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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맥주병, 주스병도 예술이 될 수 있다…수선하는 삶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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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투명한 갈색빛의 컵은 단정하면서도 세련된 느낌이다. 청아한 녹색 빛을 띠는 컵은 식탁에 훌륭한 포인트가 될 것 같다. 흰색의 무광 컵은 군더더기 없이 단순하면서도 소박한 멋이 있다. 반듯한 선이 살아있는 컵 옆에는 동그란 손잡이가 달려있다. 손에 직접 들어보니 제법 맞춤하다.

박선민 작가의 유리병 업사이클링 작품, '리 앤티크 시리즈.' 사진 516 스튜디오

박선민 작가의 유리병 업사이클링 작품, '리 앤티크 시리즈.' 사진 516 스튜디오

“이게 맥주병이라고요?”

역시 작가가 만든 수공예품다운 기품이 느껴진다는 생각이 들던 찰나였다. ‘리 보틀 메이커’라는 활동명으로 유리 공예품을 만들고 있는 박선민 작가가 탁자 위에 올려둔 컵을 들어 요리조리 살펴봤다. 녹색 컵을 뒤집어보니 그제야 하단에 330mL라는 작은 글씨가 보인다. 유명한 중국 맥주 브랜드의 병을 가공해 만든 것이다. 갈색 컵 역시 맥주병 바닥에서 흔히 보이는 오돌토돌한 요철이 그대로 살아있다. 우리가 흔히 마시는 갈색 수입 맥주병이 그 원형이다. 흰색 무광 컵의 정체는 빗살무늬가 특징인 식이섬유 음료다.

컵의 하단을 뒤집어 살펴보기 전까지는 버려진 유리병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쉽게 알기 어렵다. 김상선 기자

컵의 하단을 뒤집어 살펴보기 전까지는 버려진 유리병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쉽게 알기 어렵다. 김상선 기자

누군가에게 한 모금의 청량감을 선사하고 무심히 버려졌던 유리병이 작가의 손에서 귀한 수공예품으로 다시 태어났다. 버려진 유리병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을 하는 유리 공예가 박선민(38) 작가의 솜씨다. 재활용품에 디자인 또는 활용도를 더해 가치를 더욱 높이는 ‘업사이클링(up-cycling)’ 개념에 이만큼 부합하는 작품이 또 있을까.

8일 서울 신사동 '플레이스1-3'에서 업사이클링 유리 공예가 박선민 작가와 인터뷰 했다. 김상선 기자

8일 서울 신사동 '플레이스1-3'에서 업사이클링 유리 공예가 박선민 작가와 인터뷰 했다. 김상선 기자

국민대학교 디자인 대학원에서 유리 공예를 배운 박선민 작가는 2014년 동료 작가가 제주에서 기획한 '바다 쓰레기를 활용해 주얼리나 오브제를 만드는' 업사이클링 전시에 참여하면서 처음 유리병 작업을 시작했다. 당시 박 작가는 바닷가에 버려진 유리병을 수거해 병을 자르고 재조합해 화병 형태의 오브제를 만들었다. 박 작가는 “곡선이 멋진 와인병이나 표면에 근사한 무늬를 가진 음료병 등 폐유리병을 자세히 관찰하다 보니 한 번 쓰고 버리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버려진 유리병을 작품 소재로 활용하게 된 이유다.

버려진 맥주병과 와인병, 주스병을 잘라 재조합하고 금속 장식 등을 더해 만든 작품들. 2017년 작, '리 보틀 시리즈'. 사진 박선민

버려진 맥주병과 와인병, 주스병을 잘라 재조합하고 금속 장식 등을 더해 만든 작품들. 2017년 작, '리 보틀 시리즈'. 사진 박선민

이후 전체 작품의 70~80% 정도를 버려진 유리병으로 작업하는 다소 특이한 유리 공예가가 됐다. 버려진 맥주병과 와인병, 주스 병과 양주병 등을 활용해 화병도 만들고 컵도 만들고, 그릇도 만든다. 언뜻 봐서는 폐유리병으로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공예품으로서의 완성도가 높다.

필환경 라이프? 리 보틀 메이커 박선민 작가

“모든 유리병이 다 재활용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국내 브랜드 주류 병의 경우 수거해 가서 재사용하지만, 수입 브랜드 주류 병이나 음료병은 그대로 폐기 돼요. 그냥 일반 쓰레기인 거죠. 유리병이 분해되는 데 수백만년이 걸린다고 해요. 버려지는 병들을 지속해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게 됐어요.”

박선민 작가의 작업실 한 켠에는 쓰임을 다한 다양한 유리병들이 놓여있다. 사진 플레이스 1-3

박선민 작가의 작업실 한 켠에는 쓰임을 다한 다양한 유리병들이 놓여있다. 사진 플레이스 1-3

실제로 유리병은 브랜드에 따라, 제조업체에 따라 모두 다른 유리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같은 브랜드 제품이 아니면 녹여서 재활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팽창 계수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나마 국내 제품은 동일한 수량이 많아 세척해 재사용하거나 녹여서 재활용할 수 있다. 하지만 수입 제품의 유리병은 워낙 종류가 다양해서 한 데 모아 재활용하기 어렵다. 특히 수입 맥주병 문제가 심각하다. 모두 제각각 다른 소재의 유리병으로 재활용도 안 되는데 버려지는 수가 워낙 많다. 수입 맥주의 인기가 높은 요즘 추세가 한몫했다.

유리병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기 위해 자르는 과정. 사진 플레이스 1-3

유리병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기 위해 자르는 과정. 사진 플레이스 1-3

새로운 유리 공예품을 만드는 것과 폐유리병으로 공예품을 만드는 것, 어느 쪽이 더 어려울까. 버려진 유리병을 다듬는 게 더 쉽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결코 아니다. 유리컵에 달린 손잡이 링 하나를 만드는 데만도 거의 10단계의 과정을 거친다. 박 작가는 “수거해서 세척한 뒤 라벨을 제거하고, 절단한 후 여러 단계의 연마 작업을 거쳐 마감 작업을 하기까지 시간과 노력이 생각 이상으로 많이 든다”며 “컵 10개를 만드는데 거의 2~3일이 걸린다”고 했다.
특히 일상에서 사용하는 컵이나 그릇, 화병이다 보니 유리병을 절단한 면을 곱게 가는 연마 과정에 공을 들인다. 어떤 경우 연마 과정만 7~8단계를 거치기도 한다. 박 작가는 “재활용(리사이클링)과 업사이클링의 개념을 혼동해 업사이클링 제품의 격을 낮춰보는 경우가 있다”며 “그런 만큼 완성도와 미감에도 공을 들인다”고 했다. 버려진 유리병으로 만들었지만, 오래 곁에 두고 사용하고 싶은 아름다운 제품을 만들고자 노력한다. 박 작가의 작품이 누군가 귀띔해주지 않으면 버려진 유리병으로 만들었다는 생각을 못 할 만큼 근사한 이유다.

일상에서 쓰이는 공예품을 만들다보니 연마 작업에 특히 공을 들인다. 사진 플레이스 1-3

일상에서 쓰이는 공예품을 만들다보니 연마 작업에 특히 공을 들인다. 사진 플레이스 1-3

다만, 이왕 버려진 유리병을 활용하는 만큼 유리병이 가진 본래의 미감을 활용하는 편이다. 예를 들어 카페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동그란 형태의 애플 주스 병의 경우 상단의 나뭇잎 양각 무늬를 활용해 촛대를 만든다. 병이 가진 본래의 특징을 활용해 가치를 높이는 것이다. 유리병만으로는 소재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다양한 소재를 섞기도 한다. 도자기로 굽을 만들어 붙인다든지, 금속으로 핸들이나 장식을 만들어 활용한다. 또는 유리병에 액체로 된 금을 발라 구워 새로운 질감을 만들어 보는 등 다양한 실험도 하고 있다. 최근에는 유리병을 붙일 때 접착제를 사용하지 않고 열처리를 이용해 조합하는 방안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본래 유리병이 가진 미감을 작품에 활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주스 병의 나뭇잎 무늬를 살린 예. 사진 플레이스 1-3

본래 유리병이 가진 미감을 작품에 활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주스 병의 나뭇잎 무늬를 살린 예. 사진 플레이스 1-3

박 작가의 이런 노력이 빛을 발해 지난해에는 KCDF(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에서 진행한 ‘2019 공예디자인 스타상품’에 선정됐다. 그의 유리병 작업은 서울 청담동 그릇 편집숍 ‘정소영의 식기장’, 삼청동 ‘아원공방’, 인사동 ‘KCDF 갤러리 숍’, 한남동 ‘구호 플래그십 스토어’ 등에서 만나볼 수 있다.

지난해 8월 갤러리밈 2층에서 '이달의 작가'로 전시를 열었을때 선보였던 유리병 업사이클링 작품들. 사진 박선민

지난해 8월 갤러리밈 2층에서 '이달의 작가'로 전시를 열었을때 선보였던 유리병 업사이클링 작품들. 사진 박선민

오는 13일부터는 서울 신사동에 위치한 라이프 스타일 편집숍 ‘플레이스 1-3’에서 작은 전시도 연다. ‘수선하는 삶’이라는 타이틀로 3명의 작가가 릴레이 전시를 하는데, 그중 한 명이 박 작가다. 전시 ‘수선하는 삶’은 새로운 자극과 상품이 넘쳐나는 도시에서 ‘수선’의 가치를 이야기하고자 마련된 전시다. 지난 4월 15일에는 도자기 수리 전시가 열렸다. 13일부터는 박선민 작가가 그동안 유리병 업사이클링으로 작업한 거의 모든 시리즈를 모아 보여주는 자리가 마련된다.

도자기 수리부터, 유리병 새활용, 책 수선까지 세 작가의 릴레이 전시가 이어진다. 사진 플레이스 1-3

도자기 수리부터, 유리병 새활용, 책 수선까지 세 작가의 릴레이 전시가 이어진다. 사진 플레이스 1-3

“세상에 물건이 이렇게 많은데 하나를 더한다는 게 가끔 부담스러웠어요. 그래서 하나를 더 늘리기보다 이미 존재하는 것을 소재로 활용해 공예로 풀어내고자 합니다. 요즘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작가로서 고민해야 하는 부분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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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연 기자 yoo.jiyo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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