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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18세 투표권은 줬지만 선거 교육은 없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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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5호 13면

고3도 첫 투표

선거연령이 만18세로 하향 조정되면서 정치 교육 등 후속 조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사진은 지난 3월 청소년단체가 국회 앞에서 ’정치적 의견을 자유롭게 말할 권리를 달라“며 기자회견한 모습. [사진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

선거연령이 만18세로 하향 조정되면서 정치 교육 등 후속 조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사진은 지난 3월 청소년단체가 국회 앞에서 ’정치적 의견을 자유롭게 말할 권리를 달라“며 기자회견한 모습. [사진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

“온라인 클래스에 선거 관련 영상이 올라오긴 했는데 ‘투표의 4대 원칙’ 같은 기본적인 내용뿐이었어요. ‘선거가 있으니 영상 보고 알아서 투표해라’는 느낌을 받았죠. 실제로 도움이 되는 내용이나 관심을 끄는 건 없었어요.”

총선 석달 전 결정, 사전교육 안돼 #청소년 정책·공약도 없어 무덤덤 #교사들 정치중립 의식 “얘기 말자” #학생들 정치 얘기땐 ‘진지충’ 조롱 #정치 교육 규범·가이드라인 필요

광주 지역 고3 학생인 차의진(18)군은 지난달 치러진 총선에서 생애 첫 투표권을 행사했다. 공직선거법 개정으로 선거연령이 만 18세로 하향 조정되면서 주어진 투표권이다. 차군은 청소년이 투표권을 행사하는 첫 선거에 참여했다는 점이 뜻깊었지만 제대로 된 선거 교육은 받을 수 없어 아쉬웠다고 설명했다. 그는 “투표를 직접 하고 보니 개표방송에도 관심이 생겨 친구들과 단톡방에서 실시간으로 얘기를 나누며 방송을 지켜봤다”고 덧붙였다.

지난 총선에서 투표권이 주어진 만18세 인구는 54만9000여 명이다. 전체 유권자의 1.2%에 해당하는 숫자다. 여기에는 일부 고3 학생들까지 포함돼 ‘청소년 참정권 확대’의 신호탄으로 해석하는 시각도 나온다. 2년 뒤 치러질 교육감 선거에서는 만16세까지 투표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주장도 다시 불거지고 있다. 이재정 경기교육감은 올해 초 “2022년 교육감 선거 연령을 만 16세로 낮추기 위해 정부 또는 관계기관과 논의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만18세 선거권’도 이제야 첫걸음을 뗀 상태에서 16세 선거권까지 거론되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반론도 만만찮다.

총선을 불과 석달 앞두고 법이 개정되면서 청소년들이 투표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있도록 도와줄 준비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청소년단체 ‘아수나로’에서 활동하는 이종윤(18·청주 오송고 3)군은 “주변에는 투표권이 있어도 투표를 ‘안’ 하거나 ‘못’ 한 친구들이 여럿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정치에 관심이 없어서 안 했거나, 투표할 시간에 공부나 하라는 부모님 때문에 못 한 경우”라고 전했다. 이창호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학교 현장에서 준비할 시간도 부족했고 국민들 관심이 온통 코로나19에 쏠려 여론이 형성되기도 어려웠다”면서 “장기적으로 선거 교육에 대한 가이드라인뿐 아니라 교육과정도 다시 짜야 한다”고 말했다. 선거사를 어떻게 가르칠지, 모의선거는 어떻게 치를지에 대한 방안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교사들이 자유로운 정치 토론을 이끌기 어렵다는 점은 걸림돌이다. 교사의 정치적 중립 의무에 대한 규정은 교육기본법·공직선거법·국가공무원법·정당법 등 여러 법령에 걸쳐 명시돼 있다. 교육기본법 6조는 교육이 정치적·파당적 편견을 전파하는 데 이용돼선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고, 14조에서는 교사가 특정 정당·정파를 지지하거나 반대하기 위해 학생을 지도·선동해선 안 된다고 정하고 있다.

현직 교사 9명이 ‘정치적 자유를 침해한다’며 헌법소원을 제기한 국가공무원법과 정당법에 대해서는 헌법재판소가 지난달 23일 각기 다른 판단을 내렸다. 공무원이 정당이나 그 밖의 정치단체 결성에 관여하거나 가입할 수 없도록 한 국가공무원법 65조 1항에 대해선 위헌 결정을, 공무원과 교사가 정당의 발기인이나 당원이 될 수 없다고 규정한 정당법 22조 1항에 대해서는 합헌 결정을 내렸다. 이 같은 헌재 결정에 교육계에서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난감해 하는 분위기다. ‘정치단체’의 정의가 무엇인지 불분명한데다 향후 교사들의 정치적 기본권에 어떤 영향을 주게 될지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인헌고 사태’와 같이 학교 내 갈등의 불씨가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지난해 서울 인헌고에서는 일부 교사가 반일사상을 강요하는 등 편향된 정치사상을 주입했다는 논란이 일었다. 학교 측은 비판을 주도한 학생에게 사회봉사 등 징계를 내려 논란이 커졌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분위기가 이렇다보니 교사들은 현실 정치나 시사적인 문제에 대해 거론하는 것 자체를 꺼리기도 한다. 이종윤군은 “수업 시간에 정치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그 부분은 넘어가자고 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김성천 한국교원대 교수는 “교과서를 심의할 때조차 민감한 이슈는 배제하려고 하고, 교사들도 정책이나 시사 이슈는 다루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하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지금부터라도 토의·토론 수업을 적극 도입하고, 정치 교육을 위한 규범이나 가이드를 잘 짜면 경직된 분위기가 조금은 풀어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청소년을 위한 공약이나 정책 개발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도 청소년들이 정치에 무관심하게 만드는 이유다. 서한울(19)군은 강원도 원주지역의 청소년 10명과 함께 ‘투표하자, 십팔!’이라는 프로젝트 모임을 결성했다. 또래 청소년 383명을 대상으로 ‘원주 국회의원에게 바라는 청소년 관련 정책’에 대해 설문조사를 하고 그 결과를 토대로 후보자들을 인터뷰했다. 서씨는 “정치인들이 정말 청소년에게 관심이 없다는 걸 느꼈다”고 말했다. 관심이 없기는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서군은 “학생들도 정치에 대해 얘기를 꺼내면 ‘진지충’이라거나 ‘선비’라고 조롱한다”며 “현실 정치에 대해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져야 분위기가 달라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학생들의 자치 활동을 활성화해 자연스럽게 정치 의식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이종희 선거연수원 교수는 “모의선거의 경우 중앙선거관리위원회와 긴밀한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모의국회나 모의유엔 같은 방법도 있다”며 “독일과 북유럽의 사례를 참고할 만하다”고 말했다. 독일은 중앙에 연방정치교육원, 각 주에 주정치교육원을 운영하고 있다. 정치교육원은 정치에 대한 여러 교재를 만들어 학교 현장에 지원해준다. 정치교육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모아 ‘보이텔스바흐 합의’라는 기본원칙도 만들었다.

스웨덴은 ‘알메달렌 위크(Alme-dalen Week)’라는 정치 축제가 활발하다. 시민 누구나 참가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자리다. 이 교수는 “학생들이 직접 와서 ‘어른들의 휴가 기간과 학생들의 방학 기간이 맞지 않는 건 문제’라면서 데모하는 모습도 있었다”고 전했다. 스웨덴 외에도 핀란드·덴마크·노르웨이 등 북유럽의 많은 국가들이 정치축제를 열고 있다. 우리나라도 2018년 처음으로 ‘유권자정치페스티벌’을 개최했다. 이 교수는 “정치·선거에 흥미 요소를 가미해 청소년들의 관심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치교육 교과서 독일 보이텔스바흐 합의…‘학생에 강압 안된다’ 대원칙

모의선거 중인 독일 청소년. [사진 유니어발]

모의선거 중인 독일 청소년. [사진 유니어발]

교사와 학생이 교실 안에서 정치 토론을 펼칠 날이 올까. 40여년 앞서 독일은 보이텔스바흐 합의를 통해 답을 찾았다. ‘정치교육의 교과서’라 불리는 이 합의는 교사가 교육 현장에서 정치·사회 이슈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제시한 교육지침이다.

1968년 독일은 기존 체제에 저항하는 학생운동이 발생하면서 좌우간 대립의 골이 깊어졌다. 보수정당인 기독민주연합(기민련)과 진보정당인 사회민주당(사민당)의 갈등이 주(州) 정부의 정치성향뿐만 아니라 정규 교육 과정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교육 전문가들은 교육현장에서 더 이상의 파열음을 막고자 1976년 11월 독일 소도시인 보이텔스바흐에 모이게 된다. 보수와 진보를 망라한 교육 이론가들이 이틀간의 토론 끝에 정치교육체계의 기틀을 마련했다.

보이텔스바흐 합의는 크게 세 가지 원칙으로 구성돼 있다. 제1원칙은 강압 금지 원칙이다. 학생들의 자립적 판단을 제압하거나 방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주입식 교육 금지라고도 불린다. 제2원칙은 논쟁 재현의 원칙이다. 정치와 학문에서 논쟁적인 이슈는 학교 수업에서도 논쟁적으로 다뤄야 한다는 내용이다. 민감한 사안이라고 수업 내용에서 배제하면 오히려 특정 방향으로 쏠림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게 독일 교육 전문가들의 생각이다. 논란이 있는 부분은 양쪽 입장을 모두 전달한다. 마지막은 학생 중심의 원칙이다. 학생 스스로가 정치적 사항과 관심 분야에 대해 분석할 수 있도록 학교와 교사는 학생의 관심을 무엇보다 존중해야 한다.

보이텔스바흐 합의는 역사교육에서 적극적으로 수용됐다. 기존의 주입식 교육에서 벗어나 사료에 대한 접근과 해석을 학생 스스로 할 수 있는 토대가 됐다. 법적 구속력을 갖는 합의는 아니다. 하지만 교사가 학생에게 강압과 주입을 해선 안 된다는 원칙을 준수하면서 오늘날 민주주의 교육의 표본으로 손꼽히고 있다.

김나윤 기자

최은혜·김나윤 기자 choi.eunhye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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