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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권혁주 논설위원이 간다

중국발 메모리 위기론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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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권혁주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중국의 반도체 굴기

중국은 현재 15%인 반도체 자급률을 2025년 70%로 높인다는 목표 아래 정부가 거액을 투자하고 있다. 시진핑 국가주석이 반도체 제조시설을 돌아보고 있다. [신화=연합뉴스]

중국은 현재 15%인 반도체 자급률을 2025년 70%로 높인다는 목표 아래 정부가 거액을 투자하고 있다. 시진핑 국가주석이 반도체 제조시설을 돌아보고 있다. [신화=연합뉴스]

지진일까, 아니면 찻잔 속 태풍일까. 중국 반도체 업체 ‘양쯔메모리테크놀러지(YMTC)’가 지난달 중순 세계를 긴장시켰다. “128단 3D 낸드플래시 메모리를 개발했다. 올해 연말에 양산한다”고 발표했다. 핵심은 ‘128단’이라는 숫자다. 메모리를 128층으로 쌓아 올렸다는 의미다. 층수는 낸드플래시 경쟁력의 핵심 요소다. 현재 선두 주자인 삼성전자·SK하이닉스도 이 정도 수준이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3분기에 128단 낸드 양산을 시작했고, SK하이닉스는 올 2분기 예정이다.

점점 빨라지는 중국의 기술 추격 #인공지능 결합하면 한층 큰 위협 #한국은 성능 한계에 점점 다가가 #정부, 차세대 메모리 R&D 나서야

중국, 한국 수준의 낸드플래시 개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과 중국 사이에는 격차가 꽤 있었다. YMTC가 32단 낸드플래시를 자체 개발했다고 발표한 게 2018년 8월이었다. 삼성전자가 비슷한 제품을 생산하고 4년이 흐른 뒤였다. 또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32단은 물론 48단을 넘어 64단을 만드는 단계였다. 중국이 삼성·SK 등을 표적 삼아 시위에 활을 매겼지만, 당시만 해도 닿기 힘든 거리였다. 그러던 것이 이젠 턱밑까지 추격했다고 할 만큼 기술 격차가 좁혀졌다. 이대로면 주력 중의 주력인 한국 반도체 산업이 강력한 도전자를 맞게 된다. 물론 이는 ‘연말 양산’이라는 YMTC 발표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을 때의 얘기다.

YMTC는 전에도 양산 계획을 발표한 적이 있다. 32단은 2018년 말, 64단은 지난해 말이었다. 그러나 정작 시장에서는 YMTC 제품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양산이 아니라 시제품을 내놓는 수준이었다. 128단 낸드 역시 시제품 생산 정도일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한양대 박재근(융합전자공학부) 교수는 “128단 낸드를 연말에 양산하려면 벌써 생산 장비를 대규모로 사들여야 했는데 그런 움직임이 없다”고 말했다.

중국은 왜 애써 메모리를 개발하고 나서도 시제품만 내놓는 것일까. 국내 업계와 학계에선 “수율이 문제일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수율이란 반도체 웨이퍼 한장에서 망치지 않고 얼마나 많은 메모리 칩을 만들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수치다. 수율이 떨어지면 낭비가 많아 적자가 난다.

박재근 교수는 “수율이 90% 이상 나와야 경쟁력이 있는데 중국은 그 수준에 이르지 못한 것 같다”고 진단했다. 중국의 메모리 개발 기술은 빠르게 발전하고 있으나 생산 기술은 그에 미치니 못한다는 의미다. 박 교수는 “그렇다고 한숨 돌리기엔 이르다”고 덧붙였다. 그는 “생산은 일단 제쳐놓고, 개발 기술을 먼저 따라잡자는 게 중국의 전략”이라고 소개했다.

왜 그런 전략을 택했을까.
“메모리는 뒤진 기술로 시장에 제품을 내놓아 봐야 적자만 쌓인다. 그럴 바엔 일단 제품 개발에서 삼성·SK를 따라잡은 뒤 시장에 진입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제품 개발에도 엄청난 투자가 필요하다.
“중국은 기술 개발 속도를 만족시키면 정부가 계속 투자한다(YMTC는 국영 기업이다). YMTC에도 그렇게 해왔다.”
정부가 원하는 속도를 YMTC가 맞춰 왔나.
“기술 추격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다.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 머뭇거리다가는 정말 따라잡힐 수 있다.”

중국 정부는 반도체 굴기를 위해 엄청난 실탄을 쟁여 놓았다. 반도체 투자용으로 두 차례에 걸쳐 조성한 정부 펀드가 약 58조원에 이른다. 낸드 플래시뿐 아니라 D램 등에도 투자할 재원이다. 개발 기술에서 완전히 한국을 따라잡았다고 판단하면 거액을 쏟아부어 생산시설을 갖출 것이다. 그렇다면 관건은 고성능 신제품 개발 기술의 격차 유지다.

하지만 만만치 않다. 벌써 걱정하는 소리가 나온다. 단지 중국의 발걸음이 빨라서만은 아니다. ‘기술’이란 것이 가진 내재적 한계 때문이다. 어떤 기술이든 언젠가는 발전이 더뎌지게 마련이다. 낸드 플래시는 메모리 층수를 쌓는 속도가, D램은 선폭을 줄이는 속도가 그렇다. 10년 전엔 한 해 10㎚(1㎚=1㎜의 100만분의 1)씩 팍팍 줄던 D램 선폭이 이젠 1㎚씩 줄어든다. 5년 전 10㎚대에 진입하고도 여태껏 14~15㎚를 맴돈다.

선도 업체의 기술 개발이 느려지면 추격자는 따라잡을 시간을 번다. 혹시 메모리가 아슬아슬한 국면에 진입한 건 아닐까. 삼성전자 박찬익 메모리기획팀장(상무)에게 물어봤다.

D램 선폭 축소가 한계에 가까워진 것 아닌가.
“아직은 아니다. 과거 선폭이 100㎚ 일 때 10㎚를 줄인 것과 요즘 10㎚에서 1㎚를 줄인 것은 개선도가 10%로 똑같다. 1㎚라고 해서 예전보다 개선 속도가 떨어졌다고 보는 것은 적절치 않다. 지금도 종전과 비슷한 신제품 개발 주기를 유지하고 있다. 다만 선폭을 줄이는 게 점점 더 어려워지고는 있다.”
낸드플래시는 몇 층까지 쌓는 게 가능한가.
“불과 2, 3년 전만 해도 100단을 넘을 수 있을지 의구심을 가졌다. 그런데 이미 100단을 넘었다.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예단하기 어렵다.”
낸드든, D램이든 언젠가는 한계에 부닥칠 수밖에 없다. 그다음에 대비해 어떤 준비를 하고 있나.
“몇몇 차세대 메모리 후보를 개발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D램의 속도와 낸드의 가격·용량을 능가하는 메모리가 없다.”

기존 메모리 대체할 신물질도 못 찾아

이종호 교수

이종호 교수

원천기술을 연구하며 조금 더 멀리 내다보기 때문일까. 학계는 산업계보다 한층 다급하다. 이종호 서울대 반도체공동연구소장(전기정보공학부 교수)은 “10년을 장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 안에 추격당한다는 뜻인가.
“중국 D램 기술도 선폭 10㎚대에 들어왔다. 그들은 ‘한국이 8, 9㎚까지 갈 수 있겠느냐’고 생각한다. 한국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을 때 따라잡는다는 것이다. 한국은 갈 곳이 없다. D램과 낸드플래시 다음이 보이지 않는다.”
대책이 뭘까.
“그간 정부는 ‘기업이 잘하고 있다’며 메모리 연구개발(R&D)에 거의 투자하지 않았다. 연구비가 없으니 교수들도 외면했다. 그러다 보니 기존 메모리를 대체할 신물질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 메모리는 한국이 주도권을 놓치면 곤란한 분야다. 기업에만 맡길 게 아니다. 집단 지성이 필요하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정부가 R&D에 나서야 한다.”
수율 같은 반도체 생산기술에서는 중국이 아직 우리에게 한참 뒤졌다고들 한다.
“중국은 인공지능이 강하다. 인공지능을 생산공정과 접목해 순식간에 수율을 끌어올릴 가능성도 있다.”

낸드플래시와 D램

중국 YMTC가 최근 자체 개발한 128단 낸드플래시 메모리. [사진 YMTC]

중국 YMTC가 최근 자체 개발한 128단 낸드플래시 메모리. [사진 YMTC]

메모리 반도체의 대표적인 두 종류가 D램과 낸드플래시다. D램은 전원을 끄면 메모리가 지워지는 반면 낸드플래시는 유지된다. 또한 D램은 빠른 속도가, 낸드플래시는 싸게 대용량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게 강점이다. 이런 특성 때문에 쓰임새가 다르다.

D램은 주로 컴퓨터 CPU가 연산하는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데이터를 저장했다가 꺼내 쓰는 데 사용한다. 낸드플래시는 데스크톱·노트북PC·스마트폰에서 문서·사진·동영상 등을 저장하는 장치에 쓰인다.

D램과 낸드는 발달하는 방향도 달랐다. D램은 계속 선폭을 좁혔다. 그래야 D램의 특징인 속도를 더 빠르게 할 수 있어서다. 낸드플래시처럼 위로 여러 층 쌓아 올리는 것은 속도 개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낸드의 경우에 계속 위로 쌓아 올려 층수를 높인 건 그게 값싸게 용량을 늘리는 길이어서다.

삼성전자에 따르면, ‘채널 홀(channel hole)’이라는 아주 가느다란 구멍을 똑바로 뚫는 게 낸드 플래시 층수를 올리는 핵심 기술이다. 채널 홀은 고층 건물의 엘리베이터 통로에 비유할 수 있다. 각 층을 돌아다니며 몇 호실에 어떤 데이터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통로다. 채널 홀의 굵기는 머리카락의 약 600분의 1이다. 손톱만 한 낸드플래시 메모리 칩 하나 안에 이런 채널 홀 19억 개가 뚫려 있다.

중국은 D램 분야에서 국영 기업인 칭화유니그룹을, 낸드플래시는 그 자회사인 YMTC를 내세워 한국을 뒤쫓고 있다. 중국 내 반도체 수요는 지난해 2700억 달러(330조원)이며 자급률은 15%다. 2025년까지 자급률을 70%로 끌어올리는 게 중국의 목표다.

권혁주 논설위원