을 대상으로 성 착취 동영상을 제작·유포하는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우리 사회의 반감이 상당하다는 게 드러났다. 그동안 이러한 문제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원인을 파악하고, 앞으로 유사 사건의 발생을 줄일 수 있는 대책을 세우는 건 이 시점에서 필요한 작업이다.

아동 음란물 소지만 해도 엄벌 #일벌백계 더 이상 늦출 수 없어

피해자들의 엄청난 고통에도 불구하고 가해자들은 별다른 죄의식 없이 디지털 범죄를 저지르는 것일까? 그동안 우리 사회에 누적된 왜곡된 성 의식과 사생활을 파괴하는 관음증 문화가 한 가지 이유가 될 것이다. 비판 여론을 의식해 공론의 장이 아닌 은밀하게 소통되는 온라인 공간을 이용한 것이 이번 사건이다. 나이 어린 인터넷 이용자는 사이버상에서 구속과 압박에서 벗어나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다는 데 매력을 느끼고, 또래 여성들을 협박해 성 착취 영상을 만들어 퍼뜨리는 과정에서 우월 의식과 권력을 휘두르는 기분을 맛보았을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우리 사회의 미온적 대응 때문이다. 세계 최대 아동 음란물 사이트인 웰컴투비디오(W2V) 운영자 손 모(23)씨는 22만 건을 유통했음에도 우리 법원이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했다. 반면 미국·영국에선 아동 음란물을 다운받거나 소지만 해도 엄한 처벌을 받는다. 미국에서는 아동 음란물을 소지만 해도 최대 징역 10~20년형이 주어진다. 미국 법무부 자료에 따르면 아동 음란물 유죄 판결 중 60%는 5년 이상의 징역형이었다. 영국에서는 5세 아동을 성폭행하는 아동 음란물을 제작·공유한 혐의로 22년형을 선고받은 사례가 있고, 공조 수사에 추적 단서를 제공한 한 아동 성애자는 지구물리학자라는 신상 공개와 함께 아동 성폭행 및 동영상 공유 혐의로 25년을 선고받았다. 우리도 아동 성 착취 영상을 소지만 해도 무겁게 처벌하는 미국식 제도 도입을 검토해야 한다.

또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의 보호와 2차 피해 예방을 위한 다양한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피해자 요구가 있으면 성인물 사이트에서 해당 동영상을 바로 삭제하고, 이를 어길 경우 강력하게 처벌하는 방안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피해자들이 2차 가해라고 판단하고 증거를 확보해 법적인 문제를 제기한다면 사이버상 명예훼손 등의 혐의를 2차 가해자들에게 적용하는 방안도 강구해야 한다. 이에 더해 신분 위장 수사를 합법화하는 것도 전향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동안 경찰은 법적 한계와 제도적 문제로 인해 함정 수사에 소극적인 면이 있었지만, 수사관의 신분 위장 허용을 추진함으로써 엄정한 수사 의지를 표명한 만큼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법적·제도적 장치 마련에 정부와 국회가 나설 필요가 있다.

n번방 사건과 같은 디지털 성범죄 규제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범죄 대상과 기준 등 범죄 구성 요건을 구체화하고, 디지털 성범죄의 온상이 된 텔레그램 등 해외 플랫폼에 대한 실질적 규제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 해외 수사기관과의 정보 교류와 업무 협조를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시민 제보나 신고를 활성화하고 시민 참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동시에 공익 신고자의 안전을 보장하는 방책을 서둘러 강구해야 한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디지털 성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죄에 비해 매우 약한 처벌을 받았다는 지적에 대해 법원은 깊이 고민해서 국민 법감정과 판결 사이의 간격을 좁히기 위해 진지하게 노력하길 소망한다. 이번 사건이 우리 사회에서 디지털 성범죄를 획기적으로 줄이는 종합적인 대책이 마련되는 의미 있는 출발점이 되어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기를 염원한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사법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