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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인 살해 미군 용의자 무죄, 반정부로 비화한 반미운동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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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5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25〉

청년 구국단은 5·24 반미운동에 동원된 장징궈의 친위세력이었다. 기자들에게 구국단 설립 취지를 설명하는 장징궈. 1952년 봄 타이베이. [사진 김명호]

청년 구국단은 5·24 반미운동에 동원된 장징궈의 친위세력이었다. 기자들에게 구국단 설립 취지를 설명하는 장징궈. 1952년 봄 타이베이. [사진 김명호]

국부(國府·국민당 정부)의 대만 천도 반년 후, 한반도가 전쟁터로 변했다. 총통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한국전쟁이 3차 세계대전으로 번지기를 바랐다. 유엔군이 결성되자 참전을 희망했다. 미국이 불허하자 차선책을 강구했다. 반공을 전제로 미국과 함께 대륙 수복을 꿈꿨다. 워싱턴의 집권자들은 현실주의자였다. 국무장관 덜레스는 “벼랑 끝 전술”과 “봉쇄정책”을 폈다. 장제스가 갈망하던 대륙 수복은 입에도 담지 않았다. 국민당의 반공을 지지하며 대만 보위에만 신경 썼다.

반공으로 대륙 수복 꿈꾼 장제스 #미국 불허로 한국전쟁 참전 무산 #불만 내색 않고 일기에 미국 욕 써 #국민당 타자수 살해 용의자 미군 #미국은 치외법권 주장하며 감싸 #재판 열린 지 3일 만에 무죄 선고

장징궈, 5·24 반미운동 배후로 의심받아

1954년 12월 공동방위조약에 서명하는 대만 외교부장 예궁차오와 미 국무장관 덜레스. 뒷줄 오른쪽 첫째는 주미대사 구웨이쥔(顧維鈞). [사진 김명호]

1954년 12월 공동방위조약에 서명하는 대만 외교부장 예궁차오와 미 국무장관 덜레스. 뒷줄 오른쪽 첫째는 주미대사 구웨이쥔(顧維鈞). [사진 김명호]

장제스는 국부의 존망이 미국의 손에 달린 것을 의심치 않았다. 미국에 불만이 많아도 내색은 안 했다. 일기에만 미국 욕을 써댔다. 아들 장징궈(蔣經國·장경국)에게 감정을 잘 조절하라는 충고를 자주했다. 정보기관을 장악하고 있던 장징궈는 대만에 미칠 미국의 영향력을 두려워했다.  군 간부들에게 경고했다. 애국주의를 내세웠다.

“미군의 문란한 사생활이 중국인의 정신건강을 오염시킨다. 미 군사고문들과 사적인 접촉을 엄금한다.” 1957년 3월 류즈란(劉自然·유자연)사건이 발생하자 미국에 보복했다. 대만 원로 언론인이 구술을 남겼다. “장징궈가 5·24 반미운동을 부추겼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없다.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합리적인 가정은 가능하다. 사건의 전개과정을 보면 장징궈는 혐의를 벗어날 방법이 없다.”

1957년 3월 20일 자정 무렵 미 군사고문단 상사 레이놀드가 양밍산(陽明山)의 미군 군속 숙소 인근에서 국민당 혁명실천연구원 타자수 류즈란을 살해했다. 양밍산경찰 분국은 외사 담당자를 현장에 파견했다.

레이놀드가 사건 내용을 설명했다. “취침 중 처가 욕실에서 비명 지르며 뛰쳐나왔다. 창밖에서 누가 훔쳐본다며 공포에 질린 표정이었다. 나는 총을 들고 후원으로 나갔다. 한 남자가 허리를 구부리고 욕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내가 누구냐고 고함을 지르자 벌떡 몸을 펴고 내게 달려들었다. 손에 각목을 들고 있었다. 나는 얼떨결에 방아쇠를 당겼다. 괴한은 잠시 비틀거리더니 가슴을 움켜쥐고 공원 쪽으로 뛰어갔다. 다시 한 발을 발사했다.”

외사 담당 경찰관도 보고서를 남겼다. “현장에서 각목을 발견하지 못했다. 욕실도 가봤다. 건조하고 사용한 흔적이 없었다. 정당방위라는 레이놀드의 주장에 웃음이 나왔다. 수갑을 채워 연행하려는 순간, 미군 헌병이 들이닥쳤다. 치외법권을 주장했다. 나는 맥이 빠졌다.”

양밍산경찰 분국의 보고를 받은 외교부는 미국 대사관과 교섭했다. 방침이 정해지자 외교부장 예궁차오(葉公超·엽공초)가 미국대사 옐친을 외교부로 초치했다. “사건이 해결되기 전까지 레이놀드는 대만을 떠날 수 없다. 재판은 대만에서 열려야 한다. 재판은 공정하고 신속하게 끝내기 바란다.” 옐친도 동의했다.

천융셴은 천잉쩐(陳映眞)이라는 필명으로 양안의 문단에 큰 족적을 남겼다. 1968년 루쉰과 마르크스의 책을 소지했다는 이유로 7년간 감옥 밥을 먹었다. 1985년 11월 ‘잊혀진 약자’를 주제로 창간한 『人間雜誌』는 대만 반체제 지식인의 보루였다. 창간 당일 동인과 함께한 천잉쩐. [사진 김명호]

천융셴은 천잉쩐(陳映眞)이라는 필명으로 양안의 문단에 큰 족적을 남겼다. 1968년 루쉰과 마르크스의 책을 소지했다는 이유로 7년간 감옥 밥을 먹었다. 1985년 11월 ‘잊혀진 약자’를 주제로 창간한 『人間雜誌』는 대만 반체제 지식인의 보루였다. 창간 당일 동인과 함께한 천잉쩐. [사진 김명호]

가해자와 피해자가 어떤 사이였는지는 아직도 미궁이다. 사건 직후부터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대만과 홍콩의 언론들이 연일 대서특필했다. 대표적인 것 몇 가지만 소개한다. “두 사람은 아는 사이였다. 레이놀드는 미군고문단에서 약품 공급을 담당했다. 마약을 몰래 빼내 류즈란을 통해 암시장에 팔았다. 나쁜 놈이 나쁜 놈을 죽인 사건이다.” 이런 내용도 있었다. “레이놀드가 군사고문단 PX에서 구입한 물건을 류가 시장에 처분했다. 서로 계산이 맞지 않아 충돌이 발생했다.”

여자 문제도 빠질 리 없었다. “레이놀드는 중국 여자를 유난히 밝혔다. 류즈란과 그렇고 그런 사이인 중국 업소 여인을 레이놀드가 건드렸다. 화가 난 류가 레이놀드를 패 죽이겠다며 갔다가 총을 맞았다.” 홍콩의 ‘신문천지(新聞天地)’가 류즈란의 친구를 인터뷰했다.

5·24 반미운동은 반정부 운동으로 번질 기미를 보이자 군인을 동원해 진압했다. 1957년 5월 24일 오후, 타이베이 미국대사관. [사진 김명호]

5·24 반미운동은 반정부 운동으로 번질 기미를 보이자 군인을 동원해 진압했다. 1957년 5월 24일 오후, 타이베이 미국대사관. [사진 김명호]

“둘은 친구 사이였다. 류즈란은 레이놀드가 미군 장비와 PX에서 구입한 물건을 시장에 파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미군 군율에 의하면 본국 송환 감이었다. 류는 툭하면 레이놀드에게 군율을 들먹이며 협박했다. 가끔 주먹질도 오갔다. 류는 무술에도 능했다. 레이놀드에겐 버거운 상대였다.”

5월 20일 첫 재판이 열렸다. 법정은 미국인과 외국 기자들 천지였다. 배심원도 중국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미군은 대만기자 3명만 취재를 허용했다. 검찰과 변호인도 모두 미국인이었다. 대만 언론은 선고를 앞두고 류즈란의 부인 아오터화(奧特華·오특화)가 중국인들에게 보낸 공개편지로 도배했다.

“군사 법정은 공정과 성실을 찾아볼 수 없었다. 미국 군인에게 중국인의 생명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미물이란 말인가? 저 흉악한 것들은 억울하게 죽은 남편의 명예를 난도질했다. 경찰 조사에 의하면 피고의 욕실은 수도꼭지를 튼 흔적도 없었다.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하면 앞으로 얼마나 많은 류즈란이 줄을 이을지 모른다. 우리는 더 이상 생명과 인권을 보장받을 곳이 없다. 나는 사회를 향해 통곡한다.” 침략군이란 말만 사용하지 않았을 뿐, 대만주둔 미국인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문제 삼은, 간단한 내용이었지만 힘이 있었다.

피살자 부인의 침묵시위로 새 국면 맞아

미군 군사 법정은 3일 만에 레이놀드의 무죄선고로 막을 내렸다, 이튿날 미국대사관 앞에서 벌어진 아오터화의 무성시위로 새로운 막이 올랐다. 타이베이 청궁(成功)고중 재학 중이던 천융셴은 30여년 후 당시를 회상했다.

“5월 24일 오후 집에서 점심 먹고 학교에 놀러 갔다. 교정에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군사훈련 교관이 학생들 인솔해 미국대사관에 시위하러 갔다는 말 듣고 겁이 났다.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는 팻말이 있기에 자전거 뒤에 싣고 대사관 쪽으로 페달을 밟았다. 교관은 늦게 왔다고 야단치지 않았다. ‘미군의 인권 무시에 항의한다’고 적힌 팻말을 보고 내 등을 두드려줬다. 나는 정치의식이 전혀 없었다. 키가 크다 보니 별생각 없이 들고 있었다.”

냉전 시절 미군 주둔국의 반미운동은 공통점이 있었다. 반정부운동으로 비화하곤 했다. 장징궈는 이점을 간과했다. 해 질 무렵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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