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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땅 헤딩’ 2년 만에 기업 회생…7만원의 기적 일군 축구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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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5호 24면

[스포츠 오디세이] 전 올림픽축구 8강팀 코치 이상철

큰 선박에 들어가는 핵심 부품을 생산하는 업체가 있었다. 특허 기술도 여러 개 있고 국내 3대 조선사(현대중공업·삼성중공업·대우조선해양)에 납품하는 강소기업이었는데 자금난에 부닥쳤다. 이 회사 부사장으로 들어온 사람은 입사 한 달만에 얼떨결에 ‘부도 기업’의 대표가 됐다. 전(前) 대표가 남긴 법인 통장에는 7만9080원이 찍혀 있었다.

울산 현대서 활약, 2002월드컵 해설 #부품사 부사장 입사 한 달 만에 부도 #법인 통장 7만9080원 때 대표 맡아 #조선사·투자자 찾아 백방으로 뛰어 #법정관리 졸업, 강소기업 명성 회복 #“팀 플레이 축구·경영 닮은 점 많아”

이 업체는 부산 강서공단에 있는 (주)광산이다. 광산은 2년 만에 법정관리를 졸업하고 새 도약을 꿈꾸는 일터로 순항 중이다. ‘7만원의 기적’을 일궈낸 대표는 축구인 출신 이상철 씨다. 경영을 해본 적도 없고, 조선·선박 쪽에 가본 적도 없는 그는 스포츠인의 끈기와 집념, 단순하면서도 진정성 있는 설득으로 큰일을 해냈다. 80명에서 25명으로 줄었던 직원은 60명선으로 회복됐다. 코로나19로 모두들 힘들지만 광산은 매달 20억원대 주문을 받아 공장을 80% 이상 가동하고 있다.

박항서·최강희 등 축구인 도움도 큰 힘

㈜광산이 생산하는 선박용 히팅 코일은 세계 최고의 품질을 자랑한다. 출고를 앞둔 히팅 코일 앞에서 이상철 대표가 헤딩 시범을 보여주고 있다. 송봉근 기자

㈜광산이 생산하는 선박용 히팅 코일은 세계 최고의 품질을 자랑한다. 출고를 앞둔 히팅 코일 앞에서 이상철 대표가 헤딩 시범을 보여주고 있다. 송봉근 기자

이 대표는 축구 명문인 서울 경신고와 고려대를 졸업하고 울산 현대에서 공격수로 뛰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는 KBS TV에서 16강전-8강전-준결승과 3·4위전 해설을 맡았다. 특유의 힘있는 목소리와 신명난 해설로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팀 수석코치로 김호곤 감독을 도와 사상 첫 올림픽 8강의 성적을 냈다. 이후 울산 현대 수석코치, 울산대 감독 등을 거치며 숱한 우승을 거두고 빼어난 선수들을 키워냈다.

축구인 CEO의 드라마같은 반전 스토리를 듣기 위해 부산을 찾았다. 이 대표는 “내가 경영을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절대 이 일에 뛰어들지 않았을 겁니다. 무식해서 용감했던 거지요”라며 껄껄 웃었다.

이 대표가 (주)광산에 들어온 건 2018년 6월이었다. 축구 현장을 떠나 조그만 사업체를 하다가 지인의 소개로 광산 부사장을 맡게 됐다. 입사 한 달만에 새 명함을 들고 조선소를 찾아다니며 “축구밖에 한 게 없어 아무 것도 모릅니다. 도와주십시요” 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회사가 부도를 맞았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첫 올림픽 8강에 오른 2004 아테네 올림픽 축구팀 이상철 수석코치(가운데). [사진 대한축구협회]

첫 올림픽 8강에 오른 2004 아테네 올림픽 축구팀 이상철 수석코치(가운데). [사진 대한축구협회]

이 대표는 “그 순간 얼마나 당황스럽고 얼굴이 화끈거리던지요. 하나님이 이건 하지 말라고 신호를 주셨나 싶어서 조용히 떠나려고 했죠. 그런데 남은 직원들과 소규모 납품업체 사람들이 저를 붙들고 ‘부사장님이 떠나시면 우린 다 죽습니다. 저희가 도와드릴 테니까 제발 회사를 살려주세요’라고 호소하는 겁니다. 그 애절한 눈빛을 보고는 도저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어요”라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때부터 ‘맨땅에 헤딩’이 시작됐다. 기업인·은행가 선배들, 축구인 출신 법무사·노무사·변호사를 찾아다녔다. 부도난 회사를 살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기초부터 공부했다. “법정관리 회사는 임금체불만 잘 해결하면 된다. 못 받은 퇴직금을 나라에서 일부 보전해주는 소액체당금 제도를 활용하라”는 조언을 받아 퇴직자들의 체임 문제를 일단 봉합했다. 소액 채권자들에겐 ‘우리는 반드시 살아난다.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설득했다.

문제는 끊어진 주문을 다시 받는 것이었다. 이 대표는 거제 삼성중공업부터 찾아갔다. 구매담당 대리는 “법정관리 회사에 발주했다가 문제 생기면 내 목도 달아납니다. 도대체 왜 광산에 수주를 해야 하는지 저부터 설득해 보세요”라고 했다. 이 대표는 “우리 직원들의 절박한 눈동자를 보십시요. 생산이 끊어지면 아이들 우윳값, 학원비도 못 냅니다. 저희, 기술은 자신 있습니다. 제가 여기 무릎 꿇으라면 꿇겠습니다”고 호소했다. 결국 삼성중공업은 광산에 납품을 허락했다.

이 대표는 현대중공업에도 찾아갔다. “현중에서 단가계약(1년치 수주 물량과 단가를 정하는 것)을 안 해주시면 우린 다 죽습니다. 저를 봐서라도 단가계약을 해 주십시요”라고 읍소해 계약을 따냈다.

생산 물량은 확보했지만 자금줄이 말라가고 있었다. 시급히 투자를 받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었다. 이 대표는 회생계획안을 갖고 투자사·은행 등 백방으로 뛰었다. 다행히 8개 은행이 공동 출자한 유암코(UAMCO)와 연결됐고, 2주 동안 고강도 실사를 받았다. 결과는 ‘투자 부적격’. 빚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허탈감 속에서도 이 대표는 또다시 유암코를 찾아간다. 이성규 당시 사장은 이 대표와 독대해 이야기를 들은 뒤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저도 스포츠를 무척 좋아합니다. 사실 제가 국민은행 여자농구팀 단장 출신입니다. 스포츠인으로서 이 대표의 뚝심과 진정성을 믿어보고 싶네요.” 그리고 일주일 뒤 투자 결정이 났다.

이상철 대표의 경신고 1년 후배인 박항서 감독(오른쪽). [사진 이상철]

이상철 대표의 경신고 1년 후배인 박항서 감독(오른쪽). [사진 이상철]

그 뒤로도 몇 차례 엎치락뒤치락 반전 끝에 2019년 11월 25일 창원지방법원 파산부에서 (주)광산의 회생안을 승인했다. 법정관리 졸업을 확인한 순간 직원들과 이 대표는 얼싸안고 펑펑 울었다. 이 장면을 회고하는 이 대표의 눈에 또다시 물기가 맺혔다.

드라마 중간중간에 축구인들이 등장한다. 창원지법 파산부의 전문위원은 축구 해설에다 감독까지 한 사람이 법원을 드나드는 걸 보고 주위에 자초지종을 물었다. 집에 가서 부인에게 그 얘기를 전하자 “그럼 그 대표란 분이 박항서 감독님 경신고 1년 선배네요. 당신 그분한테 진짜 잘하셔야 돼요”라고 신신당부 하더란다. 알고 보니 부인이 박항서 감독과 경남 산청의 생초초등학교를 같이 다닌 후배라고 했다. 박 감독도 이 대표와 통화할 때마다 “아직 베트남 대표팀 감독을 맡고 있을 때 제가 도울 일이 있으면 얘기하세요”라고 선의를 베푼다.

어느날은 중국 상하이에 수주차 출장을 간 직원이 밤늦게 이 대표에게 전화를 했다. 무슨 큰일이 난 줄 알았는데 직원이 “중국 조선소 구매담당자가 대표님과 최강희 감독님이 친하다는 얘기를 듣고 사진을 좀 보내달라고 합니다”고 했다. 울산 현대 시절 각별한 선후배였던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을 카톡으로 보내주자 중국 담당자가 그 자리에서 수주 계약에 오케이를 했다고 한다.

이 대표의 고등학생 시절을 기억하는 분도 있다. “부산 대선조선 이수근 대표님은 경신고 5년 선배입니다. 제 고등학교 때 키와 몸무게도 기억하시더라고요.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경기에서 제가 30m 중거리 골을 터뜨린 장면을 정확하게 복기하셔서 소름이 끼쳤지요. ‘협력해서 어려운 시기 잘 버텨 나갑시다’는 격려에 큰 힘을 받으면서 정말 잘 살아야겠다는 각오도 다지게 됐죠.”

“더 힘든 곳 맡아달라” 스카우트 제의도

(주)광산의 주력 생산품은 선박 침몰 시 급격한 전복을 막아주는 에어 벤트 헤드(Air Vent Head)와 유조선 바닥에 깔아 열을 전달하는 히팅 코일(Heating Coil)이다. 두 제품의 기술력은 세계 최고를 자랑한다. 얼마 전에는 조종래 부산중기벤처청장이 공장을 방문해 “법정관리 졸업한 회사를 응원 왔습니다. 어려운 점 있으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라며 격려했다.

축구와 기업경영 중 어떤 게 더 힘든지 묻자 이 대표가 웃으며 답했다. “축구는 육체적으로 힘들고 호흡이 가쁘죠. 경영은 머리가 터질 것 같고, 호흡이 가쁘지 않은데도 숨이 더 찹니다. 내 잘못이 아닌데 모멸감과 수모도 겪었지요.” 경영과 축구가 비슷한 점도 많다고 했다. “축구 팀을 짤 때 ‘스트라이커-중앙 미드필더-중앙 수비수-골키퍼’로 가운데 뼈대를 만든 뒤 살을 붙여 나갑니다. 경영도 그래요. 생산-영업-관리의 축을 만들면 짜임새가 갖춰지죠. 각자 역할을 잘 하면서 서로 돕는 팀이 이기는 건 축구나 회사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대표는 “광산의 기술력과 직원들의 의지를 믿고 투자해 준 유암코와 여러 조선소 관계자분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법정관리라는 큰산을 넘고 한숨 돌릴 틈도 없이 코로나19가 닥쳤네요. 축구에서 제일 힘들다는 수중전을 치르는 느낌이지만 이 또한 이겨내겠습니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 스카우트 제의를 받는다고 했다. “다 망한 회사를 살려놨으니 더 힘든 곳도 맡아달라는 겁니다. 이것도 프로에요. 하하하.”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중앙콘텐트랩 jerr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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