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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괄량이’ 춘향의 화끈한 사랑가, 코로나 뚫고 퍼진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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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라운지] 돌아온 소리꾼, 국립창극단 이소연

이소연이 연기하는 ‘춘향’은 몽룡 앞에서 수줍게 웃다가 방자에게 걸쭉한 욕바가지를 퍼붓고 사또 앞에선 절개와 강단도 드러내는, 카멜레온처럼 변화무쌍한 여자다. 김경빈 기자

이소연이 연기하는 ‘춘향’은 몽룡 앞에서 수줍게 웃다가 방자에게 걸쭉한 욕바가지를 퍼붓고 사또 앞에선 절개와 강단도 드러내는, 카멜레온처럼 변화무쌍한 여자다. 김경빈 기자

역병의 무게를 밀쳐내고 2020년 봄 공연계 문을 열어젖힌 첫 번째 주인공은 춘향이다. 올해 70주년을 맞은 국립극장이 창극 ‘춘향’(14~24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으로 기지개를 켠다.

10년 만에 선보이는 정통 창극 #감정에 솔직한 춘향 표현에 중점 #객석 위로 날아가는 대형 그네 등 #볼거리 많지만 ‘소리’로 진검 승부

‘창극 하면 춘향가’지만, 이번 공연은 남다른 의미다. 그간 창극의 외연 확장에 방점을 찍고 실험에 매진하던 국립창극단이 10년 만에 선보이는 ‘정통 춘향’ 이라서다. 10년 전 공연에서도 춘향이었던 소리꾼 이소연(36)도 ‘변강쇠 점 찍고 옹녀’의 옹녀, ‘오르페오전’의 애울, ‘산불’의 점례 등 온갖 배역을 거쳐 다시 춘향이로 돌아왔다. “춘향이는 기운 센 여자거든요. 다들 ‘춘향’ 만큼은 미뤄지지 않길 바랐는데, 정말 코로나가 춘향 앞에서 약해졌네요.(웃음) 그동안 다들 많이 힘드셨는데, 춘향 보면서 봄기운도 만끽하시고 밝은 기운 듬뿍 받아가셨으면 좋겠어요.”

지난해 11월 ‘패왕별희’ 이후 반년 만에 무대에 선다는 이소연은 들떠 보였다. 사상 초유의 사태 속에서 무대의 소중함도 절실히 느꼈고, 10년 전 국립극장의 문을 처음 두드렸던 설렘까지 되새기고 있다고 했다. “입단 전에 주역 오디션에 뽑혀서 춘향이를 통해 처음 국립극장에 발을 들이게 됐거든요. 그때 생각이 많이 나요. 당시엔 춘향이 4명이나 돼서 제게는 딱 하루 공연만 주어졌거든요. 너무 소중한 기회라 김지숙, 박애리 선생님들 열심히 보면서 공부하던 마음도 새록새록 떠오르고요.”

첫날밤 사랑의 몸짓 무용으로 극대화

소리꾼에게 춘향이라는 배역은 각별하다. 연극으로 치면 햄릿쯤 될까. 한국을 대표하는 러브스토리의 여주인공인 만큼, ‘창극의 꽃’과 같은 캐릭터다. “익숙할 것 같지만, 창작 창극보다 더 어려워요. 워낙 선생님들이 해오신 레퍼런스도 많고, 춘향은 이래야 한다는 관객들의 기대치에 부응하면서도 시대에 맞게 새로운 걸 만들어 내야 하는 부담도 있죠. 100년 넘게 흘러오는 귀한 소리를 소리꾼으로서, 또 춘향 이미지 안에서 얼마나 잘 소화해 내느냐도 관건이고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참 어렵지만, 이번이 제게는 마지막 춘향이라는 각오로 만개하고 지려고 해요.”

전통 속에서 동시대성을 추구하는 김명곤 연출이 춘향 캐릭터에 던진 화두는 ‘말괄량이 소녀’다. 딱 요즘 중학생 느낌을 요구한다. “단오날 광한루 나가는 것도 중학생이 친구들이랑 놀러 가면서 엄마 몰래 사복 챙겨가는 느낌으로 하라고, 명랑하고 쾌활한 춘향이였으면 좋겠다고 하시거든요. 사실상 제가 월매 나이라 좀 닭살이 돋긴 해요.(웃음) ‘꺄르르’ 하이톤으로 웃는 장면에선 ‘내가 언제 이리 웃어봤지’ 싶고. 그래도 한껏 어린 감성을 내려고 노력 중입니다.”

사실 원전의 춘향은 단아하고 정숙한 고전적 여인상과는 거리가 멀다. 몽룡 앞에서 수줍게 웃다가 방자에게 걸쭉한 욕바가지를 퍼붓고 사또 앞에선 절개와 강단도 드러내는, 카멜레온처럼 변화무쌍한 여자다. “연출이 원전을 잘 알고 계시니까요. 몽룡과 이별할 때도 얌전히 순종하는 게 아니라 옷고름 풀어헤치고 거울을 다 깨부수는 사설도 있다더군요. 그런 솔직한 여인의 마음을 더 살리고 싶으신 것 같아요. 감정에 굉장히 솔직한 춘향이를 보시게 될 겁니다.”

몽룡 역을 맡은 김준수(왼쪽)와 이소연. [사진 국립창극단]

몽룡 역을 맡은 김준수(왼쪽)와 이소연. [사진 국립창극단]

이소연은 2014년 오페라 거장 안드레이 서반이 연출한 ‘다른 춘향’에서도 춘향을 연기했다. 브라톱을 입은 섹시한 여인이 비극을 겪고 백발의 노파로 변해 가는, 역대 가장 파격적인 춘향이었다. “한국인이라면 춘향을 절대 그렇게 볼 수 없을 텐데, 그야말로 술집 여자 취급받는 여자로 만들어 춘향의 슬픔과 애환을 다이나믹하게 그려냈죠. 파격적이고 신선했지만 철저히 외국인의 시선이었다면, 이번엔 동시대 한국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죠.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요즘 사람들이 하는 사랑이란 느낌이 물씬 풍기는 무대가 될 거예요.”

사실 이소연은 국립창극단의 대표 레퍼토리로 6년 연속 공연된 ‘변강쇠 점찍고 옹녀’의 옹녀 이미지가 강하다. 본인도 기혼자로서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하는 춘향보다 결혼생활 안에 있는 옹녀가 편하다”고 고백한다.

한편 몽룡은 ‘창극계 아이돌’ 김준수가 맡았다. ‘패왕별희’에서 우희로 완벽 변신할 만큼 ‘예쁜 남자’다. “준수가 요즘 ‘부부의 세계’에 나오는 한소희 배우 닮았다는 소리까지 듣거든요. 얼굴도 아주 작고 춤 선도 아름다워서 춘향보다 예쁜 몽룡이 될까 봐 걱정이에요.(웃음)”

원전 해석에 충실한 정통 창극이지만, 하이라이트인 사랑가 대목에선 파격을 기대해도 좋다. 속옷 차림으로 소리를 하면서 안무와 연기까지 곁들이기 때문이다. “예전 춘향가에선 발림 정도 하면서 넘어갔다면, 이번엔 첫날밤 사랑 나누는 몸짓을 무용으로 극대화해 보여주거든요. 몽룡은 씨스루 저고리를 입고 춘향은 속치마 하나만 걸치는데, 사실 그것도 걱정이죠. 내 몸이 반감을 주진 않을까 싶어서요.(웃음)”

춘향가의 시그니처인 광한루 그네 장면도 볼거리다. 뮤지컬 ‘마틸다’처럼 대형 그네가 객석을 향해 날아가도록 디자인되어 관객에게도 아찔한 순간을 선사한다. “겁이 많아 객석까지 날아가는 게 좀 무서운데, 춘향이 속치마가 관객에게 보일 듯 말 듯 해야 하거든요. 춘향이 속까지 보고 싶은 몽룡의 마음을 관객도 느끼게 하려는 것이라 하시네요.(웃음)”

맛깔스러운 양념도 도처에 있지만, ‘춘향’의 관전 포인트는 소리다. 국립창극단이 ‘소리꾼이 가진 힘을 제대로 보여주겠다’고 벼르고 있다는 것이다. “연출님도, 예술감독님도 관객들이 ‘이 사람 소리를 또 들으러 가고 싶다’는 감상을 남겨야 한다고 하시거든요. 소리로 하는 진검 승부랄까. 누가 해도 좋은 게 아니라 이소연의 춘향을, 김준수의 몽룡을 다시 보고 싶게 만드는 게 목표예요.”

하지만 실험에서 정통으로의 회귀를 아쉬워하는 시선도 있을 터. 이소연은 “그동안 창작을 통해 넓어진 관객층이 지금쯤은 제대로 된 정통 창극을 볼 때가 됐다”는 말로 응수했다. “그동안 창작을 많이 보여드렸으니 외려 정통 창극을 접하지 못한 팬들도 많거든요. 그분들이 그동안 재밌게 본 창작 창극이 원래 여기서부터 발전된 것이며, 정통 창극도 지루하지 않고 요즘 시대에 어울릴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실 겁니다.”

춘향보다 예쁜 몽룡 될까 걱정도

선이 곱고 단아한 외모에서 뿜어내는 놀랄만큼 우렁찬 소리가 시그니처인 이소연은 드물게도 판소리 ‘적벽가’ 이수자다. 적벽가는 삼국지 적벽대전을 소재로 한 바탕인 만큼, 한문과 고어가 가장 많이 쓰이고 소리도 남성적이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박봉술제 적벽가 보유자인 송순섭 옹에게서 열한살 때부터 흥보가와 수궁가를 배웠는데, 남자 어른들이 적벽가 이수받는 모습이 그렇게 부러웠단다. “여자가 많이 안 하니까 뚫어보고 싶었달까요. 적벽가엔 춘향가나 심청가를 뛰어넘는 어려움이 있는데, 그 한계를 넘어서는 재미가 있어요. 옛날 선생님들도 ‘적벽가 할 줄 아십니까’에서 시작해서 ‘흥보가 할 줄 아는가’하는 식으로 점점 낮아졌다고 하는데, 그만큼 귀하고 어려운 소리라 함부로 가르쳐 주지 않거든요. 스승님께 감히 가르쳐 달라는 말도 못 꺼냈죠. 20대 때 처음 아니리 첫 소절 ‘한나라 말엽 위·한·오 삼국 시절에…’를 입에서 떼는데, 어찌나 설레던지. 너무도 배우고 싶던 소리를 드디어 하게 됐으니까요.”

개인적으로 뮤지컬 ‘아리랑’ ‘서편제’에 출연하며 호평받았던 뛰어난 연기력의 바탕은 연극이다. 대학 시절 선배의 권유로 극단에서 연기를 배우며 소리의 숨겨진 매력에 새삼 눈뜨게 됐다고 말한다. “전에는 소리를 스승님이 알려준 대로 기술에만 집중했었거든요. 연극을 하고 나서 돌이켜보니, 판소리 사설에 흥미로운 부분이 많은데 성음과 기술적인 시김새만 표현하느라 놓치고 있었더라고요. 어쩌면 그래서 소리가 외면받았을 수 있었겠구나, 내가 잘 살려서 해봐야겠다 싶었어요. 그때 판소리의 진짜 재미를 느낀 덕분에 여기까지 왔네요.”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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